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 : 뉴스웰

  <학술>란에는 연속기획 <우리 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란 제목으로 의사소통교육센터의 <세계고전강좌>와 공개강좌 <글로벌인문학>, <지역학(익산학)> 강연 원고를 번갈아 싣는다. 국내외 여러 석학들이 함께 참여하는 연속기획을 통해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유의 깊이를 넓혀 가길 바란다. /편집자

 상위 0.1% 2만 2천 명이 하위 27%인 629만 5천 명만큼 소득을 얻는다면? 상위 5%가 전체 자산의 50%를 넘게 가지고 있는 반면 하위 50%가 1.7%를 소유하고 있다면? 다른 곳이 아닌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첫 번째 통계는 2013년 동국대학교 김낙년 교수의 연구결과이고, 두 번째는 2018년 우리나라 국회에서 보고된 자료다. 소득과 자산 분배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음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근거들이다.
 이런 소득과 자산 분배의 양극화는 1980년대 이후 전 세계가 경험하고 있는 공통된 현상이다. 지금까지 많은 연구들이 이런 양극화의 주범으로 '신자유주의의 지배'를 꼽아왔다. 신자유주의라는 말이 이제 너무 진부하게 들린다면 '지구적 시장의 지배'라고 불러도 좋다. 그런데 지구적 시장(global market)이란 용어가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세계시장(market)이란 용어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지구적 시장이라는 새로운 용어가 필요해진 것일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양극화의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이 질문에서 시작해보자.

  풍요한 사회가 만든 지구적 시장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John Kenneth Galbraith가 1958년에 발간한 『풍요한 사회The Affluent Society』는 지구적 시장이 왜 필요해졌는지, 그 이유를 유추해볼 수 있는 책이다. 20세기 100대 명저 중 한권으로 꼽히는 이 책에서 갤브레이스는, 서구사회가 20세기 중반에 들어서며 풍요의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풍요의 시대를 만들어낸 몇몇 국가들이 우려하고 있는 것은 더 이상 '결핍'이 아니라 오히려 과잉 생산과 과잉소비라고 지적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서구사회에서 생산되는 상품의 양이 자체의 과잉소비로도 해결될 수 없다는데 있었다. 지나치게 많이 생산해 낸 상품을 내다 팔기 위해서는 당연히 국내시장보다 훨씬 넓은 시장이 필요했다.
 이런 측면에서 2차 대전 이후 만들어진 민족국가가 중심적 역할을 하는 세계시장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이 체제는 민족국가가 자급자족적으로 존재하며, 국내차원의 자원분배를 위한 원칙을 국가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작동했다. 민족국가를 자급자족과 자율적 결정의 단위로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 세계 시장에서 유일하게 의미를 갖는 행위자는 민족국가뿐이었다. 시장이 넓어지기 위해서는 자급자족적 전제는 상호의존적으로 바뀌어야만 했고, 국가 외에도 경제를 운영하는 원칙을 결정하는 주체가 더 있어야만 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world'를 대체한 'global'이란 용어가 1960년경에 사람들 사이에 쓰이기 시작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세계가 상호의존적이 되는 과정이란 뜻을 담은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 앞으로 '지구화'라 쓴다)이란 용어가 처음 등장한 건 1959년이었고 1961년에야 사전에 수록되었다. 관련해서 세계가 상호의존적이 될 때 생겨나는 사회적 조건을 의미하는 'globality,' 우리말로 '지구성' 정도로 번역되는 이 용어는 1980년대에 들어와서야 쓰이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지구화'가 신자유주의의 바람을 타고 비서구사회로 확산되던 시기였다. 
 이 글로벌 시장에는 민족국가 외에도 중요한 두 행위자가 있다. 새롭게 등장한 첫 번째 행위자는 국제기구다. 세계무역기구,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은 이 새로운 질서의 관리자 노릇을 하고 있다. 국경을 넘어 적용될 수 있는 무역 및 금융 규칙들을 정해 실행에 옮기고 이를 위반하는 국가들을 규제하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무역에선 동일 수입 품목에 대한 동일 과세 부여, 회원국 간 관세 차별 금지, 국내 상품과 수입 상품 간의 차별 금지 같은 규정들이 세계무역기구를 통해 규제되고, 금융 부분에 있어선 노동시장 유연화, 긴축 재정 유지, 공공부문에 대한 지출 제한 등과 같은 조치들이 돈을 대출해 간 국가에서 실행되며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이 이를 감독한다. 
 두 번째 행위자는 '초국적 기업'이다. 초국적 기업은 한때 '다국적 기업'이라 불렸는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몇 개의 국적을 지닌 기업이니 이때만 해도 여전히 자본에 국적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은 '초국적 기업' 혹은 '지구적 기업'이라 불린다. '초국적'이란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지구화 시대의 자본은 과거에 달고 있던 국적이라는 꼬리표를 완전히 떼버리고 국경을 넘나들며 활동하고 있다. 이 초국적 기업은 어지간한 국가의 국내총생산보다 많은 한해 매출을 올리며, 때로는 국가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을 지구적 시장에서 행사하고 있다.  

  지구적 연결 가능, 디지털 기술 발전

  이런 지구적 시장이라는 욕망이 실현가능하게 만든 가장 중요한 요소가 기술의 발전이라는 사실은 주지의 사실이다. 디지털 기술이 국경을 허무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디지털 기술의 엄청난 발전은 지구를 하나로 만들어 놓았다. 지구를 거미줄처럼 이어 놓은 디지털 네트워크는 지구적 시장에서 대세가 된 지구적 금융자본을 가능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컴퓨터가 손바닥 안에 들어온 스마트폰의 탄생은 플랫폼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자본주의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처럼 새로운 기술이 만들어 낸 혜택이 세상을 바꾸어 놓고 있는 지금, 우리가 주목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바로 이 새로운 기술이 소득 및 자산 양극화를 만들어내는 주범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디지털 기술이 이런 양극화를 만들어내는 것일까? 그 주된 이유는 디지털 기술이 보여 왔던 발전의 성향과 기술의 속성에 있다. 
 우선 디지털 기술은 발전 속도가 너무 빠르다. 예를 들어 디지털 기술은 컴퓨터 연산능력의 폭발적 성장과 함께 발전해 왔다. 이와 함께 인공지능을 비롯한 다양한 기술들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소위 '무어의 법칙'은 이런 폭발적 성장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1965년 인텔의 공동창업자 중 한 사람인 고든 무어는 『일렉트로닉스Electronics』에 동일한 비용을 전제로 할 때 집적 회로의 연산 능력이 '연간 약 2배의 속도로 증가'해 왔음을 밝히며 앞으로 10년 동안은 이런 예측이 유효할 것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그런데 이런 예측은 50년간 유효했다. 50년이면 같은 가격에 1000만 배 이상 컴퓨터의 성능이 좋아질 수 있다. 이렇게 기술의 발전 속도가 빠를 때 이를 따라잡을 수 있는 사람들의 숫자는 자연스레 줄어들기 마련이다. 기술의 발전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소수만이 그 기술을 따라잡을 수 있고, 그 혜택도 그 소수에게 돌아간다.
 두 번째는 디지털 기술에 내재해 있는 네트워크 효과의 문제다. 네트워크가 촘촘하고 넓을수록 위력을 발휘하는 디지털 기술은, 다시 말해 이용자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이용이 편리해지고 혜택도 많아지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카카오톡은 우리나라 메신저 시장의 95%를 차지하고 있다. 사실상의 독점이라 보아도 좋은 수치다. 이 메신저 하나를 설치하면 메신저를 보유한 사람들 95% 이상과 소통할 수 있게 된다. 또 하나의 예로 네이버는 우리나라 검색시장의 75%를 차지하고 있다. 지구적 차원에서는 구글과 페이스북이 검색시장과 소셜네트워크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갖고 있다. 이런 사례에서 알 수 있듯 디지털 분야는 네트워크 효과 때문에 전형적인 '승자독식' 시장이다. 많은 사람들이 모아주는 정보는 '독점'을 만들어 내고, 소비자의 기호를 더 잘 파악할 수 있도록 해 계속해서 독점을 유지해 나갈 수 있다. 이런 까닭에 디지털 기술은 시장에 먼저 뛰어들어 네트워크를 독과점적으로 차지한 소수에게 집중적으로 분배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 

  디지털 기술과 오래 살아갈 미래 세대들

  디지털 기술이 지닌 이런 양극화 분배의 속성과 경향을 주의 깊게 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사회적 보호망의 필요성을 실감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필요성과는 반대로, 디지털 기술이 양극화 분배를 할 뿐 아니라 아날로그 기계시대가 지어왔던 노동자들의 위한 보호망을 해체하고 있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1, 2차 산업혁명이 만든 아날로그 기계시대는, 기계파괴운동과 같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인 생산력을 바탕으로 일자리를 늘리고, 점점 더 고임금으로 보상하고, 노동자를 위한 사회보험과 노동3권을 제공하며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보호망을 건설해왔다. 반면 디지털 기계시대는 기술의 폭발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일자리를 늘린다는 증거를 아직 보여주지 못하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임금을 저하시키고, 사회보험과 노동3권을 해체시키고 있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디지털 기술과 결합된 로봇 기술의 발전은 제조업과 같이 전통적으로 일자리를 창출하던 시장에서 일자리를 줄이고 있는 반면, 배달·심부름·청소·택시와 같은 온디맨드 플랫폼에서 일자리를 늘리고 있다. 이런 패턴은 전체적으로 일자리가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 양상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임금을 저하시키고 있다. 더불어 이 온디맨드 플랫폼의 종사자들은 대부분 독립사업자들의 신분, 다시 말해 사장님의 형식으로 플랫폼과 계약을 맺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전통적으로 받아온 보호망인 사회보험과 노동3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양극화 분배에다 사회적 보호망을 해체시키는 디지털 기술과 가장 오래 살아가야할 세대가 바로 우리 청년세대들, 미래 세대들이라는 점이다. 만약 우리가 미래를 위해 새로운 사회보호망을 건설해 놓지 않는다면, 명목실업률보다는 3배 가까이 높고, 25% 안팎의 체감실업률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 청년세대들, 그리고 다음을 이을 미래 세대들의 세계는, 풍요가 넘쳐흐르고 있지만 빈곤의 전망에 불안에 떠는 이들로 넘쳐나는 곳이 될 것이다. 우리는 늘 자기인생은 자기가 책임진다는 자기책임의 윤리를 신앙처럼 받들며 미래세대에게 심어왔지만, 지금의 디지털 기술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결코 그럴 수 없으리란 전망으로 우릴 비웃고 있다. 현실을 직시하고 이제 새로운 분배를 구성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
 

김만권 교수(경희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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