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과 영남의 양남(兩南)지역에서는   1970년대 이후부터 지역갈등이 존재하고 있다. 지금은 전 세대보다 지역감정이 덜 두드러지는 듯 하지만 인터넷상에서 여러 가지 지역감정이 담긴 글들을 찾아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지역감정을 극복하고 화합을 모색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보이고 있는데 대구와 광주 두 도시가 여러 산업에 전략적으로 제휴를 연달아 맺고 있는 일명 '달빛동맹'이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또 코로나 사태가 터지자 두 도시는 서로 힘든 여건 속에서 마스크를 나누는 등의 훈훈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여하튼 이러한 지역감정을 혹자는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가 치열하게 갈등관계에 있었다는 것에 기인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삼국시대에 백제와 신라가 맨날 싸우기만 했을까?
 고구려, 백제, 신라는 수도에 능원을 갖추고 있다. 익산의 오금산자락에 위치한 익산 쌍릉은 2017년부터 2018년까지   2년에 걸쳐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는데 백제의 무왕이 잠들었다고 알려진 대왕릉과 대왕릉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선화공주의 무덤으로 알려진 소왕릉이 위치하고 있다. 대왕릉은 높이 3.8m, 지름 28m의 봉토의 큰 규모를 보여주며 백제 왕릉 중에서는 가장 큰 규모에 해당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익산 쌍릉은 도굴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조선 침략의 명분을 찾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고적조사사업에서 전국에 산재한 왕릉급 무덤을 모조리 파헤치기 시작한다. 여기에 익산 쌍릉도 포함된 것이다. 
 익산 쌍릉을 발굴한 사람은 일선동조론을 주창했던 대표적인 관학자 야쓰이 세이치로이다. 그는 1917년 부여 능산리 고분을 파헤친 뒤 바로 익산의 쌍릉을 파헤쳐 그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사진으로 남기고 백제 말기의 능묘라는 짤막한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그렇게 100년의 시간이 흘렀고 2017년 드디어 대왕릉의 발굴이 시작된 것이다. 발굴 당시 석실 노출과정에서 일제의 만행을 살펴볼 수 있는데 단지 석실의 문을 찾아 그 안에 유물을 꺼내기 위한 도굴 수준의 발굴 조사를 했던 것이다. 대왕릉에 있었던 목관과 유물은 이미 일제강점기에 외부에 유출되었지만 시상대에 나무상자를 발견하게 된다. 나무상자 안에는 인골이 들어있었다. 한 사람의 인골로 추정되는 100여개의 뼛조각이 발견된 것이다. 

대왕릉에서 발견된 뼛조각

 과학적인 분석결과 60~70대 남성에 620년에서 659년 사이에 사망했으며, 키는   161~170cm의 당시로 보면 굉장히 건장한 체격을 한 사람이었다. 특히 백제 30대 무왕의 사망시기와 겹쳐 이 무덤의 주인공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이는 곧 익산 쌍릉 발굴을 통해 익산에도 왕의 능원이 있었음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무왕은 "풍채가 훌륭하고 뜻과 기상이 호방하고 걸출하다."라는 기록이 이러한 내용을 뒷받침 한다. 일제가 대왕릉에서 발굴한 목관은 외부로 유출되어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옮겨졌다가 한국전쟁 때는 부산으로 피난살이를 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였다. 최근 개관한 국립익산박물관에서 이 목관을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목관은 일본산 최고급 목재로 제작되었으며, 청동에 금으로 도금된 관못 등으로 장식하여 백제 왕실의 기품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이곳에 잠들었던 무왕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한 나라의 창업주는 말 그대로 고조, 태조라고 부르고 그 국가의 기틀을 다진 사람은 태종이라고 칭하는데 백제에도 그에 걸맞는 시호법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성왕, 위덕왕 등으로 연결되는 혜왕, 법왕은 모두 불교적인 시호이다. 즉, 왕이 부처님과 연결된다는 관점인 것이다. 불교에서 중요한 보살이나 부처의 근접하는 명호들을 차용해서 주로 사용했다. 당시 백제인들은 무왕을 백제를 가장 강력한 군사력 내지 핵심적인 무력으로 국가를 튼튼하게 만든 왕으로 부르고 싶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소왕릉

 그리고 7세기를 전후한 시점이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부처님의 가호를 받아 국가를 보호하고자 하는 호국불교가 유행하는데 신라에서는 그 맥락에서 불국사가 만들어지고 무왕이 익산에 이러한 불국토를 만들고자 했는데 그것이 바로 미륵사인 것이다. 미륵세계의 불국토인 미래의 새 천지, 새로운 세계를 익산에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이상현(역사문화학부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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