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가 시작된 지도 벌써 21년이 지나가고 있다. 현재 대학 3학년인 2019학번부터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남성은 3, 여성은 4으로 시작되는 2000년대 태어난 학생이 입학을 하였다. 20세기(1900년대) 출생자의 뒷자리 시작 숫자는 남자가 1, 여자가 2이었는데, 이른바 '밀레니엄 버그'(컴퓨터상의 연도 표기문제)를 해소하는 차원에서 주민 등록 뒷자리 시작 숫자를 3과 4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이제 대학은 이미 21세기 출생자가 대세가 되었다. 내년이 되면 재수 이상을 하지 않고 입학한 학생이면 모두 2000년 이후 출생자로 대학이 꽉차게 될 것이다.
 1999년 12월 31일에서 2000년 1월 1일로 넘어가는 자정이 되자 (물론 나라들마다 시차는 있었지만) 세계 많은 나라들에서는 폭죽이 터지고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는 축제의 열기가 가득 찼다. 마치 21세기는 20세기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 온 듯했다. 희망과 찬란한 긍정의 세상이 도래하는 것처럼 들뜬 모습으로 2000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숫자가 달라진 것 빼고는 달라진 것이라고는 별로 없었다. 시간은 19세기에도 20세기에도 그리고 21세기에도 계속 되돌아오지 않고 앞으로만 흘러가는 것인데 거기에 숫자라는 기호를 써 놓고는 뭔가 심대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찾고자 하는 것이 우리 인간들인 것이다.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이 1949년에 쓴 소설 『1984』의 디스토피아 세상은 1984년은 물론 20세기가 다 지나가도록 오지 않았다. 그리고 21세기를 맞았다. 이전 시대 인간의 삶보다 더 행복하고 안락한 삶을 제공할 것 같았던 21세기가 시작된 지 채 2년도 되지 않은 2001년 9월 11일, 미국과 세계 자본주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에 두 대의 여객기가 충돌하였다.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를 알리던 기쁨의 축포 소리는 1년 9개월 만에 참혹한 공포의 비명소리로 바뀌었다. 미국 거대 자본주의의 첨단을 표상하던 110층짜리 쌍둥이 빌딩은 1시간 40여 분만에 완전히 무너졌고 미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가 혼란에 빠졌다. 9·11 테러라고 이름 붙여진 이 사건은 미국(의 제국주의 또는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이슬람 테러단체 알카에다에 의해 발생한 참극이었다. 역사상 사망자가 가장 많은 테러 사건으로 기록된 9·11 테러로 2,977명이 사망하고 2만 5천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장밋빛이 아닌 암울한 테러의 색깔이 덧입혀진 채 시작된 21세기는 2007-2008년에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비롯된 글로벌 금융 위기를 맞아 전 세계가 휘청하였고, 다시 2020년 1월부터는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세계적 바이러스 창궐로 다시 휘청거리고 있다.
 21세기의 세계는 그야말로 혼란 또는 혼돈의 상황이다. 원래 '혼돈'이라는 말은 중국 신화에서 나온 말이다.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혼돈(渾沌 또는 混沌)은 악신으로서 궁기(窮奇), 도올, 도철과 함께 사흉(四凶) 중 하나이다. 장자(莊子) 내편(內篇) 응제왕(應帝王) 7장에는 혼돈에 관한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남해의 임금을 숙(儵)이라 하고 북해의 임금을 홀(忽)이라 하며 중앙의 임금을 혼돈이라고 하는데, 숙과 홀이 눈코입귀가 없는 혼돈에게 하루 한 구멍씩을 뚫어 주자 칠일 만에 혼돈은 죽어버렸다고 한다.
 이 혼돈을 우리는 부정적인 단어로 생각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혼돈이란 생성도 소멸도 없는 상태로 볼 수 있다. 주역(周易)에서의 태극(太極)이 분화되기 전 무극(無極)의 상태를 혼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혼돈을 영어로 뒤치면 '카오스'가 될 것인데, 이 또한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카오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말로 '최초의 텅 빈 공간' 곧 이 뒤에 만들어질 우주가 들어갈 공간을 뜻한다. 카오스를 '무질서' 또는 '혼란'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질서-이전'(pre-cosmos)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같다. 카오스 이론이라는 이론도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불안정하고 불규칙적으로 보이면서도 나름대로 질서와 규칙성을 가지고 있는 현상들을 설명하는 이론이 카오스 이론이다.

 

 모 전자회사에서 나오는 세탁기의 이름이 카오스 세탁기이다. 무질서의 질서, 불규칙의 규칙이 적용된 물과 세탁물의 회전을 이용해서 탁월한 세척력으로 빨래를 한다는 것이다. 미술의 표현 기법 가운데 마블링(Marbling)이라는 것이 있다. 물 위에 유성 물감을 떨어뜨린 다음에 휘휘 저어서 유성 물감 즉 물에 뜬 기름이 물의 표면에 다양하게 번지게 한 뒤 종이를 물 위에 덮어 물감이 묻어나게 하는 기법이다. 마블(marble)은 대리석을 말하는데, 결국 마블링이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불규칙한 무늬가 아름다운 대리석과 같은 무늬를 만들어내는 기법이다.
 카오스 세탁기나 미술의 마블링 기법은 모두 다 불규칙하고 혼돈스러운 모습을 과학이나 예술에 응용한 것이다. 이처럼 마치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것처럼 보이는 것이 의외로 우리 곁에 은근히 들어와 번듯하게 자리잡고 있다. 우리가 알 수 없고 예측할 수 없을 뿐, 세상이 돌아가는 데에는 우리가 모르는 카오스의 원리들이 곳곳에서 치밀하게 작용한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 수 없다고 모르면 모르는 체 그냥 넘어갈 것인가? 그래도 사는 데에 별 지장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대학인이라고 한다면, 지성인이라고 한다면 원리를 찾아가려는 노력은 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나는 그 원리를 찾고자 하는 노력의 한 방편을 고전(古典, classic)에 두고자 한다.
 고전이 뭐냐고 질문을 하면 설령 입밖으로 내놓지는 않는다 해도 '옛날 것, 고리타분한 것, 졸리고 따분한 것' 정도의 답이 카오스 세탁기 속의 빨랫감처럼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휘감기고 있지나 않을지 저어된다. 그러나 고전은 단지 옛것이 아니다. 고리타분한 것, 듣고 있으면 졸린 것이 고전 음악이 아니고, 읽다 보면 졸린 것이 고전 서적이 아니란 말이다. '혼돈'이라는 단어가 '장자'에서 나왔고, '카오스'라는 말도 '그리스 신화'에서 비롯되었다. 장자도, 그리스 신화도 고전이다. 고전을 외면하고는 21세기라 하더라도 도통 학문을 논하기 어렵고 삶을 반추하기 쉽지 않다. 논어(論語) 위정(爲政) 편에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면 가이위사의(可以爲師矣)니라'라는 문장이 있다. 옛것을 익혀서 새로운 것을 알게 되면 그로써 가히 스승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3년 전인 2018년에 한국교양기초교육원에서 나오는 <두루내>라는 기관지에 '다시 고전으로, 다신 논어로'라는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다. 그곳에 쓴 내용의 일부를 다시 옮겨 본다.
 "지금으로부터 36년 전, 대학 2학년 봄이 갓 시작하던 1학기 초의 한문학고전강독 시간인 듯싶다. 고인이 되신 김동욱 교수님께서 첫 시간에 들어오시더니 『논어』를 다 외운다면 한문에 대한 걱정도 두려움도 없어질 것이라고, 매년 학생들에게 『논어』를 외우라고 주문했지만 외운 사람들이 없었다고 하셨다. 이 날도 어김없이 "제군들, 『논어』를 다 외우도록 하게!"라는 말씀을 하시고는 첫날 강의를 마치셨다. 그날 한문에 대해서 고전에 대해서 그리고 『논어』에 대해서 어떤 말씀을 더 하셨는지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다만 '『논어』를 외우라'시던 두 마디 말씀이 지금까지 내가 그 수업에서 기억하고 있는 전부이다."
 39년 전인 1982년이나 지금이나 나는 여전히 논어를 외우지도 못하고 실은 외울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 지금은 머리가 굳어 어려울지도 모르겠으나 대학생 때에 논어를 외우자고 마음 먹었다면 못 외울 것도 없었다. 논어 전권은 1편인 학이(學而)부터 20편인 요왈(堯曰)까지 총 20편, 482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20편에 482장이라고 하니 많은 듯이 보이지만, 문장으로 따지만 600 문장 남짓이다. 교수님의 말씀을 귓전으로 흘려버리고 할 수도 있었던 일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나는 교수님께서 언급하신 고만고만한 학생, 그저그런 국문과 학생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교수님의 말씀이 지금도 내 머릿속을 떠나지 못하고 귓가에서 맴도는 까닭은 논어가 내 삶 속에서 깊숙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논어 전부는 못 외웠지만, 논어 전부를 외운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논어의 한 장이 있다. 그것은 바로 논어 첫 번째 책의 학이편 1장이다. 이 글을 읽는 이들이 논어의 다른 구절은 모른다고 해도 이 구절은 아마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달랑 세 개의 한문 문장으로 되어 길지 않으니 그대로 옮겨 본다.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온, 不亦君子乎?(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라고 할 수 있지 아니한가?"
 - 論語 券之一 學而編 其一
 논어는 공자의 제자의 제자 그러니까 손자 제자쯤 되는 이들이 공자와 공자의 제자들의 언행을 기록한 책이다. 논어는 공자 사후 한참 뒤에 만들어졌다는 말이다. 공자가 쓴 것은 아니지만 공자의 언행이 기록된 책이니 공자 또한 논어의 공동 저자라고 해도 딱히 잘못된 말이라고 하기는 어렵겠다. 아무튼 논어라는 동양의 훌륭한 고전 저작의 정확한 저자를 밝혀내기는 어려운 일이다.
 시대를 달리하는 여러 명의 제자들이 어떻게 상의하고 논어를 하나의 책으로 엮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첫 장의 내용과 배치가 기가 막히다. 첫 문장은 배움 또는 공부에 대하여, 두 번째 문장은 인간 관계에 대하여, 세 번째 문장은 인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논어 20편, 482장, 600여 개의 문장의 내용을 정리하면 이 세 가지로 귀결된다. 논어의 서론이자 결론이자 주제가 되는 장, 한마디로 논어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꿰고 있는 장이 바로 이 첫장이 아닐까 한다.
 '배움(공부), 인간 관계, 인성' 이 세 가지는 시대를 초월해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 인간의 조건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이 혼돈의 21세기에 나는 '다시 고전으로, 다시 논어로'를 되뇌게 된다.

이재현 교수(동덕여대 교양대학)

저작권자 © 원광대학교 신문방송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