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이란 무엇인가

 

 사전을 찾아보면 모험은 "위험을 무릅쓰고 하는 일"이라고 정의된다. 모험은 어떤 목표를 향해 확고하게 나아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확고하지 않은 목표를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는 일은 좀체로 없기 때문이다. 확고한 목표는 먼저 설정할 수도 있고 외부에서 주어질 수도 있다. 모험은 먼저 나서서 하는 수도 있고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 어느 것이든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목표를 성취하고자 하는 일은 모두 모험이라 불린다. 모험 자체를 즐기기 위한 모험가가 있다고 해도, 그 즐기는 자체가 또한 목표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추구할 만한 확고한 목표란 무엇일까? 개인에 따라 삶의 목표는 저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보편적으로 생각할 때 모든 인간이 추구할 법한, 혹은 추구해야 하는, 목표는 이른바 구원이라 불리는 것이 아닐까. 구원이라는 것을 반드시 종교적인 의미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종교적 의미의 구원이라면 무엇보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서 행복을 누리는 것을 가리킬 테지만, 구원이란 사실 죽음 이전의 세계에서 행복을 누리는 것도 가리킨다. 더욱이 죽음 이후에서 행복을 누리느냐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에게 허용된 권리가 아닌 반면에, 죽음 이전에서 행복을 누리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로 결정하고 추구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다.
 죽음 이후에 행복을 누리는 일의 실체는 사실상 인간이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그저 어림하고 짐작할 뿐이다. 그러나 죽음 이전에 행복을 누리는 일이 무엇인지는 우리가 알고 이해하며 또한 그 정의(定義)를 조절할 수도 있다. 문제는 행복이란 거저 생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가 행복을 가져온다는 대전제는 그런 사회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지 하는 험난한 과제들을 낳는다.
 단테의 순례는 그 자체로 단테에게 하나의 거대한 모험이었다. 힘들고 외롭고 거칠고 험난한 여정이지만, 단테에게는 확고한 목표가 있었다. 그 목표란 천국에 올라서서 인간의 행복의 궁극을 만나는 것과 함께, 또는 그 이전에, 지옥과 연옥에서 인간이 저지른 죄와 그로 인한 고통의 수많은 처절한 양상들을 체험하는 것이었다. 단테는 마침내 내세를 관통하는 그 긴 여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다시 현세로 돌아와 자신의 순례를 기록하고, 그 기록을 읽는 독자들과 함께 반복해서 순례를 다시 떠나며, 그러는 가운데 우리가 살면서 견지해야 할 사항들을 생각하도록 이끈다. 우리가 단테의 순례를 모험이라 부른다면, 그것은 그 순례가 인간의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험난한 길이기 때문이다. 단테는 구원의 종착점보다도 그 과정에 대해 말하고자 했으며, 그 과정은 죽음 이후보다도 죽음 이전에 어떻게 살 것이냐 하는 문제에 관계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단테는 자신의 순례가 구원으로 나아가는 험난한 길이듯이, 우리 인간도 구원으로 나아가는 의지와 도전의 고삐를 늦추지 말 것을 권한다. 구원을 어떤 절대자의 섭리에 수동적으로 맡기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확고한 의지에 따라 추진하는 가운데 자신의 정체성을 세워나가라고 조언한다. 단테는 인간이 험난한 길을 외면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자신의 의지와 조절 아래 두면서 스스로를 발전시켜왔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사실상 인간은 동굴 속에 웅크리지 않고 밖으로 나와 강렬한 햇빛을 쏘이고 거친 바람을 맞으면서 이 세상을 호기심에 찬 눈으로 탐사하고 자신의 이해의 영역 아래 끌어들이는 과정 속에서 진화해오지 않았던가.
 
오디세우스의 모험 : 인간의 표상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모험의 정의에 알맞은 내용을 담고 있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자신의 고향인 이타카로 돌아가기 위해 지중해를 항해하는데, 중간에 온갖 모험들을 겪으면서도 고향으로 귀환하리라는 염원을 결코 저버리지 않는다. 계속해서 길어져서 10년을 지속한 모험의 여정 끝에 마침내 이타카의 자신의 궁전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귀환은 끝나지 않고 계속된다. 수많은 청혼자들이 궁전에서 기식하며 그의 아내 페넬로페를 괴롭히는 상황에서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데 따르는 위험을 즉각 감지하고, 거지로 변장한 채 자신의 위치를 복구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지중해를 가로지르며 겪은 모험이 집 밖에서의 모험이라면, 이제 그는 집 안에서도 모험을 벌여야 하는 것이다. 그의 모험은 성공적으로 끝나고, 그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아내 페넬로페와 행복한 미래를 그린다.
 <오디세이아>의 전반부에서 묘사되는 오디세우스의 모험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그가 인간으로서 추구한 의지와 목표다. 불멸의 칼립소가 영원의 확고한 젊음을 약속하는 유혹을 필멸의 인간이 견뎌야 하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믿음으로 거부하는 오디세우스의 모습을 상상해보자. 영원한 삶을 미련없이 거절하는 오디세우스가 믿는 것은 인간이 자기 의지로 실현해나가는 미래였다. 그 미래는 보장된 것이 아니기에 미래를 성취한다는 희망보다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 자체가 그에게는 중요했다.
 그런데 이와 함께 우리는 단테의 목소리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단테는 [지옥] 26곡에 오디세우스를 등장시키면서,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를 변신시킨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가 오랜 기간의 모험들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자리로 완전하게 안착하는 것과 달리, 단테의 오디세우스는 이타카를 지나서 계속해서 서쪽으로 항해를 한다. 해가 지는 쪽으로 향하는 항해는 세상의 끝인 헤라클레스의 두 기둥(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해서 거친 물결이 넘실대는 대서양으로 나아간다. 선원들이 오랜 세월에 걸친 항해에 지쳤을 때 오디세우스는 단지 아홉 행으로 이루어진 저 유명한 연설을 하는데, 거기에는 인간으로서의 덕과 핏줄을 생각하라는 엄중한 요구가 들어있다. 이렇게 불확실한 모험을 하는 이유는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는 오디세우스의 확신이 선원들을 감동시키고, 그들은 기수를 남쪽으로 돌려 대서양의 넓은 물결을 헤치고 나아간다.
 그러나 단테는 이렇게 인간의 정체성을 세우는 모험을, 호메로스와 달리,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하지 않는다. 오디세우스 일행은 남쪽 끝, 바꿔 말해 남극의 언저리에 도달하지만 그곳에서 배가 침몰하여 모두가 바다에 수장된다. 단테가 그곳에서 그들의 모험을 실패로 끝나게 만든 가장 큰 이유는 그곳이 바로 연옥의 앞바다였다는 점에 있다. 오디세우스 일행이 수많은 모험을 거쳐 최종 목적지로 삼은 곳은 연옥이었던 것이다. 연옥이란 어떤 곳인가? 한 마디로 말해 연옥은 죄를 씻는 곳이다. 이 세상에서 죄를 지었지만 영원한 고통만이 있는 지옥에 떨어지는 대신에 그 죄를 씻을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 땅이다. 그곳에서 죄를 씻고 나면 그 씻는 기간이 아무리 길어도 언젠가는 천국에 오르기로 보장된 땅이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이 이미 죄를 지은 상태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죄의 댓가를 영원한 고통으로 치르는 것 대신에 죄를 씻고 구원으로 나아갈 것을 '스스로' '선택'했던 것이다. 그러한 기획에서는 하느님의 섭리와 은총의 빛은 한 줄기도 비치지 않으며, 대신 인간의 불굴의 의지와 자신감만이 충만하다.
 그러나 의지와 자신감이 지나치면 교만이 된다. 기만에 이어 단테가 오디세우스에게 물은 두 번째의 죄는 바로 교만이다. 스스로의 구원을 스스로 성취할 수 있다는 다분히 근대적인 성격의 오디세우스의 자신감에 결여된 것은 겸손이었다. 사실상 겸손이라는 덕을 의지가 깃들인 자신감과 양립시켰다면, 아마도 오디세우스가 추진한 항해는 애초부터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무모하리만치 스스로의 목표를 믿고 자신의 강한 의지를 그 극한까지 밀어붙이면서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고자 하는 오디세우스의 모험에는 사실상 겸손이라는 덕이 깃들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오디세우스의 모험은 실패로 끝날 운명의 것이었다고 단테는 설정한다. 겸손이 결여된 의지는 교만으로 통하며, 그로 인해 그가 추구했던 모험은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단테의 구상이었다. 말하자면, 단테는 모험의 성공을 위해서는 의지와 함께 겸손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었다. 의지와 겸손은 모험을 해피엔딩으로 이끄는 필수적인 두 개의 바퀴인 것이다.
 흥미롭게도 단테는 내세의 순례 전체에서 의지와 겸손의 두 수레바퀴를 굴리면서 인간의 구원을 향한 나름대로의 모험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나간다. 하지만 단테는 오디세우스의 모험을 찬탄과 질책의 대립되는 두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가 질책하는 것은 겸손의 결여인 한편, 그가 찬탄하는 것은 의지의 충만이다. 단테는 그의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모험의 길에서 계속해서 의지를 키워나가는데, 그런 그에게 오디세우스는 필연적이고 근본적인 계기를 이룬다. 반면 모험의 처음부터 끝까지 단테는 어쩌면 지나칠 정도로 겸손한 모습을 보이는데, 그런 모습 자체는 그가 오디세우스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그래서 단테는, 연옥에 상륙하는데 실패한 오디세우스와 달리, 연옥의 기슭에서 저 멀리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갈대(겸손의 상징)로 허리를 묶은 채 연옥으로 향하는 새로운 모험을 지속시켜나갈 준비를 한다.
 

진화된 인간 혹은 인간의 새로운 진화
   모험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는 오디세우스와 조절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단테 중 어느 쪽이 더 '인간적'인가. 우리는 지금 어떤 상태에 놓여있는가. 모험이 우리 인간을 지금까지 진화시켜온 원동력이었다면, 이제 우리는 그 모험의 본질과 방향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할 처지에 놓여있다. 그것은 그만큼 우리 인간이 벌여온 모험이 해피엔딩으로 향하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가 현실에서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 길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 지금 상태에서 모험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여야 할까(그래서 진화의 가속도에 우리를 실어야 할까), 아니면 모험을 조절해야 할까(그래서 진화의 방향이나 의미를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까). 모험을 조절해야 한다면 어떤 덕목이 우리에게 필요한가. 수천 년에 걸친 모험의 길 끝에서 우리는 이런 '모험'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고, 이제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다시 물어야 할 시점에 서있다.

박상진 교수(부산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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