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란에는 연속기획 <우리 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란 제목으로 의사소통교육센터의 <세계고전강좌>와 공개강좌 <글로벌인문학>, <지역학(익산학)> 강연 원고를 번갈아 싣는다. 국내외 여러 석학들이 함께 참여하는 연속기획을 통해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유의 깊이를 넓혀 가길 바란다. /편집자

윤동주 가족사진(윤동주 사진 오른쪽 위)
윤동주 가족사진(윤동주 사진 오른쪽 위)

  우리에게 많은 시인, 작가, 문인이 있지만 윤동주(尹東柱)만큼 매력적인 인물은 없는 것 같다. 그의 <서시>는 초등학생들도 아는 명편이며, 그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다섯 안에 어김없이 들어간다. 윤동주를 필적하는 시인들이 적지 않지만 우리 마음속 시인은 늘 '윤동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체 그 매력은 뭘까? 무엇이 그를 '시(詩)의 별'처럼 반짝이게 할까?
 윤동주를 생각하면, 그가 1917년 중국 만주 용정에서 태어나 연희전문, 도쿄 릿교대학, 교토 도시샤대학을 다녔다는 것, 일제에 검거되어 1945년 2월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9세로 안타까운 생을 마감했다는 것, 수려한 외모와 과묵한 성격, 차분하고 배려 깊은 인품 등이 떠오른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단 한순간도 시(詩)를 삶에서 떼어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시인이니 당연한 거 아닌가.'라고 생각하면 윤동주와 그의 시대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를 무척이나 좋아한다지만 정작 그의 삶과 시의 무게를 잘 모르는 거다. 삶은 신산했고 시는 그 무엇보다 무거웠다.
 윤동주의 시를 읽으면 편안하고 아름다운 느낌이 가득 찬다. 그래서 윤동주도 행복하게 살았을 거라 생각하기 쉽다. 일제강점기이기는 해도 순적하게 살았을 것 같다. 하지만 아니다. 
 윤동주는 실패의 사나이였다. 
 그는 일찍 문학에 뜻을 두었으나 동갑내기 사촌 형 송몽규(宋夢奎)보다 한 발짝 늦었고 살아생전 단 한 번도 앞지르지 못했다. 송몽규는 193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콩트 <술가락>으로 등단한다. 하지만 윤동주는 그러지 못했다. 그가 시를 쓴다는 것을 안 사람은 주변 친지, 친구 몇 명이 다였다. 그가 시인이 된 것은 죽은 다음이다. 
 송몽규는 그해 4월 중국 낙양군관학교 한인반 2기에 들어간다.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훙커우[虹口] 공원 의거 이후 장개석(蔣介石)과 김구(金九)가 투합하여 만든 무장항일단체에 들어간 이유는 분명하다. 송몽규는 직접 독립운동 최전선에 나선 것이다. 이후 그는 훈련 후 밀파되었다가 일제에 검거되어 옥고를 치르고 풀려난다. 그동안 윤동주는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공부를 했다. 하지만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민족 사학인 숭실중학 편입시험에 친구 문익환(文益煥)은 4학년으로 합격하지만 그는 떨어져 3학년이 되었다. 윤동주 마음은 어떠했을까? 가장 친한 송몽규와 문익환을 볼 때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연희전문을 거쳐 일본에 유학 갈 때도 그는 또 고배를 마셨다. 일본 교토제국대학에 시험 쳤지만 떨어졌다. 물론 송몽규는 합격했다. 결국 그는 도쿄의 릿교대학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이 일본행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공부를 위해 큰 결심을 한 거였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일본으로 건너가는 도항증이 나오지 않는 때였다. 그는 '히라누마 도쥬'라고 창씨개명을 하면서까지 공부하려 했던 것인데 그리 되었던 것이다. 인생은 쉽지 않았다. 
 그는 늘 나지막이 "인생은 대기만성(大器晩成)이지…."를 곱씹었다. 그 당혹감과 좌절을 달래려는 안쓰러움 묻어나는 독백이었다. 
 윤동주 인생에 궁금한 점은 이것이다. 대체 그는 왜 공부하고자 했을까? 지금과 달리 중학교만 나와도 대단한 때였다. 연희전문까지 나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지식인으로 살 수 있는 때였다. 연희전문 동기인 강처중(姜處重)은 경향신문 기자를 했고 후배 정병욱(鄭炳昱)은 이후 훌륭한 국문학자가 되지 않았던가. 대체 그에게 공부란 무엇이었을까? 그의 집은 부유했고 지역 유지였다. 편안히 고향에 있었다면 창씨개명을 할 필요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요절한 것도 일본으로 건너갔기 때문이다. 그는 왜 공부하려 했을까? 
 답은 시를 쓰고자 했기 때문이다. 너무 싱거우신가? 헛헛한 답이라 여겨지신다면 윤동주 시의 무게를 모르는 것이다. 
 윤동주는 시인이었고 시인이고자 했다. 그는 죽는 날까지 시를 썼다. 시인으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썼다. 그에게 '시(詩)'는 단순한 그냥 시가 아니었으니까.
 일제강점기 여느 시인들과 달리, 윤동주는 빼어난 시를 우리 고유의 평상어로 그려냈다. 몇몇 음운만 바꾸면 지금도 그의 감정과 느낌을 고스란히 이해할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 감정과 언어를 잘 구사했다고 인정받는 백석(白石)만 해도, 그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정황, 사투리, 지금은 쓰지 않는 고유어 등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윤동주 시에는 그런 장벽이 없다. 각주를 읽고 이해해야 감상이 가능한 백석과 달리, 쓰인 그대로 스며들 수 있는 윤동주 시는 다른 경지다. 그는 왜 이토록 노력했을까?
 당시에 백석과 윤동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처지다. 백석은 이미 대단한 시인이었고, 윤동주도 배우고자 했던 훌륭한 시인이었다. 하지만 윤동주는 시집조차 내지 못했다. 광복 후 강처중, 정병욱 등의 지인들과 경향신문 주필이던 정지용(鄭芝溶)의 노력으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유고시집이 나왔기에, 우리가 그를 시인으로 알게 된 것이다. 살아생전 누구도 그를 시인으로 알지 못했다. 그의 시를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연희전문 졸업 기념으로 내려던 시집이 좌절된 후 윤동주가 보여준 고뇌의 깊이는 그래서 함부로 가늠할 수 없다.
 윤동주는 죽는 날까지 시 쓰기를 멈추지 않았는데, 이토록 시 쓰기에 온 정열을 불태운 이유는 무엇일까? 한 번도 거스르지 않던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면서까지 연희전문 '문과'에 진학한 것도, 창씨개명의 부끄럼을 무릅쓰고 일본에 건너가 학업을 지속한 것도, 모두 시를 쓰겠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간단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윤동주가 태어난 곳은 만주 용정이다. 중국 땅이었고 자연스레 중국 친구들도 있었고, 당연히 그도 중국어를 할 줄 알았다. 시대는 일제가 동아시아를 점령하고 맹위를 떨치던 때였다. 일본어는 국제어이자 생활에 기초가 되는 중요한 언어였다. 반면 우리 언어는…. 그랬다. 우리 언어는 사라지고 없는 나라의 언어였다. 식민지 민족의 언어였다. 집안에서만 동네에서만 쓰는 그런 언어였다.
 당신이라면 어떤 언어를 익히겠는가? 무엇이 더 합리적인 선택이라 생각하시는가? 어느 언어 능력을 키우는 것이 당신 앞날에 더 이롭고 빛날 거란 생각이 드시는가?
 굳이 답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유광수 교수

 

 윤동주는 디아스포라(Diaspora) 지식인이었다. 
 그가 조선이 아닌 중국 연변으로 이주한 가문에서 태어났기 때문만이 아니다. 중국에서 성장하고 청년기를 조선에서 보내고 안타까운 말년을 일본에서 마쳤기에 디아스포라인 것도 아니다. 그가 어디서 태어나고 어디서 성장했든 그가 처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은 식민지 조선이고 그것은 곧 디아스포라적 삶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이 조선이 아니고 조국이 조국이 아닌 현실에 맞닥뜨렸던 그 고민과 갈등은 지금 우리가 단순히 짐작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 
 모국어를 하지 못하게 하는 상황에서 시인(詩人)이고자 했던 젊은 청년의 고뇌는, 일본 유학시절 쓴 <쉽게 씌여진 시>에서 노래한 것처럼, 그야말로 "슬픈 천명"일 수밖에 없었다. 윤동주는 식민지 조선에서 아름답고 맑은 시를 지을 수밖에 없고, 지어야만 하는 존재론적이고 본질적인 모순 상황 속에서 갈등했던 영혼이었다. 이름만으로 남아 있는 조국은 한반도 땅을 밟는다고 되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일본으로 건너간다고 해결될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그는 디아스포라적 방황과 고민 속에 스스로를 던졌다. 그렇게 해결을 모색했다. 
 윤동주는 세상사람 모두가 아는 큰 길로 가지 않고 좁은 길을 선택했다. 언어로 할 수 있는 정수인 시(詩)를 쓰고자 했다. 우리 언어로 시를 쓴다는 것은 그에게는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이며 우리 민족을 찾는 방법이었다. 그가 그토록 평이한 일상어로 시를 쓰려고 애쓴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에게 있어 '시 쓰기'는 '민족운동'이었고 자기 전부를 쏟아 부은 '삶'이었다. 그는 시를 통해 조국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부끄러웠다. 스스로를 돌아보니 그랬다.  
 민족 모두가 힘겹게 살 수 밖에 없었던 일제강점기에 유복한 집에서 태어나 학업을 지속한 것이 부끄러웠다. 민족운동에 직접 투신하는 자들도 있고 꽃처럼 산화해 스러지는 자들도 있는데, 자신은 창씨개명까지 해가며 먼 이국땅에 공부하러 건너와 있는 것이 부끄러웠다. 일본인 교수 강의를 들으러 가는 것도, 잠 못 드는 밤 다다미방에서 시를 쓰고 있는 것도, 모두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는 부끄러워할 줄 아는 진정한 영혼이었다. 
 뻔뻔하게 사는 자들이 더 많고 자신까지 속이는 파렴치한이 대부분인 시대에 윤동주는 스스로를 부끄러워할 줄 알았다. 그런 그였기에, 그렇게 파르르 떨리는 감정으로 고뇌와 번민을 고스란히 담아낼 수밖에 없던 그였기에, 그의 시는 별처럼 반짝이게 되었다. 
 윤동주는 시를 썼다. 시는 인생이고 민족이며 조국이었다. 끝 모를 부끄러움에 고뇌하면서도 그는 시를 썼다. 자기 길을 걸었다. 혹시 있을지 모를 오해는 오해대로 괴로움은 괴로움대로 모두 끌어안고 묵묵히 자신의 가야할 길을 걸어갔다. 
 그렇게 그는 시(詩)의 별이 되었다. 
 우리 맘속에 영원히 반짝이는 별이 되었다.

유광수 교수(연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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