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란에는 연속기획 <우리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란 제목으로 의사소통교육센터의 <세계고전강좌>와 공개강좌 <글로벌인문학>, <지역학(익산학)> 강연 원고를 번갈아 싣는다. 국내외 여러 석학들이 함께 참여하는 연속기획을 통해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유의 깊이를 넓혀 가길 바란다. /편집자

 

1인 가구 시대, 가족 개념과 현실의 괴리

 우리나라에서 2015년 이래 1인 가구가 가장 보편적인 가구 형태로 자리매김 되면서 오랫동안 익숙했던 가족 관념이 변화하고 있다. 가족하면 아버지, 어머니, 자녀가 함께 사는 집을 떠올리게 되지만, 실제 현실에서 이런 가구는 3분의 1도 채 되지 않는다. 2020년 기준으로 1인 가구는 전체 가구의 31.7%를 차지한다.
 가족이어도 직업과 학업, 주거 문제 등으로 떨어져 사는 집이 많고, 이혼과 재혼, 사별 등으로 다르게 살아가는 가족들을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결혼을 개인의 선택으로 여기는 비혼족이 증가하고, 반려동물을 가족으로 여기거나 결혼했어도 자녀를 낳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우선하는 부부도 늘고 있다. 
 행복해 보이는 사진 속의 사람들은 어떤 관계일까? 많은 이들은 자연스럽게 엄마, 아빠, 딸이라는 가족의 익숙한 개념틀로 세 사람을 바라볼 것이다.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 이들은 혼자서 딸을 키우는 미혼모와 그녀의 애인일 수도 있고,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심한 딩크족 부부가 친한 이웃의 자녀를 돌보는 모습일 수도 있다. 또는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는 커플이 이혼한 형제의 자녀를 대신 키우는 관계일 수도 있다. 
 이제 우리나라도 '가족=혈연가족'이라는 전통적인 가족의 의미와 범위를 변경하는 것이 불가피한 시점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이는 사회의 기본 단위인 가정을 해체시킨다거나 그 기본 개념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결코 아니다. 혼인의 서약과 혈연관계가 소중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만 피를 나누지 않았어도 가족처럼 애정과 깊은 유대를 느끼는 가족공동체가 차별과 편견 없이 함께 살 수 있도록 가족 개념이 확장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 근대가족의 역사와 통치성
 
 해방 이후 우리나라는 압축적 근대화와 산업화를 거치면서 가족을 자본주의 사회에 최적화된 제도로 재구성했다. 가족 안에서 한 명의 어른은 집 바깥에서 경제생활을 하고, 다른 어른은 집안 살림과 자녀 양육을 도맡는다. 이런 성별분업은 가족의 재생산 효율을 높이고 가족이 사회와 자본주의 경제 체계를 위한 기능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해 준다. 
 특히 우리나라는 1960∼80년대 가족계획사업을 통해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이상적 가족 모델을 정형화시켰다. 60년대에는 3자녀를, 70년대에는 2자녀를, 80년대에는 1자녀를 낳도록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출산율, 혼인율, 경제활동인구 구성, 부양인구비 등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다. 
 개인이 아니라 가족을 단위로 한 국가 정책은 양육, 교육, 부양, 의료 등 복지의 부담을 가족에게 짐 지었고, 이런 사회문화적 조건 속에서 가족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한국인의 집단적 심성구조가 형성됐다. 일제 강점기에 도입된 호주제가 식민지배를 위한 통치술이었다면, 가족계획사업은 자본주의경제를 순환시키고 노동하는 주체와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주체를 규율하는 통치의 도구였다.  
 가족은 개인과 사회를 교차시키는 연결점으로서 기능한다. 모든 인간은 가족이라는 첫 번째 공동체에 속해서 관계를 배우고 최초의 사회화를 경험하게 된다. 가족 안에서 체득한 태도와 습관이 일생 동안 만나는 모든 관계들에 영향을 미치면서 개인은 여러 가지 사회적 관계들에 접합되고 매개된다. 긍정적이라면 가족은 친밀하고 좋은 관계들을 이어가는 교차로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가족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것은, 가족이 서로의 취약함을 보듬어주는 따뜻한 울타리가 되어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가족은 사랑과 신뢰의 기억을 전승하는 공동체의 가능토대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근대적 가족제도는 사람들을 사랑과 신뢰보다는, 경쟁, 노동, 소비, 개인주의적 욕망에 연결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돈도 공부도 적당한 수준이 되면 만족하고,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행복하게 살면 좋을 텐데, 먹고 사는 문제로 바빠 가족이 눈을 맞추고 대화할 틈도 없다.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라는 유행어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의 가족은 태어나면서부터 사회문화적 자원을 차등배분받는 일종의 계급처럼 작동한다. 돈이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처럼 느껴지는 물신주의 사회는 가족을 경제공동체로 축소시켰고, 이런 가족은 타인을 사랑과 신뢰로 보살피는 대신에 의무와 역할로 얽어매는 도구적 관계로 변질되기 쉽다. 세상에 믿을 건 가족밖에 없다는 말은 절반의 진실이다. 각박하고 냉정한 사회 시스템 속에서는 가족도 그 각박함과 냉정함을 닮기 때문이다. 

나/너의 이분법 탈피한 외존의 사건
 
 미래의 가족은 혈연이나 제도가 보장해주지 않는다. 20년 가까이 수양부모운동을 벌이며 3만 명 이상의 아이들을 돌봐 온 유엔미래포럼 박영숙 대표는 가족, 핏줄, 부모-자식관계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습관'이라고 말한다. 
 
 1979년 미시간 시댁에 첫 인사를 갔습니다. 우리나라도 잘 산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멋내고 갔는데 시부모님은 당시 한국 아이   3명을 입양해 키우고 있었습니다. 시어머니가 "너희 나라는 잘산다면서 왜 아이를 버리냐"고 묻기에 우리나라는 족보나 핏줄을 특별하게 생각한다고 대답했죠. 그때 시어머니가 "그건 특별해서가 아니고 습관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습관이 가족을 만드는 겁니다.
 「신가족 보고서 가족혁명이 시작됐다」, 『주간조선』,  스페셜 리포트, 2016년 7월   11일

 말하자면 가족은 한번 맺어지면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습관과 태도로 서로를 대하느냐에 따라 변화하는 유동적 관계인 것이다. 소위 '정상'가족도 가족이 되려는 의지와 실천이 없이는 가족애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되레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아도 자기생존과 성공의 욕망을 내려놓고 가장 낮은 자리에서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고 타인과 더불어 사는 이들이 있다면, 이들의 몸에 배인 습관과 태도야말로 가족의 참된 가치를 보여준다. 
 가족을 구성하는 인문학적 요소를 크게    3가지로 꼽아볼 수 있다. 첫째, 가족은 의식적인 관계 이전에 몸과 몸이 맞닿는 신체적 공생의 관계를 조건으로 한다. 눈과 눈, 살과 살이 맞닿는 신체 접촉은 일상생활에서 서로 구별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의 무매개적 직접성을 체험하게 한다. 이는 단순히 육체의 접촉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기능분화된 사회에서 서로의 가장 연약한 부위를 맞대고 서로의 존재 자체에 공명하는 결속의 힘을 만들어낸다. 
 둘째. 가족은 상호적인 변화를 감내하는 사이다. 가족이 된다는 것은 낯선 타인을 향해 자신의 삶을 개방하고 앞으로 벌어질 사건을 타인과 함께 겪어내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상대방을 통해 나를 부정하고 애써 변화시키려는 태도가 보통의 사회적 관계와 다른 가족적 관계의 관건이 된다. 
 셋째. 가족은 상호적인 돌봄을 실천하는 관계다. 영화는 우연히 시작돼 서로 부딪히고 비틀리기도 하지만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해 서로를 돌본다. 죽음, 병듦, 헤어짐, 가난 등 슬픔과 좌절, 위기의 순간에 곁에 있어주고 힘이 되어주는 것이야말로 서로에게 가족이 되는 '절대체험'일 것이다. 
 이제 가족은 하이데거의 말을 빌려오자면 서로를 느끼고 공감하고 돌보는 관계에서 일어난 어떤 외존(外存, Exposition)의 사건을 통해서 의미화될 것이다. 가족이 되는 조건은 나(주체)와 대상(객체) 항 가운데 어느 한편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두 항 사이에서 일어난 동사적 움직임에 있다. 나와 네가 눈을 맞추며 진심으로 공감하고 가장 어려운 시기를 서로 의지하며 통과해나갈 때, 우리는 가족의 제도적 틀 안에서 쉽게 망각되는 관계의 지향점을 다시 상기하게 된다. 서로 기대서 있는 사람인(人)의 형상처럼 가족은 나와 다른 타자와의 깊은 연결 속에서 만들어지는 삶의 과정 자체라는 것을.

류도향 교수(전남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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