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인터넷, 컴퓨터, 인공지능, 멀티미디어 등으로 대표되는 첨단 과학 문명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그 동안 인간이 이룩해온 과학의 발달이나 기술의 혁명, 정보의 교류 등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으며 이에 따라 우리의 삶의 방식 역시 이전과는 크게 달라진 게 사실이다. 변화 자체도 획기적이지만 그 속도 역시 엄청나다고 하겠다. 어쩌면 변화의 정도보다 오히려 속도 자체에 우리들의 삶이 휩쓸려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현상들은 물론 우리들 삶의 물적 질적 수준을 높이기 위한 시도들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과거에 비해 생활의 여유와 풍요, 그리고 안락을 더 많이 얻게 된 것일까? 한마디로 말해 우리는 이제 더 행복해진 것일까? 
 우리 시대 삶의 획기적인 변화와 그 속도, 그리고 다양한 면모를, 이전 시대의 그것과 뚜렷이 구분하면서, 이 모두를 한데 아우를 수 있는 용어 중의 하나로 '디지털(digital)'을 들 수 있겠다. 디지털이라는 용어야말로 첨단 과학 문명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 시대의 모습을 포괄한다. 이 자리에서 디지털을 언급하는 이유는 역시 무엇보다도 그 속도에의 몰입과 그로 인한 부정적 폐해 때문이다. 얼핏 생각해보면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차이는 우선 그 속도와 정확성 여부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디지털로 대표되는 오늘날의 과학 문명과 정보 교류의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그리고 그 결과가 인간의 삶에 얼마나 큰 혜택을 주고 있는지는 새삼 강조하지 않아도 다들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 삶이 분명 더 풍요로워진 면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속도가 우리를 더욱 바쁘게 하고 고달프게 몰아세우고 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초고속, 최첨단 등으로 규정되는 과학 문명과 정보화의 물결 속에서 너나없이 속도에 몰입하는 게 요즘 삶의 부박한 단면 아닌가.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외국 작가인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는 자신의 소설 『느림』(민음사, 1995)을 통해, 느리고 한가로운 관조와 여유가 사라져버린 오늘날의 현실을 특유의 가벼우면서도 철학적인 유머로써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느림의 한가로운 즐거움은 게으른 빈둥거림과 다르며, 그것은 마치 신의 창(窓)들을 관조하는 행복이라고 한다. 그는 온통 속도에 몰입하고 있는 오늘날의 멋대가리 없는 세상에 대한 탄식과 비판을 이렇게 담아내고 있다. "어찌하여 느림의 즐거움은 사라져버렸는가? 아, 어디에 있는가, 옛날의 그 한량들은? 민요들 속의 그 게으른 주인공들, 이 방앗간 저 방앗간을 어슬렁거리며 총총한 별 아래 잠자던 그 방랑객들은? 시골길, 초원, 숲속의 빈터, 자연과 더불어 사라져버렸는가?" 소설 『느림』은 바로 이 느림의 즐거움을 되새기게 하는 작품이다.
 그리 길지 않은 소설 『느림』의 전체 줄거리는 사실 단순하다면 단순하고 복잡하다면 복잡하다. 작품 속의 화자가 아내와 함께 고성(古城)을 개조한 호텔에 가서 하루를 지낸다는 줄거리로 보면 단순하기 짝이 없다. 그렇지만 겹으로 엮여 있는 다른 이야기들과 그 이야기 속의 여러 인물 유형들이 한데 뒤섞이면서 소설은 좀 복잡해진다. 거기다가 작가 특유의 철학적 사유가 끼어들면 다소 난해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게 바로 쿤데라 소설의 매력이다.
 쿤데라는 이 책에서 "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강도에 정비례하고, 빠름의 정도는 망각의 강도에 정비례한다"는, 이른바 실존 수학의 방정식을 내세운다. 더 요약하자면 느림은 기억과 비례하고, 빠름은 망각과 비례한다는 것인데, 이 방정식은 금방 증명된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기억하고자 돌이키다 보면 자연스럽게 발걸음은 느려지기 마련이다. 반면에 무엇인가를 빨리 잊고자 하면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은 빨라지게 된다. 이처럼 느림과 기억, 그리고 빠름과 망각이 쌍을 이루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오늘날의 속도는 우리를 점점 망각으로 내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밀란 쿤데라는 『농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생은 다른 곳에』 등의 작품으로 세계적으로 많은 독자층을 거느리고 있는 작가로서, 우리나라에도 그의 거의 모든 작품이 번역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개인적으로는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으로 아무래도 『불멸』을 꼽을 수 있겠다. 그렇지만 그의 작품들은 대체로 여러 이야기가 겹으로 얽혀 있고, 거기다가 작가 특유의 삶에 대한 사변적 인식이 불쑥불쑥 끼어들기도 해서, 처음 접하는 독자들로서는 다소 어리둥절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도 소설 『느림』은 밀란 쿤데라가 우리 시대에 얼마나 매혹적인 작가인지를 아직 인지하지 못한 독자들이 입문서로 읽기에 충분한 소설이다. 이 작품을 통해 쿤데라 소설의 매력을 조금이라도 느끼기 시작했다면 누구나 책방으로 도서관으로 달려갈 것이다. 그의 다른 작품들을 모조리 찾아 읽기 위해서 말이다.   

 

강연호 교수
(문예창작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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