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브루니는 15세기 전반 피렌체를 대표하던 휴머니스트이자, 역사가, 정치 사상가였다. 그는 뛰어난 고전어 실력과 해박한 고전 지식을 바탕으로 르네상스 휴머니즘 문화를 한 차원 높은 단계로 발전시켜 당대 최고의 휴머니스트로 인정받았다. 또한 역사가로서 브루니는 엄격한 사료 비판, 인과적 해석을 통해 역사 서술의 발전을 가져 왔다. 특히 이와 관련해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피렌체 시민사(Historiae Florentini Populi)』에서 발견되는 대범한 개념 구성, 독창성, 스타일 등은 이후의 역사 기술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이에 따라 당대의 지식인들뿐만 아니라 현대의 르네상스 사가들 사이에서도 이 저작은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낳은 가장 위대한 역사 저술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그러나 역사 서술을 비롯한 다른 여러 방면에서의 탁월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유독 브루니의 정치사상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온 것이 사실이다. 정치 사상가로서의 브루니는 일반적으로 공화주의자로 이해되고 있다. 공화주의는 개인주의에 기초한 자유주의 정치 이념과 달리 개인이 누려야 할 사적 권리보다는 공동체에 대한 봉사와 시민의 덕을 강조하는 정치 이념이다. 브루니는 공화주의를 통해 대내적으로는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건강한 시민정신과 시민들의 정치 참여를 강조하고, 대외적으로는 피렌체의 독립과 자유를 주장했다.

이것이 바로 르네상스 당대에는 번역가, 수사가, 역사가로 더 널리 알려지고 평가되었던 브루니가 현대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근대 공화주의 전통의 씨앗을 뿌린 시민적 휴머니스트(civic humanists)’로 주목받는 이유이다. 이와 같은 브루니에 대한 평가는 무엇보다 한스 바론의 선구적인 연구 덕분이다. 바론은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위기(The Crisis of the Early Italian Renaissance)』에서, ‘구엘피즘(Guelfism) 전통과 공화정 로마의 공동체적 가치에 기초한 시민적 애국심’, 그리고 르네상스 특유의 고전고대에 대한 열정이라는 이질적인 두 요소를 결합시켜 시민적 휴머니즘이라는 테제를 제시했다. 15세기 초 이탈리아, 특히 피렌체의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시민적 휴머니즘의 등장은 밀라노의 전제군주 잔갈레아초 비스콘티의 군사적 팽창으로 불거진 정치적 위기 상황이 빚어낸 지적 풍토의 혁명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바론에 따르면, 밀라노의 파상 공세로 도시의 존립 자체마저 불투명했던 1402년의 위기 상황을 겪으면서 피렌체인들 사이에서는 전통적인 중세적 가치 개념이 허물어지고 새로운 시민적 이데올로기가 등장했다.

브루니의 많은 저작들은 이와 같은 시민적 휴머니즘의 핵심적인 사상들을 뚜렷이 보여준다. 브루니에게 있어 정치상황이 빚어낸 커다란 도전은, 단순한 법적·제도적 개선이 아니라 시민 공동체에게 새로운 윤리 의식을 제공함으로써 극복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활동적 삶(vita activa)’의 윤리에 뿌리를 둔 시민적 휴머니즘이라는 새로운 문화 개혁운동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 점에서 르네상스 시민적 휴머니즘은 단순히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의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 지식인의 관념 세계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정치 환경 사이에서 배태된 능동적 상호 작용의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바론 테제의 수용 과정에서, 시민적 휴머니즘에 관심을 기울여온 이후의 역사가들은 이 새로운 지적 운동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바론이 주목했던 시민적 휴머니즘의 선구적 인물 브루니와 그의 저작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그 중에서도 특히 『피렌체 찬가』는 시민적 휴머니즘의 발생(genesis)과 특성(originality)을 규명하는 귀중한 자료로 간주된다. 이 저작을 통해 브루니가 처음으로 공화주의적 자유를 예찬하고 피렌체의 역사를 공화주의적 시각에서 기술했던 탓이다. 바론에 따르면, 『피렌체 찬가』야말로 1402년의 정치적 위기 상황이 가져온 새로운 시민 의식과, 그에 기초해 더욱 정교하게 이론화된 공화주의 정치 이념을 새로운 역사적 시각에서 담아낸 씨앗과도 같은 저작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후의 여러 수정주의 해석을 통해 바론의 테제가 지니고 있는 정치적 편견이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르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브루니가 묘사했던 공화주의 이념이 당시 피렌체의 대내외적 정치 맥락 속에서 재해석되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도전에도 불구하고, 『피렌체 찬가』 자체가 지니는 역사적·사료적 가치는 결코 부인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피렌체가 밀라노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직후 브루니가 이 저작을 저술했고, 이에 따라 『피렌체 찬가』는 그 자체로 잔갈레아초와의 투쟁을 거치면서 생겨난 피렌체 지식인의 새로운 정치·역사의식의 가장 열정적이고 완전한 첫 표현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저작에 제시된 정치 이념으로서의 자유라는 관념과 공화주의 역사관은 단순히 브루니의 사상뿐만 아니라 르네상스 시민적 휴머니즘의 기본적인 뼈대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물론 이 저작 하나만으로 브루니의 공화주의 정치사상이나 시민적 휴머니즘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후 브루니의 여러 다른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공화주의 정부론이나 활동적 삶의 원리에 입각한 공민적 윤리 의식’, 그리고 결혼과 가정생활, 부의 추구 등과 같은 세속적 가치에 대한 적극적 의미부여라는 좀 더 포괄적인 시민적 휴머니즘의 여러 요소들이, 아직까지는 『피렌체 찬가』에 명확하게 제시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렌체 찬가』에 나타난 그의 역사관과 자유관을 살펴보는 일은 그 자체로 브루니의 공화사상과 시민적 휴머니즘의 일단을 이해하는 첫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피렌체 찬가』가 급박했던 정치 상황과 이로 인한 지적 풍토의 변화를 그대로 웅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이후 브루니의 여러 저작들에 나타나는 정치사상과 윤리의식이 이 저작에 제시된 공화주의적 자유관과 역사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피렌체 찬가』야말로 르네상스 시민적 휴머니즘의 진정한 메니페스토로 불릴 만하다.

 

휴머니스트 특유의 수사적 연설의 양식을 띤 『피렌체 찬가』는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연설은 먼저 피렌체의 물리적 측면에 대한 예찬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브루니는 피렌체의 지정학적 탁월함, 도시의 청결함, 아름답고 장엄한 건축물, 피렌체가 차지하고 있는 비옥한 영토, 풍부한 농산물 등에 관해 이야기한다. 두 번째 장에서 브루니는 물리적 측면에서 도시의 기원으로 주제를 전환한다. 브루니에 따르면, 피렌체가 공화정 시대의 로마인들에 의해 건설되었기 때문에, 피렌체인들은 자연스럽게 정치적 자유라는 신념을 간직하고 있으며, 황제 또는 전제정에 반대하는 정치 이념을 견지할 수 있었다. 세 번째 장은 피렌체의 대외 정책에 대해 다룬다. 여기서 브루니는 최근의 잔갈레아초에 대한 투쟁이 보여주듯이, 피렌체가 전 이탈리아 자유의 수호자로서 늘 약자의 편에 서왔으며, 또한 주변 도시에 관용을 베풀면서 고대 로마인의 덕성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한편 브루니는 마지막 장을 피렌체의 내부 조직과 정체(政體)를 묘사하는 데 할애한다. 이 장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피렌체의 정치 구조 또는 내부 조직이 법에 기반한 완전한 조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브루니에 따르면 피렌체의 모든 정체와 조직이 정의의 구현이라는 대명제에 따라 결정되고 운용되고 있으며, 그 결과 피렌체의 모든 시민은 그 어떤 것에도 침해받지 않는 최대한의 자유로운 삶을 구가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브루니가 도시의 물리적 또는 물질적 측면에 대한 논의에서 시작해 이후 도시의 역사를 추적하고 마지막으로 피렌체의 대내·외 정책과 제도를 다루면서, 이 도시의 모든 점을 예찬하려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더 중요한 정치 이념에 대한 강조가 이 같은 형식적 구성과 이를 통한 피렌체에 대한 수사적 찬양 아래에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비슷한 시기에 쓴 또 다른 저작 『대화집』(14051406)의 제2권에서 브루니는 한 명의 대화자 세르미니(Piero Sermini)의 입을 통해 피렌체 찬가의 구성과 집필 의도에 대해 스스로 이야기한 바 있다.

 

그대[브루니]는 처음 이 도시와 이 도시의 장식물들을 예찬하고, 다음으로 이 도시의 로마적 기원에 관해 이야기했다. 셋째 부분에서 그대는 피렌체가 대내외에서 이룩한 여러 업적들을 묘사했고, 마지막으로 그대는 여기에 나타난 피렌체의 모든 탁월함을 예찬했다. 그러나 그대의 연설에서 특히 나를 만족시키는 한 가지 사실은, 그대가 우리의 정치적 신념이 가지는 영광스러운 기원에 관해 이야기하고, 이러한 대의가 이 도시에서 차지하는 적절하고 정확한 권리에 관해 설명했다는 점이다.

 

세르미니의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브루니가 이 저작을 통해 그저 피렌체의 여러 측면을 형식적 차원에서 예찬하기보다는, 피렌체인들이 간직하고 있던 정치적 신념을 확인하고 이를 정당화하려고 했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브루니의 정치사상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가 생각했던 자유에 대한 관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유야말로 브루니의 정치사상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관념이기 때문이다. 브루니는 자유를 인간의 자기 계발의 원천이자 공화주의적 덕의 시원으로 인식했다. 그리고 그런 맥락에서 그는 『피렌체 찬가』에서 자유가 손상되지 않고 완전히 구현되었을 때 피렌체가 건설되었고, 이것이 왜 피렌체가 전제정의 가장 강력한 반대자가 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주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라고 설명한다. 여기에서 그는 피렌체의 기원을 모든 시민들의 자유가 구현되었던 공화정 로마에서 발견함으로써, 자유가 공화국의 기본 요소임을 강조한다. 한 마디로 브루니는 자유를 통해 공화주의를 옹호했으며, 공화국의 모든 덕성은 어떠한 조건에서도 침해받지 않고 완전한 자유를 구가하는 건강한 시민 의식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했다. 『피렌체 찬가』에서 브루니가 예찬했던 피렌체의 위대함은 결국 자유의 결실이며, 피렌체인들이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면서 기인한 것이었다.

『피렌체 찬가』는 이 같은 정치 이념으로서의 자유라는 관념이 개념적으로 구성된 최초의 저작이다. 여기에서 브루니는 자유와 정의를 피렌체의 모든 정치 체제가 지향하는 행동윤리의 원천으로 다루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브루니에게 자유 없는 정의는 있을 수 없고, 마찬가지로 정의 없는 자유 또한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자유와 정의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으며, 자유의 보존이야말로 도시 공동체의 정의를 구현하는 일 그 자체이다. 이에 따라 브루니는 『피렌체 찬가』에서, 피렌체가 자유를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시민들이 법적으로 평등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법적 정의의 실현이 시민의 자유를 보장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피렌체에서는 공공선을 유지하고 시민의 자유로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 법이 제정되었으며, 법정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었다. 또 피렌체에서는 최고위원회를 비롯한 모든 행정 조직이 법에 의해 제한된 권한만을 행사함으로써, 최고 권력의 전제화를 억제할 수 있었다.

따라서 브루니가 예찬한 피렌체 사회의 가장 커다란 장점은, 이 도시에서는 어느 누구도 법 위에 군림할 수 없고 모든 시민이 법 앞의 평등을 누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브루니가 주장한 법적 평등은 단순히 모든 시민이 동등한 지위를 누려야 한다는 획일적 평등을 뜻한다기보다는, 법이 정의의 원리에 따라 운용되어야 한다는 형평(衡平)’의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그는 피렌체에서는 지위와 신분의 차이에 따라 시민에게 서로 다른 법적 처벌을 적용함으로써 정의가 구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브루니의 말을 직접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바로 이 점에서, 사람들은 다른 어느 도시보다 더 훌륭한 피렌체의 분별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힘 있는 자들이 그들의 부와 지위를 악용해 약자를 위협하거나 경멸할 경우, 피렌체에서는 정부가 개입해 약자를 보호하고 가난한 자보다 부유한 이들에게 더 많은 벌을 부과함으로써 약자와 그들의 재산을 보호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람들마다 지위가 다르고 그에 따라 사람들에게 부과되는 벌도 다르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논리에 따른 것입니다. 피렌체는 이 원리를 정의와 분별력의 이상에 맞게 운용하여, 가장 많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가장 많은 도움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서로 다른 계급의 사람들은 형평의 개념에 따라 다루어져, 피렌체에서는 상층 계급은 자신의 부를 통해 보호받고, 하층 계급은 국가에 의해 보호를 받으며, 이 두 계급은 모두 법적 처벌의 두려움으로 일탈을 피하게 됩니다.

 

여기서 브루니가 강조한 것은, 피렌체에서는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시민들 사이의 신분적, 경제적 불균형이 극복되고 모두가 동등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는 점이다. 브루니는 시민들 사이의 불균형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을 신분에 따라 서로 다른 벌을 부과하는 법적 형평의 원리에서 모색하고, 이를 통해 피렌체에서는 그 어느 것으로도 침해할 수 없는 사회 정의가 구현되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형평의 원리에 입각해 법을 집행함으로써, 이 세상 어느 곳도 피렌체만큼 자유로울 수 없다고 브루니는 강조한다.

『피렌체 찬가』에서 제기되는 법적 형평에 입각한 자유관이, 브루니의 공화주의적 자유에 대한 사상을 모두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1428년에 저술한 『난니 스트로치를 위한 추도사(Oratio Funebris ad Nanni Strozzi)』에서는 브루니의 자유관이 보다 정치적인 개념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이 추도사에서 브루니는, 피렌체에서는 모든 시민들이 법 앞의 평등과 동등한 공직 참여의 기회를 누릴 수 있기 때문에진정한 시민의 자유가 고양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공직 참여의 자유가 시민의 재능을 계발시키며, 이러한 이유에서 피렌체가 다른 어느 곳보다 재능과 성실성 면에서 뛰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달리 말해 브루니는 정치, 사회, 문화, 군사력 등 모든 분야에서 확인할 수 있는 피렌체의 탁월성을 자유로운 공직 참여의 길이 보장됨으로써 가능해진 시민의 자기 계발의 결과로 인식했다.

이를 고려하면 『난니 스트로치를 위한 추도사』에 나타난 자유는, 『피렌체 찬가』에서 제기되었던 강자로부터 약자를 보호하고 이를 통해 사회 정의를 구현하려던 소극적인 개념에서 벗어나, 정치 참여를 통해 개인의 잠재 능력을 실현하는 적극적인 개념으로 발전한 것이다. 간단히 말한다면, 난니 스트로치를 위한 추도사』에서 자유를 정치권력에 참여할 수 있는 동등한 기회 부여의 원리로 파악함으로써, 브루니는 『피렌체 찬가』에 제시했던 법적 자유라는 개념을 시민의 정치적 행동 윤리로 발전시켰다.

그렇다면 브루니에게 자유란 법 앞의 평등과 정치권력의 평등이라는 두 원리를 바탕으로 달성될 수 있는 관념이었다. 그러나 브루니는 이와 같은 자유를 개인의 권리 추구를 강조하는 개인주의 또는 이에 바탕을 둔 자유주의적 관점에서보다는, 공동체에 대한 봉사와 기여라는 공화주의적 시각에서 규정한다. 브루니의 자유관이 담고 있는 공화주의적 요소에 대한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난니 스트로치를 위한 추도사』의 한 구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자유는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며, 단지 법에 의해서만 제약을 받을 뿐 어떤 다른 사람의 위협에도 구속받지 않는다. 만일 노력하고 재능이 있으며, 건실하고 성실하게 생활한다면, 공직에 참여하고 자기 자신을 고양시킬 기회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주어진다. 우리 공화국은 시민들의 덕과 성실성(probitas)을 필요로 한다.……이것이 진정한 자유이고, 이것이 공화국의 평등이다.

 

여기서 브루니는 단순한 평등과 개인의 정치 참여보다 이것이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는 시민의 덕과 성실성을 대변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점에서 인간의 자기 계발을 고양하는 실천 덕목으로서의 자유는 자아의 완성이라는 개인적 목적의 실현을 뜻한다기보다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시민이 갖추어야 할 윤리 규범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공동체의 일에 평등한 자격으로 참여해 헌신하고 이를 통해 공공선에 봉사하며 덕을 발휘하는 시민의 정치적 삶을 강조함으로써, 브루니는 이전 세대의 명상적 삶(vita contemplativa)’의 이상에 반하는 활동적·정치적 삶(vita activa et politica)’의 원리를 부각시켰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브루니의 자유관은 개인주의적 관점에서보다는 공화주의적 시각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주된 이유다.

 

16세기 초의 마키아벨리가 잘 보여주듯이 르네상스 시대의 많은 정치 사상가들은 역사와 정치를 불가분의 관계로 생각했다. 특히 피렌체인들에게 역사는 모든 정치적 사고의 주요한 근간을 이루었으며, 브루니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피렌체 찬가』에 나타난 그의 역사관과 역사의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고, 또 그것이 어떻게 브루니의 시민적 휴머니즘을 담아내고 있는지에 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피렌체 찬가』에는 여러 측면에서 이전의 역사 서술과 구별되는 몇몇 특징들이 발견된다. 그러나 이 점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먼저 『피렌체 찬가』가 어떻게 고전고대의 모델을 이용했는지 검토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통해 고전고대의 수사학 전통을 계승하고 고전문화의 영감에 귀 기울였던 휴머니스트로서의 브루니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새로운 정치 이데올로기로 재해석해낸 시민적 휴머니스트 또는 공화주의자로서의 브루니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브루니는 자신의 작품에서 고전 그리스의 모델을 이용한 첫 번째 르네상스 저술가였다. 특히 『피렌체 찬가』에서 그는 그리스의 웅변가 아리스티데스(Aelius Aristides)의 『아테네 찬가(Panathenaicus)』를 의식적으로 모방했다. 그러나 브루니가 아리스티데스의 작품에서 주목했던 것은 단순한 수사학적 규범이나 형식적 구성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아리스티데스가 강조했던 페르시아 전쟁 기간 동안의 아테네의 정치적 경험과 군사적 탁월성, 그리고 그에 힘입어 아테네가 성취할 수 있었던 문화적 지위에 주목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브루니가 아리스티데스의 『아테네 찬가를 통해 얻고자 했던 것은 개념적 또는 주제적 모티프였다. 따라서 『피렌체 찬가』에서 브루니가 제기한 문제와 이들의 역사적 진행 과정은 아리스티데스가 묘사한 아테네의 역사와 도드라질 정도로 뚜렷한 유사성을 지닌다. 아리스티데스에 따르면, 아테네는 모든 그리스 자유 도시국가들의 방파제로서 페르시아의 전제정으로부터 전 그리스 세계를 구출했으며, 이러한 투쟁을 통해 성취한 정신과 정력을 바탕으로 전 그리스 세계의 문화적 요람이 될 수 있었다.

당대 피렌체의 경험, 특히 밀라노와의 투쟁을 아리스티데스가 묘사했던 아테네의 페르시아에 대한 항쟁과 비교하려 했던 것이다. 브루니는 아테네가 페르시아의 전제정에 맞선 모든 그리스 자유세계의 보호막이었듯, 피렌체가 밀라노의 전제군주에 대항하는 전 이탈리아 자유의 수호자임을 강조했다. 물론 이 밖에도, 브루니가 『피렌체 찬가』의 첫 번째 장을 할애하여 길게 이야기했던 피렌체의 지정학적 탁월성과 물리적 환경도, 논리적 구성이라는 차원에서, 아리스티데스가 강조했던 아테네의 그것과 많은 부분 유사하다. 또한 브루니가 예찬한 피렌체의 문화적 우수성은 강한 정치·군사력을 바탕으로 아테네가 전 그리스 세계에서 차지했던 지도적 위치에 비교된다. 브루니는 학문과 예술마저도 정치의 미학적 산물로 강조하며, 정치와 학문의 발전을 상호 비례적인 관계로 인식했다. 이 점에 비추어볼 때, 아리스티데스의 아테네 찬양이야말로 브루니의 정치 중심적 세계관에 잘 부합하는 고전적 모델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브루니는 당시 휴머니스트들에게 그다지 큰 인기를 끌지 못하던 그리스의 평범한 웅변가 아리스티데스에게 주목하고, 그의 작품에 나타난 정치와 문화의 비례 관계를 자신의 저작의 모티프로 삼았다.

아무튼 이런 브루니에게 역사는 하나의 단일한 이야기다. 이것은 브루니가 동일한 정치 이념을 역사를 통해 표출했기 때문인데, 이때 브루니의 역사를 꿰뚫고 있는 하나의 이야기가 바로 공화주의 이념이었다. 브루니는 역사를 통해 공화주의의 모티프를 얻었으며, 또한 피렌체의 역사를 공화주의적 맥락에서 서술한다. 역사의 문제가 곧 정치의 문제로 귀결되는 셈이다. 물론 정치사적 입장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브루니의 역사 서술이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그는 공화주의적 입장에서 과거의 사실을 왜곡하기도 했으며, 계급적 편견을 가지고 역사를 서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브루니는 여러 면에서 근대적 역사가의 특징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왜냐하면 브루니는 역사를 사실의 원인에 대한 규명과 이에 대한 역사가의 판단과 설명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역사 서술에서 드러나는 여러 문제는 결코 그의 역사 인식이 가지는 한계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 이보다는 오히려 역사를 공화주의 정치 이념에 따라 기술하려 했던 그의 정치사상적 편견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브루니의 역사관은 다음과 같은 뚜렷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브루니는 역사를 통해, 공화주의 이념에 입각하여 피렌체의 정치 경험을 일관되게 기술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브루니가 역사를 구성했던 핵심 뼈대가 바로 정치적 자유였다. 그는 역사를 전제정 대 공화정의 대결 구도로 파악하고, 이 둘 가운데 인간의 자유가 무한히 번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의 질적 발전이 이루어지는 공화정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둘째, 브루니의 역사관에는 이렇게 구현된 자신의 시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려는 낙관적인 입장이 개진되고 있다. 브루니에게 역사는 우연적인 사건의 연속이나 신의 섭리의 표현이 아니다. 그는 역사를 인간 공동체, 특히 공화정 로마, 그리고 이들의 후손으로서 피렌체인들이 일구어낸 창조력의 산물로 인식했다.

브루니가 볼 때, 인간 문명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준 이러한 공동체는 모두 공화국이었다. 그는 오직 공화국에서만 인간의 창조적 능력이 계발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브루니는 이러한 공화정의 창조력에 주목하면서, 당시의 피렌체가 구가하던 외적 팽창과 정치, 문화적 발전을 예찬했던 것이다. 브루니에게 있어, 공화정 로마가 기원전 12세기를 전후해 인류 역사의 절정에 도달했듯이, 15세기 초의 피렌체는 역사상 제2의 위대한 시대를 새로이 열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브루니가 역사를 기술하면서 다른 휴머니스트들과 마찬가지로 고전고대의 여러 작가들의 문체와 형식 등에 영감을 받았으며, 이들을 모방하고 변용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피렌체 시민사』를 비롯한 일련의 역사적 저작들에 한결같이 나타나는 브루니 역사관의 일단은 이미 『피렌체 찬가』에서 그 기본적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피렌체 찬가』에 나타난 밀라노 대 피렌체그리고 황제당 대 교황당의 이중적 대결 구도는 전제정 대 공화정이라는 정치 이념적 대결 구도와 결코 다르지 않다. 브루니에 따르면, 피렌체가 밀라노에 대항하여 거두게 된 위대한 승리, 그리고 기벨린 이데올로기에 대항하여 피렌체가 유지해온 구엘프 전통은 모두 공화주의의 위대한 투쟁과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피렌체 찬가』에서 특히 부각되는 중요한 사실은, 공화주의적 관점에 따라 역사를 기술하면서 브루니가 고대사에 대한 역사 사상의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올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가 공화주의적 모델에 따라 피렌체의 기원을 추적하면서 로마사를 새롭게 평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브루니가 볼 때, 피렌체의 기원이 될 수 있는 사회는 무엇보다 공화주의적 자유와 덕이 충만한 사회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역사상 존재했던 다른 어떤 시대보다도 공화정 로마에 주목했다. 브루니는 『피렌체 찬가』에서 인간의 덕과 자유가 최고로 고양되었던 시대에 피렌체가 건설되었다고 주장하면서 공화정 로마야말로 바로 이러한 시대였으며, 이 점에서 피렌체가 진정한 공화정 로마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이 같은 공화정 로마에 대한 주목은 단테 그리고 심지어 이전 세대의 살루타티 등이 강조했던 한 명의 보편적 통치자에 대한 강조와, 이에 따른 제국 로마에 대한 전통적인 관심으로부터 그가 역사 사상의 혁명적 전환을 가져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말 할 나위 없이 이와 같은 브루니의 로마사 해석이 로마의 멸망과 함께 유럽인들이 간직해왔던 하나의 영원한 로마(Roma aeterna)’의 이상이 소멸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세 신성로마 제국이 제국 로마의 계승자를 자처했던 반면 브루니는 개별 도시국가의 기원을 제국이 아닌 공화국에서 찾음으로써, 공화주의적 덕을 모태로 생장한 개별 국가로서의 피렌체에 주목하게 되었다. 따라서 『피렌체 찬가』에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제국 로마의 범죄와 폭력에 대한 비판적인 묘사이다. 브루니의 로마사에 대한 공화주의적 해석과 공화정 로마의 물질적·정신적 후손으로서의 피렌체라는 시각이야말로, 새롭게 부각된 정치의식이 역사적으로 반영된 결과로 해석되어야 한다.

『피렌체 찬가』에서 브루니가 제국 로마와 공화정 로마에 대하여 상반된 평가를 내리게 된 기준은, 무엇보다도 전제적인 통치가 필연적으로 강제했던 로마인들의 덕성의 소멸이었다. 이와 같은 로마사 해석은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민적 휴머니즘의 이상과 공화주의 정치 이념의 표현이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고대의 역사가들을 새롭게 읽고 해석하면서 얻은 역사 인식의 결과였다. 특히 브루니는 『피렌체 찬가』에서 공화정의 풍부한 문화적·지적 창조성과 전제정의 척박함을 대조하기 위해 타키투스를 새롭게 해석했다. 타키투스는 13세기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거의 잊혔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14세기에 접어들면서 그의 저서인 『역사(Historiae)』가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에 의해 처음으로 재발견되었고, 이후 그의 작품들이 살루타티 서클을 중심으로 알려지게 되면서 휴머니스트들에게 새로운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휴머니스트들에게 타키투스의 영향력은 미미한 것이었다. 특히 타키투스의 제정군주론에 대한 논의가 1617세기 절대주의 왕권강화론자들의 중요한 논거가 되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제정 로마에 대한 예찬은 여러 측면에서 공화주의 이념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브루니는 처음으로 타키투스에게서 공화주의의 정치적 함의를 발견하고, 공화정을 옹호하고자 그를 인용했다.

타키투스는 『역사와 『연대기(Annals)』에서, 제국 시대에 들어서면서 황제들의 폭정으로 시민들의 정치적 자유가 쇠퇴했고, 이에 따라 로마가 부패하고 타락하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로마의 문화적 생명력이 기울어져갔다고 주장했다. 비록 이 같은 타키투스의 로마사 해석이 그의 전체 역사 사상에서 부차적인 주제였음에도 불구하고, 브루니는 이를 전제정의 해악을 규정하는 근거로 채택하게 되었다. 브루니는 『피렌체 찬가』에서 피렌체 공화정의 로마적 기원과 전통을 강조했는데, 이러한 그의 주장을 뒷받침했던 것이 바로 타키투스였다. 이에 따라 브루니는 공화정에서만 인간 삶의 모든 분야에서 탁월성이 도모될 수 있으며, 공화국이 독재자 한 사람의 손에 예속되면서 이 모든 뛰어난 정신이 소멸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제국 시대에 들어서면서 로마를 지탱하던 덕이 쇠퇴했다는 타키투스의 논의를 통해, 브루니는 공화정 대 전제정의 투쟁에서 공화정의 우월함을 입증하려는 자신의 일관된 정치적 신념을 이론적으로 구체화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로마의 역사가 살루스티우스 역시 브루니에게 공화주의적 영감을 불어 넣었다. 살루스티우스는 『카탈리나의 전쟁(Bellum Catalinae)』에서 왕들에게 선한 사람들은 사악한 사람들보다 더 큰 의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따라서 로마 시민들은 왕을 축출하고 자유를 획득했으며, 이러한 자유가 번성하면서 로마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해질 수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이와 같은 살루스티우스의 말은 브루니가 자유와 공화정의 관계를 규정하는 데 하나의 규범이 되었다. 브루니는 살루스티우스의 모범에 따라 만일 위대함을 달성하려면 자유가 고양되어야 하고, 자유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공화정이 이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유와 공화정을 불가분의 관계로 생각했다.

훗날 브루니 스스로 인정했던 것처럼, 『피렌체 찬가』 대부분이 이상과 현실이 뒤섞여 있는 수사적 작품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찬가를 통하여 브루니는 동시대인들은 물론 후대 피렌체인들의 정치적 영감을 자극하고 고무하려고 했다. 스스로 암시했듯이 『피렌체 찬가』가 그의 대표작 『피렌체 시민사를 위한 일종의 시험운전으로 평가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피렌체 찬가』를 통해 브루니는 고대사에 대한 공화주의적 재해석, 자치와 자율적 행동 원리로서의 자유에 대한 이상, 인간 잠재 능력의 실현을 위한 사회적 개방성, 인간의 창조적 능력의 계발을 가능케 하는 자유의 심리적·정신적 역할 등과 같은 다양한 관념들을 효과적으로 종합해 서유럽 공화주의 전통의 핵심 이념을 표현했다.

 

시민적 휴머니즘은 정치 체제로서의 공화정에 대한 옹호, 이에 따른 역사의 재해석, 시민적 애국심과 이에 바탕한 자신의 도시에 대한 헌신적 예찬,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행동 윤리로서의 활동적·참여적 또는 시민적 삶에 대한 강조라는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같은 여러 가치는 브루니의 여러 작품에서 나타나는 한결같은 주제였다. 특히 그의 『피렌체 찬가』는 이와 같은 시민적 휴머니즘과 공화주의 정치 이념의 원초적 형태가 발아한 최초의 저작이었다. 물론 브루니 이전에도 피렌체인의 정치 담론을 지배했던 것이 공화주의라는 말이었으며, 피렌체인들이 대내외적으로 자신들의 정치 이념과 체제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해왔던 명제도 공화주의였다. 이렇게 본다면 공화주의는 중세 이래 오래도록 지속되어온 정치 이념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브루니는 관념적으로 사용되어오던 공화주의라는 주제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이것을 현실 정치 이념으로 정립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마지막으로 브루니의 시민적 휴머니즘과 공화주의 이념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를 언급하고자 한다.

첫 번째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브루니가 제시한 공화주의적 시민은 진정한 근대인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와 집단의 일원으로만 인식되던 중세적 인간관과 비교할 때, 브루니의 공화주의적 시민은 정치적 자유를 획득한 자율적인 개체였다. 브루니가 공동체에 대한 시민의 봉사와 헌신을 강조했다고 해서, 이것이 곧 개인을 도외시한 집단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브루니는 인간을 공동체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사회적 존재로 인식하고, 여기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자율적인 인간을 강조했던 것이다. 바론이 비유한 것처럼 페트라르카가 최초로 신천지를 발견하고도 끝내 그곳에 발을 들여놓지 못한 모세와도 같은 존재였다면, 브루니가 생각한 공화주의적 시민은 중세의 현세 은둔 관념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사회 참여와 실천을 행하는 자의식을 지닌 정치적 인간이었다.

두 번째는 브루니의 공화사상이 정치의 세속화와 탈-중세화를 촉진시켰다는 점이다. 브루니 이전 세대의 정치 사상가들은 크리스트교적 윤리관의 영향 아래에서 정치를 윤리적·도덕적 문제로만 파악하면서 형이상학적이고 항구적인 보편 논리로 정치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브루니는 정치 세계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인지하고 정치를 이해타산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현실의 문제로 파악하면서, 주어진 현실의 가변성과 이에 대한 인간의 효율적인 대처를 강조했다. 또 브루니는 모든 정치적인 문제를 공화주의 이념에 따라 인식하면서, 14세기까지 유럽인들의 정치적 사고의 중심이 되었던 교황당 대 황제당의 대립이라는 이원적 중세 정치 질서를 극복할 수 있었다. 『피렌체 찬가』에서 브루니가 구엘프 전통이 피렌체에서 차지하는 의미와 그것의 정치 이념에 대해 상세하게 논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결코 중세적 관념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치적 자유를 교황당 이념의 대의와 연결시키면서 브루니는 피렌체 공화정에 고전적 명분과 현대적 가치를 동시에 부여하려고 했다. 이것은 그가 피렌체의 구엘프들을 스파르타의 에포르 또는 로마의 감찰관 등과 동등한 지위로 묘사한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그의 대-밀라노 전쟁에 대한 평가에서 알 수 있듯이, 브루니는 이 전쟁을 전제 국가와 공화주의 국가 사이의 투쟁으로 인식하면서, 모든 정치사를 독립적인 정치 단위로서의 세속 국가의 문제로 파악했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브루니의 시민적 휴머니즘 또는 공화사상이 근대 서양 공화주의 전통의 이념적 원천이 되었다는 점이다. 포콕은 일찍이 바론의 시민적 휴머니즘에 주목하고, 이것을 그의 테제인 대서양 공화주의의 뿌리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15세기 피렌체인들의 정치 담론이 마키아벨리를 거치면서 더욱 성숙되었고 이것이 이후 서유럽 공화주의 전통의 이념적 기초가 되었다. 실제로 피렌체는 처음 코무네가 형성될 때부터 계속해서 공화국으로 발전해왔고, 특히 15세기 피렌체 지식인들의 정치 세계를 지배했던 것이 공화주의 담론이었다. 또한 브루니 이후에도, 그가 주장했던 시민적 이상이라는 관념은 피렌체의 지적 전통 속에서 계승되고 더 한층 폭넓게 발전했다. ‘마키아벨리적 순간(the Machiavellian Moment)’은 이와 같은 시민적 휴머니즘의 고전적 표현 양태였다. 그것을 계기 삼아 브루니의 시민적 휴머니즘이 배태한 자유, 덕성, 공화주의 이념과 같은 정치적 관념들이, 자유주의 이념과는 구별되는 또 다른 형태로 서양 근대 정치사상의 발아를 가능하게 했다. 만약 이와 같은 포콕의 논의를 받아들인다면, 15세기 초 정치 경험을 통해 공화주의 이념을 정립한 브루니야말로 서양 공화주의 전통의 진정한 효시라 일컬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임병철 교수(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피렌체 찬가의 역자)

저작권자 © 원광대학교 신문방송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