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본문과 관계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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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력은 폭력으로 전이되고, 폭언은 폭언으로 되물려진다. 자신을 기준으로 윗사람과 아랫사람만 존재하는 시대다. 갑 또는 을로 구분되는 이분법적 시대다. 우리의 의미는 희미해지고, 아부와 천대가 천연덕스럽게 사람들 곁으로 스며들고 있다. 새로운 시대는 아침처럼 오지 않고 저녁처럼 저물고 있다.
 새벽 즈음 편의점은 불친절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것일까. 모두가 잠든 시간임에도 라디오에서는 갑질에 관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토론의 주된 내용은 사장이 외국인 노동자에게 가하는 갑질이었다. 폭력이 폭력으로 하달된다는 내용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동남아인 또는 흑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듣는 것만으로도 고단하다. 이분법적 사고가 팽배한 사회에서 외국인 노동자는 누구보다 을로 여겨지고 있다. 그들은 한국인 노동자와 동등한 노동을 수행하더라도 그만큼의 보상을 받지 못한다. 임금도 받지 못하고, 폭력과 폭언에 시달리기도 한다. 전체가 불이익 속에서 살아가지는 않지만, 많은 외국인 노동자가 차별 속에서 살아간다.
 차별 가득한 사회를 이끌어 가는 악덕 업주들은 한국인들과 피부색이 다르고, 말투가 어눌하기 때문에 외국인 노동자를 차별한다. 악덕 업주들에게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우리와 다른 것이 아니라, 그저 그들이 틀린 것처럼 대해진다.
 2018년도, 전북 내 체류 중인 외국인 노동자는 3만 2천 557명으로 집계됐다. 고용노동부 전주지청이 관리 중인 고용 현황을 보면, 근로자로 등록된 사람은 6천 505명이다. 100만 외국인 노동자 시대가 절로 실감되는 숫자다.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살아가는 이들은 언제나 을의 처지에 서야 한다. 예컨대, 편의점에서는 아르바이트생이 을이고, 손님이 갑이다. 아르바이트생은 손님의 억지 요구에 따지지도 못하고, 잘못이 없어도 잘못했다는 말을 강요받는다. 타당하지 않은 구조임에도 을인 아르바이트생은 어쩔 도리가 없다. 이와 같은 먹이사슬을 식당에 적용하면, 주인장은 을이고, 손님은 갑이 될 것이다. 그러나 손님이 외국인 노동자라면 어떨까. 피부색이 다른 손님은 을이 된다. 정당하게 돈을 지급하면서 눈치를 봐야 한다.
 대학로로 백반을 먹으러 갔을 때 일이다. 손님은 우리 일행을 포함해 두 테이블밖에 없었다. 저녁 식사 시간을 훌쩍 넘겼을 적이라 가게는 한산했다. 우리 일행이 시킨 간장 불고기가 나옴과 동시에 동남아에서 온 것 같은 외국인 노동자 두 명이 들어왔다. "저쪽에 앉아" 주인장은 구석진 테이블을 가리켰다. 순간 아는 사이인가 했지만, 주인장의 반말과 무심함은 계속됐다. 외국인 노동자 둘은 추레한 작업복을 너털거리며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한국에서의 외국인 인권 침해는 노동자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타국에서 공부하기 위해 온 외국인 유학생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외국인 유학생은 대학로에서 자취방을 잡는 것부터 쉽지 않다. 건물주들은 자신의 건물에 들어오는 학생이 '외국인'이라는 편견 때문에 외국인 유학생을 꺼린다. 중국, 베트남, 우즈베키스탄, 몽골 등에서 온 학생들은 시작부터 삐걱거린다.
 일각에서는 '외국인'이라는 단어 또한 차별에서 탄생했다고 말한다. 이 말을 듣기 전까지 '외국인'이라는 단어에 대해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쓰일 수 있는 단어라고 여겼다. 그러나 '외국인'이라는 단어를 오래 곱씹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겐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장막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당연한 것이 당연한지 고민해야 한다. 인종과 피부색만으로 나는 나고, 너는 너일 수 없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우리는 '우리'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오병현 동문(문예창작학과 16학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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