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키 180센치의 거구가 당시 과수원이던 지금의 원광대 공대 자리에 굴을 파고 숨어 있었다. 익산까지 내려온 인민군에게 발각되면 납치되거나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이제 막 문을 연 유일학림(唯一學林)을 지키기 위해 그는 신용벌에 남았다. 그의 이름은 박길진(1915-1986), 법호(號)는 숭산(崇山).
 단지 학교를 지키기 위함만이 아니었다. 세상의 아픔을 치유하는 일에 헌신하여 모두가 참으로 행복한 세상을 만들자는 유일학림의 설립정신을 실현하기 위함이었다. 숭산이 전쟁 속에서 목숨을 걸고 지켜낸 유일학림은 1951년 초급대학에서 1953년 4년제 정규대학으로, 그리고 1971년 종합대학으로 승격된다. 그 이름이 바로 원광대학교(圓光大學校)이다. 
 숭산. '높은 산' 또는 '위대한 산'이라는 뜻이다. 유일학림을 시작으로 원광대 초대총장으로서 원광의 초창기 40년 역사를 이끌어 온 숭산.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5년이 되는 지금, 높고 위대했던 그의 삶을 회고해 보고자 한다. 그는 어떤 인물이며, 그의 삶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숭산기념관 동상 학생회관 앞
숭산기념관 동상 학생회관 앞

  기적의 역사를 만든 불굴의 개척자

 "대학을 제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서 동분서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완벽이란 있을 수 없었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우리의 일이었으므로 더욱 숨 가쁜 생활이었다."
 
 숭산은 원불교의 교조인 소태산 박중빈(1891-1943) 대종사의 큰 아들이다. 소태산은 일제강점기 동안 수차례 학교설립을 시도했지만 총독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그의 아들 숭산에게 교육기관 설립의 임무를 맡기고 1943년 열반했다.
 부친의 갑작스런 열반과 일본 제국주의의 야욕이 극에 달하는 암담한 상황에서도 숭산은 희망을 잃지 않고 학교설립을 준비했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해방을 맞이했다. 당시 원불교는 서울·부산·전주·익산 등지에서 전재동포를 대상으로 한 대대적인 구호사업을 시작했고, 숭산도 길거리에 나가 이들을 도우며 조국의 온전한 재건과 민중들의 각성을 위해서 무엇보다 교육이 선행되어야 함을 절감했다.
 1946년 5월 1일. 드디어 원불교 교단의 최초 교육기관인 유일학림이 설립되었다. 숭산은 학감을 맡아 모든 실무를 총괄했다. 교단은 수익활동을 위해 양잠(養蠶)을 하던 공회당(公會堂)을 학림의 교육공간으로 내 주었고, '우리는 굶어도 학교는 운영한다'는 원불교 구성원들의 비장한 각오와 합력은 유일학림의 중등부를 원광중·고 및 원광여중·고로, 전문부를 원광대학으로 발전시키는 기반이었다.
 숭산과 교직원들, 학생들은 한 마음이 되어 손수 벽돌을 날라 강의실을 지으며 허허벌판이던 신룡벌을 하나씩 채워 나갔다. 6·25전쟁의 와중에도 대학설립의 노력을 쉬지 않았던 숭산은 1951년 '대학설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동년 9월 5일 설립인가를 받아 원광초급대학을 설립했다. 그는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4년제 대학 설립을 위해 또 다시 준비했다. 그리고 1953년 1월 29일 문교부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아 원광대학으로 개편되었다. 숭산은 학장을 맡아 본격적인 학교경영을 시작했다.
 
 "초반기의 온갖 시련을 극복하면서 도약의 발판을 굳혔고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성장을 보게 되었다. 하나의 새로운 기구가 마련될 때마다 어려움과 말 못할 고충이 있었지만 묘하게 되는 것이었다." 
 
 숭산이 원광대를 운영했던 40년은 한국역사의 대 격동기였다. 8·15광복 이후의 어수선한 정국, 얼마 지나지 않은 6·25전쟁, 군사정권의 등장과 산업화, 민주화 운동 등 시대는 급변해갔다. 이 과정에서 학교운영의 말 못할 고충과 위기가 수없이 찾아왔다. 
 특히 대학의 무분별한 설립으로 인한 군사정권의 대학 정비령에 따라 1961년 학림으로 강등되는 시련을 겪는다. 이제 막 대학의 틀을 잡아가던 시기에 맞은 위기였다. 하지만 숭산은 강한 리더쉽을 발휘해 위기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갔다. 시대적 요구에 맞춰 학과를 재편하고 교원을 보강하며, 학교시설을 정비하고 사회봉사활동을 강화하는 등 질적 양적 도약을 준비했다. 
 이에 원광대는 1964년 대학 재인가를 받고, 1972년에는 종합대학으로 승격했으며, 1984년 원광의료원을 개원한다. 또한 숭산은 대학의 내실을 다지기 위해 원불교사상연구원, 기초과학연구소, 한국학연구소 등을 설립하여 대학의 연구기능을 강화하였고, 해외 교육계와 종교계를 순방하며 국제교류에 앞장섰다.
 이소성대(以小成大). 큰 포부와 비전을 갖되, 그것을 지금 이 곳에서 작은 것부터 하나하나씩 이루어간다는 말이다. 원광의 오늘은 큰 희망을 품고 불굴의 의지와 정성으로 일관한 숭산의 노력과 그를 중심으로 하나로 뭉친 원광인들의 헌신이 만든 개척의 역사요 기적의 역사였다. 

 

  인간을 진실로 사랑한 참다운 교육자

 "저는 대학의 사명을 훌륭한 기능인의 양성보다는 훌륭한 인간성 소유자의 양성에 두고 있습니다. 인간은 모든 가능성의 원천이며, 모든 일이 성실한 인간성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숭산은 지성(知性)만을 중시하여 기능인 양성에 치중하는 대학교육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인간의 진정한 가능성은 지성과 덕성(德性)이 겸비하고 도덕(道德)과 정의(正義)를 실천하는데서 온다고 그는 믿었다. 냉엄한 이성적 판단의 머리와 뜨거운 가슴으로 나 혼자만 잘 살려는 이기적 삶에서 벗어나 이타적 삶을 사는 것이 인생의 진정한 가치요 행복이라는 것이다. 
 전공분야와 사회전반에 대한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지성, 그리고 내 가까운 인연부터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베풀고 나누는 덕성, 그 덕성이 모든 생명으로 확장해 가며 지성과 조화를 이룰 때 한 사람의 인격은 원만해진다. 또한 지성과 덕성을 겸비한 원만한 인격으로 각자가 속한 공동체에서 도덕과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이 미래사회의 지도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숭산은 믿었다.
 이러한 숭산의 철학은 오늘날 원광대학의 교훈인 '지덕겸수(知德兼修) 도의실천(道義實踐)'으로 정리되었다. 또한 도의실천인증제, 글로벌 인문학, 후마니타스 장학사업, 각종봉사활동 등의 교육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필자가 현재 강의하는 교양과목인 '종교와 원불교', '선과 인격수련'도 숭산의 이러한 교육철학에 기반해 만들어진 원광대학교만의 교육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

   "참다운 교육자의 인간상이란 인간을 진실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을 사랑하되 참다운 정열을 쏟아서 사랑할 줄 아는 인간 교육자이어야 합니다."

 숭산은 참다운 교육자란 인간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나는 숭산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각종 저술과 연설문·자료를 통해 그를 간접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만난 숭산은, 인간을 진실로 사랑한 참다운 교육자였다. 나는 그가 우리 대학의 인재상을 '지덕겸수 도의실천'으로 삼을 수 있었던 원동력도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실천의 체험에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스스로가 체험하고 실천해 보았기에 숭산의 철학은 단순한 구호가 아닌 우리 대학의 교육이념이 될 수 있었다.
 숭산은 온갖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학교경영의 중심에서 40년을 지도자로 일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교직원과 학생들 한명 한명을 사랑하고 존중해 주었다. 부모의 마음으로 모든 구성원들을 품어주는 교육자로서의 진정성이 통했기에 그를 중심으로 원광인들은 하나로 모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청렴 소박했다. 숭산기념관 1층 '숭산박길진기념관'에 가면 그가 해외순방이나 출장 때 가지고 다녔다는 그 낡은 여행가방부터, 집안에서 부인으로부터 머리 손질을 받았다는 이발기구가 전시되어 있다. 유품 하나하나에서 그의 인품을 느낄 수 있었다.
 교육자로서의 숭산의 무대는 원광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한국사회 전반으로 펼쳐져 있었다. 한국 대학교육의 일대 전환기라 할 수 있는 1980년대, 대학교육의 자율성·다양성·내실화를 목적으로 정부와 대학사회의 가교 역할을 위해 설립된 한국대학교육협의회의 초대회장에 숭산이 임명된 것이다. 숭산은 1982년부터 2년간 대교협 회장직을 수행하며 한국대학교육 전반의 문제를 고민하고, 다양한 교육정책을 제도화 하는데 노력했다. 또한 독립기념관 건립준비위원(1982), 한국종교인연합회장(1985) 등 한국사회의 교육과 종교분야를 넘나드는 큰 어른의 역할을 했다. 
 

  원광인 가슴에 숭산의 큰 꿈 살아나기를
 어떤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원광의 역사를 만든 숭산처럼, 우리도 전 세계를 내 무대로 삼아 큰 꿈을 꾸고 미래를 현실로 만들어가는 원광인이 되면 좋겠다. 학력인구감소, 지방소멸시대 등 우리 대학을 둘러싼 환경이 긍정적이지 않은 오늘이다. 우리 학생들도 불확실한 미래를 준비하기도 바쁜데, 코로나는 우리들 일상을 더 지치게 한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상황일수록, 우리 학생들이, 우리 학교가 숭산의 삶과 정신을 되새겨 볼 때라고 생각한다. 
 나는 가끔 산책길에 공대 주변을 돌 때면, 1950년 6·25 당시 땅굴 속에서 숨죽이고 있었을 숭산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전쟁의 절박한 상황 속에서 두려움과 고통이 없지 않았겠지만, 적어도 그의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행복하고 보람과 희망이 있었을 것이다. 숭산이 남겨준 원광의 DNA를 우리 모두가 가슴 깊이 장착하고, 세계를 향해 미래를 향해 원광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주인공들이 되기를 기원해 본다.

과거 원광대학 총장 집무실에서

허석 교무(원불교학과)

저작권자 © 원광대학교 신문방송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