량치차오(1873-1929)는 그야말로 중국의 근대를 대표하는 사상가이며, 그의 사상의 궤적이 바로 중국근대의 사상의 궤적이라고 할 만큼 시대적 상황에 따라 변화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자신이 중국과 서양, 고대와 현대, 정치와 학문 사이에서 그 절충과 조화를 꾀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과도기적 시대뿐만 아니라 과도기적 사상을 대표하기도 하는 인물이다.

1919년 파리에서 량치차오(텐진 량치차오기념관 소장 사진)
1919년 파리에서 량치차오(텐진 량치차오기념관 소장 사진)

서양에 해답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영특하기로 소문났던 량치차오는 시대를 보는 눈도 남들보다 앞서 있었다. 중국의 길을 발견하고 그 해답을 찾는 것도 누구보다 선진적이었다. 그런 그는 근대중국에 위기가 닥쳤을 때,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열쇠가 서양에 있다고 생각했다. 서양의 무기나 군함도 서양이 강해진 이유이지만, 서양의 사상이나 제도도 중요한 이유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젊은 시절 량치차오는 열심히 서양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고, 중국의 젊은이들에게 서양의 사상이나 정치가 어떠한가를 알려주고자 노력했다. 그는 루소, 베이컨, 데카르트, 다윈, 칸트, 몽테스키외, 등등 수많은 서양 사상가들을 소개하는 글을 썼으며, 진화주의, 공리주의, 사회주의, 민족주의 등등 서양의 다양한 이데올로기도 소개하였다. 신채호가 나중에 번역하여 한반도에 알려지게 된 『이태리건국삼걸전』도 량치차오의 글이었다. 그의 서양에 대한 관심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 두루 걸쳐 있었고, 중국을 위기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떤 인물, 어떤 사상에 치우치지 않고 두루 관심을 가졌다. 
 
 그렇게 얻어낸 결론은 서양이 발전한 주요한 원인이 자유의 발달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자유를 얻은 인간, 다시 말하자면 노예에서 벗어난 인간만이 진화의 주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스스로의 마음에 있다고 보았다. "진정한 나"는 자유로운 주체이고, 그 출발점은 "양심"에 있으며, 스스로 자유롭고자 하는 권리를 갖는 것이야말로 일생일대의 책임이라고 보았다. 량치차오는 "자유는 모든 권리의 근본이고, 모든 책임의 근원"이라고 강조하면서, 중국인들은 자유를 가져야 하고, 자유로운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그러므로 "자유는 천하의 공리"이고 사람이 태어나면서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루소를 얘기하고, 밀을 얘기하고, 몽테스키외를 얘기했다. 

해답을 찾기 위해 떠난 유럽여행
 이렇게 젊은 시절 량치차오는 서양을 소개하기 바빴지만, 정치를 그만두고 학문과 교육에만 전념하고자 했을 때부터는 서양과 중국을 절충하고 조화시키고자 노력하게 되었다. 그리고 가장 주요한 계기는 유럽으로의 여행이었다. 1918년 12월 23일 베이징을 출발하여 처음 유럽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을 때, 그의 여행의 목적은 안목도 늘리고 세계대전이 어떻게 종결되었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에 있었다. 유럽으로 가는 배에서 열심히 프랑스어와 영어를 익히고, 그동안 읽지 못했던 책들을 읽으면서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가득히 품고 유럽으로 향했다. 그가 처음 도착한 유럽 도시는 영국의 런던이었다. 런던은 전쟁의 참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딸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시 런던의 풍경을 "음울하고 답답한 느낌"이라고 묘사했다. 다음으로 프랑스 파리로 갔다. 영국과 프랑스를 돌아보며, 량치차오는 재정과 금융 사정은 어떠한지, 전쟁 상황은 어떠한지, 각국의 정당은 어떠한지, 최신 문학조류는 무엇인지 등에 관심을 가졌다. 그밖에 벨기에, 네덜란드, 스위스, 이탈리아, 독일 등을 두루 살펴보았고, 가는 곳마다 그곳의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여기저기 전쟁터를 돌아보느라 음식과 처소가 불편하여 잠도 잘 못자고 몸도 피곤했지만, 배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덕분에 영어와 프랑스의 실력이 늘어난 것도 소득이었지만, 가장 큰 소득은 유럽의 지식인들과의 교류였다.  

해답은 동양에 있다? 
 전쟁 이전부터 유럽은 경제적 위기가 심각했고, 그로 인해 사회혁명과 정치혁명의 기운이 어둡게 드리워져 있었다. 대내적으로는 빈부격차와 계급갈등이 심각한 수준이었고, 대외적으로도 민족주의적 갈등이 팽배해있었다. 그야말로 위기의 시대였다. 중국의 위기를 해결하고자했던 량치차오는 자신이 흠모했던 유럽인들 사이에서 물질만능주의, 군국주의, 제국주의 등이 만연한 것을 보고 생각이 복잡해졌다.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그야말로 "비관적 논조"로 가득 차 있었다. 1922년 슈펭글러의 『서양의 몰락』이라는 책은 이런 유럽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었고, 량치차오가 목격한 것이 바로 이렇게 "어둡고 암울한 가을 느낌"의 유럽이었다. 그가 유럽에서 느낀 감상을 적은 책이 『구유심영록절록』이다. 
 
 이런 어두운 분위기에서도 량치차오는 "세계주의 국가"를 세우고 싶다는 희망을 품었고, 이제는 유럽이 아니라 중국이야말로 세계의 변화를 이끌 처방을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애국을 외치는 사람들은 많지만, 국가가 있다는 사실만을 알고 개인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으며, 국가가 있다는 것만 알고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고 느꼈다. 그는 이런 편협한 애국주의로는 세계 어느 국가도 충분히 발전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세계주의 국가를 주장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은 유럽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유럽에서 만난 미국인 기자 사이몬은 그런 량치차오에게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사이몬은 량치차오에게 중국에 돌아가서 혹시 서양문명을 전파할 것인지 물었을 때, 량치차오는 "그거야 당연하죠"라고 대답했는데, 사이몬은 "아! 애석하군요! 서양문명은 이미 파산했어요"라고 했다. 서양문명이 파산했다는 얘기는 량치차오가 유럽을 찾았을 때 여러 사람이 귀에 딱지가 앉도록 해준 말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서양이 정말 다 끝난 것은 아니라고 량치차오는 생각했다. 그들의 현대문명도 과거의 문명과는 다른 것이었고, 계속해서 새롭게 일군 것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유럽인들에게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주었고, 그들의 인생관에 큰 변화를 주었지만, 철학이 다시 부흥하고 있었고, 종교도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새로운 씨앗이 살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량치차오는 중국도 그런 재건의 대세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더 이상 싸우지 않고, 조화롭게 사는 세계를 이루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렇게 그는 중국이 세계주의적인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위해 그는 서양과 중국의 철학을 절충시키고 조화시켜 새로운 시대의 철학이 탄생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다. 이렇게 유럽 여행은 그를 서구주의자로 만든 것이 아니라 절충주의자로 만들었다.

김현주 교수(원광대 HK+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저작권자 © 원광대학교 신문방송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