역사란?
 사(史 )는 중(中, "仲"의 본자로 중재하여 결단한다는 뜻)과 우(又, 오른손.붓을 쥐고 기술한다는 뜻)로 구성된 글자다. 곧 중재하여 기술한다는 뜻을 나타내는데, 성상(星象)을 관측하고 길흉(凶吉)과 복서(卜筮) 등 중대한 활동에서 논단하고 아울러 책에다 기록하는 것을 말한다. 옛날에는 박학한 문관을 "사(史)"라 하였고 행정을 관리하는 관리를 "리(吏)"라 하였다. 이 글자의 뜻을 가장 장 반영한 단어를 든다면 병필(秉筆)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 기술 방식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역사를 기술해왔는데 대체로 편년체와 기전체, 기사본말체의 방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 방식은 곧 역사 기술의 발전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각 기술 방식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편년체(編年體): 역사를 연대순으로 기술하는 방식. 예를 들자면 공자가 노(魯)나라 사관이 남긴 역사를 제자들을 교육할 목적으로 정리한 《춘추(春秋)》, 송나라 사마광(司馬光)이 주 편집자가 된 《자치통감(資治通鑒)》,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중심으로 조선 역대 왕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등과 같은 사서가 있다. 이 방식은 역사의 전반적인 흐름을 파악하는 데는 용이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으나 인물과 사건이 이어지지 않고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단점이 있다.
 2) 기전체(紀傳體): 역사를 인물 중심으로 기술하는 방식. 여기서 기(紀)는 본기(本紀)를 말하고 전(傳)은 열전(列傳)을 말한다. 예를 들자면 기전체의 효시가 된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비롯한 25사가 있고, 고려의 김부식(金富軾)이 주 편집자가 되어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도 기전체이다. 25사로 대표되는 기전체는 달리 정사체(正史體)라고도 한다. 기전체를 정사체라고 부르는 이유는 첫째 체제가 정식으로 갖추어진 사서, 둘째 정통을 이어받은 왕조가 간행한 사서라는 뜻이 있다. 당대(唐代) 전까지는 개인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기술하고 추후에 조정에서 인정하는 사찬(私撰) 형식이었는데, 당대 이후로는 조정에서 주도하는 관찬(官撰)의 형태로 바뀌었다. 이 방식은 인물 중심의 서술로 사건을 파악하는 데는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으나 중복 서술이 불가피하다는 단점이 있다.
 3)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 역사를 하나의 사건[事]을 중심[本末]으로 기술[紀] 방식이다. 예를 들어 송나라 원추(袁樞)가 《자치통감》의 기술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통감기사본말(痛鑑記事本末)》, 연려실(練藜室) 이긍익(李肯翊)이 조선의 역사를 야사 중심의 사건으로 구성한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등이 대표적이다. 연대 중심의 편년체(編年體)와 인물 중심의 기전체(紀傳體) 서술의 단점을 상호 보완하여 하나의 사건에 몰입하게 하는 집중력이 있는 서술은 장점으로 꼽히나 자칫하면 야사 중심으로 흐를 가능성이 많다는 단점도 있다.
 이상은 기술 방식을 가지고 분류한 것이며, 이외에 역사 기술의 시대적 범위를 기준으로 분류하는 방식도 있는데 통사(通史)와 단대사(斷代史)이다.
 통사는 여러 조대의 역사를 한꺼번에 기술(《史記》·《南史》·《北史》 같은 기전체와 《資治通鑒》 같은 편년체)하는 것을 말하고, 한 조대의 역사만 기술(《漢書》 이하 기전체 사서와 《朝鮮王朝實錄》 같은 편년체 사서)하는 것을 말한다.
 
  《사기(史記)》란?
 사기는 원래는 역사(歷史: history)라는 뜻을 가진 일반명사로 쓰였다. 춘추시대 중국 각국에는 나라마다 역사를 지칭하는 말이 있었다. 그대로 한 시대를 가리키는 말이 된 춘추(春秋)는 원래 노(魯)나라의 역사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오월춘추》나 《여씨춘추》 같은 다른 역사물에도 자연스럽게 붙였다. 이외에 진(晉)나라는 승(乘), 초(楚)나라는 도올이라고 하였다. 사마천이 지은 《사기》는 원래 《태사공서(太史公書)》라 불렸다.
 문학과 역사, 천문, 역법을 관장한 태사령(太史令: 사마천은 부친을 太史公이라 높여 부름) 사마담(司馬談)은 상당수의 초고를 거의 완성 후 무제의 태산 봉선 때 제외되자 울화증으로 사망하면서 아들인 사마천(司馬遷)에게 유업을 완성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현재의 《사기》를 가지고는 사마담과 사마천의 원고를 구분할 수가 없다.
 사마천은 자비를 들여 중국 일주 여행을 2번 시행했다. 이외에도 공적 임무 등으로 파견된 것 등을 합치면 모두 6차례 정도로 추정된다. 이는 나중에 그가 《사기》를 집필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으며, 《사기》의 곳곳에 그가 현지 답사를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때 돌발적인 변수가 발생하는데 바로 이릉(李陵: 李廣의 손자로 자는 少卿)의 화이다. 사마천은 흉노와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항복한 이릉을 변호한 죄로 사형이 언도되었는데 보석금을 마련할 수가 없어서 궁형(宮刑)의 치욕을 무릅쓰고 살아남게 된다. 사마천은 이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만회하기 위하여 그동안 미뤄오던 《사기》의 집필에 필생의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요컨대 《사기》는 개인적 관점에서 여러 조대의 역사를 조망한 사찬의 기전체 통사이다. 크게 보아 기전체도 열전의 범주에 들고, 한나라 이래 군국제의 실시로 인하여 이성 제후가 없어짐에 따라 〈세가〉도 없어졌다. 기전체는 크게 본기와 열전만 있어도 되는데 실제적으로 전사사(前四史)에 드는 범엽(范曄)의 《후한서》는 본기와 열전만 있었다. 현재의 지와 표는 후인이 보충해 넣은 것이다.
 따라서 자연히 사마천의 《사기》에는 개인적인 사관이 많이 들어가 있다. 이는 세가에 들어가야 할 항우(項羽)의 전기를 본기에, 열전에 들어가야 할 공자와 진섭(陳涉, 곧 陳勝)의 전기를 세가에, 그리고 세가에 들어가야 할 자격이 있는 한신(韓信)을 회음후(淮陰侯)라는 제후로 지칭하면서 열전에 넣은 것 등에서 확인된다. 이 같은 관점은 1자(字)를 가지고 미언대의(微言大義)를 나타낸 공자의 춘추필법(春秋筆法)의 정신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각종 난관을 거쳐 어렵게 완성한 《사기》는 한무제의 정책에 대한 비판적 내용이 많아 자칫 전하여지지 못할 뻔도 했으나 외손자인 양운(楊의 노력에 의하여 전승되어 지금까지 이렇게 전하여지고 있다.
 《사기》는 본기(本紀) 12편, 열전 70편, 세가 30편, 표 10편, 서 8편 등 모두 130편으로 이루어졌다. 본기는 제왕의 전기와 연표이다. 왕위에 즉위하기 전까지는 열전의 형식을 띠는데 즉위 후에는 편년체로 기술된다. 열전(列傳) 인물들의 전기를 다루었다. 세가(世家)는 제후국과 제후에 봉하여진 인물들의 전기이다. 표(表)는 연표인데 우리가 고대의 연도를 알 수 있는 것도 전부다 이 표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서(書)는 지(志)라고도 하는데 각종 제도에 관한 기록이다.

 

  《사기·열전》의 특징
 열전은 한 사람의 전기만 서술한 단독 전기가 있고, 비슷한 유형의 인물들을 한꺼번에 묶은 합전 형태(屈原賈生, 仲尼弟子, 刺客, 游俠, 滑稽)가 있다. 이외에도 관련 열전에 슬쩍 끼워 넣은 형태도 보이는데, 이를테면 〈대원열전(大宛列傳)〉에서 장건(張騫)의 기사를 찾아볼 수 있는 것 같은 경우이다.
 열전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기》는 사전문학(史傳文學)이란 말을 탄생시킬 정도로 표현력이 생생한데, 이는 열전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이는 역사에 흥미를 부여하는 긍정적인 면도 있으나, 좀 더 냉철한 관점으로 살펴보면 사실(史實)로 보기에는 공신력이 떨어지는 구전의 채택이나 작자의 창작으로 보이는 부분도 많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부분은 근거자료가 있고 이를 분석해보면 사마천 당시의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고쳐 썼음을 알 수 있다.
 열전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이라면 단연코 민본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기》이전까지는 역사 기술이 철저히 귀족 통치계급 위주로 행해졌다. 이의 소비 계층도 단연 귀족 통치계급이었다. 대표적인 역사책이 바로 위에서 예를 들었던 노나라의 역사 《춘추》이다. 《사기》의 열전에 이르러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주변 인물들을 역사의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 결과 장한(章邯)이나 범증(范增) 등 일세를 풍미한 상류층이라도 전(傳)에 들어갈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은 과감히 제외했다.
 이를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면 〈자객(刺客)열전〉 같은 것이 있다. 〈자객열전〉은 지금의 관점에서 봐도 이전의 사서에 비해 경악할 정도로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자객열전〉에는 모두 5명의 인물을 합전으로 다루고 있는데 제환공을 협박하여 빼앗긴 땅을 되찾아온 조말(曹沫), 합려의 쿠데타 때 오왕 료(僚)를 암살한 전제(專諸), 청부 살인을 감행한 섭정政), 상전의 복수를 다짐하고 실행한 예양(豫讓), 진시황 암살 미수범 형가(荊軻) 등 평민이지만 역사적으로 귀감이 될 만한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 이외에 〈유협(游俠)열전〉에서는 주가(朱家)와 곽해(郭解) 등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고 의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들 다루고 있다. 〈골계(滑稽)열전〉에서는 순우곤(淳于 우맹(優孟) 등 유머를 발휘하여 왕의 정책 결정에 영향을 끼친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 한편 기존의 역사에서는 전아하지 못하다고 하여 언급을 회피한 경제적으로 성공한 인물 등을 다룬 〈화식(貨殖)열전〉을 넣었다. 이는 〈평준서(平準書)〉와 함께 《사기》의 가장 두드러지고 빛나는 서술 중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일찌감치 경제관에 입각한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매우 진보적인 시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눈 여겨 보아야 할 서술 방법은 호견법(互見法)의 활용이다. 넓게 보아 제왕의 전기인 본기를 포함 본전에서는 가급적이면 본인에 대한 긍정적인 사실을 기술하고, 같은 사건도 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여 안배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예를 들면 유방 같은 경우 본전에는 한나라를 건국한 위인의 풍모를 부각하고 항우와 한신 등의 열전(본기)에도 유방의 언급이 나오는데 냉혹하고 잔인한 면 등이 보인다. 이에 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전체를 다 보아야 비로소 알 수 있는 형식을 띠고 있는데 이를 호견법이라 하며 사마천은 이를 매우 효과적으로 잘 사용하였다.
 이를 종합적으로 평가하면 프랑스의 작곡가 조르주 비제가 그의 걸작 《카르멘》을 발표했을 당시의 충격에 비견할 수 있을 것 같다. 비제의 《카르멘》은 지금은 세계 전역에서 단 하루도 공연되지 않는 날이 없다고 하는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발표 당시의 상황을 보면 오페라는 즐기는 사람도 상류층 인사들이었지만 다루는 내용도 상류층의 정서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고상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살인과 탈영, 마약, 매춘 등이 난무하는 집시와 하급 군인을 다룬 내용의 가극은 발표와 동시에 혹평을 받았고 이로 인하여 심한 실망과 스트레스로 인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비제는 결국 성공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 《사기》의 사정도 이와 흡사하다. 《춘추》 같은 귀족들의 정치(전쟁)만 다룬 귀족들만 보는 역사에 서민 중심의 역사를 발표한 것이다. 이에 《사기》는 끝내 빛을 보지 못할지도 모를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지만 지금은 그 가치를 부정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박세후 박사(경북대 퇴계연구소, 『사기열전』의 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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