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맹 수
(원불교학과 교수)


 4월 28일은 원불교의 4대 기념일 가운데 가장 큰 기념일인 대각개교절(大覺開敎節)입니다. 대각개교절이란, 원불교(圓佛敎)를 창시한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 대종사(1891-1943)가 우주의 진리를 ‘크게 깨달아(大覺), 원불교를 새로 여신(開敎)' 날을 기리는 날입니다. 우주의 진리를 크게 깨달아 원불교를 새로 연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란 분은 어떤 인물인 지 알아 보기로 합시다.


 대종사는 지금의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읍 길룡리 영촌 마을에서 1891년에 평범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대종사가 태어나던 1891년, 즉 19세기 말 우리나라는 조선왕조 말기로써 일본과 서양 여러 나라의 침탈에 시달리던 어지러운 시대였습니다. 대종사 네살 때인 1894년에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 안으로 부패한 조선왕조를 개혁하고 밖으로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자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 결과 전국 각지에서 동학농민군 수십만명이 희생당하였습니다. 또 15세 때인 1905년에는 일본에게 외교권을 빼앗김으로써 사실상 국권을 상실한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그에 맞서 전라도를 비롯한 전국에서는 대대적인 의병항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의병항쟁도 실패로 돌아가 대종사 20세 때인 1910년에는 마침내 나라가 망하는 비운을 겪어야 했습니다.      

*대종사 ‘큰 깨달음’ 나라 잃은 민중들에게 ‘횃불’


*“만유가 한 체성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다”

   
 대종사는 이와 같은 암울한 시대에 태어나 일곱 살 때인 1897년 무렵부터 우주자연 현상과 인간사회의 현상에 대해 깊은 의문을 품기 시작하였습니다.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열 살 때부터는 산신(山神)과 도사(道士) 만나기를 간절히 소원하였으나 끝내 산신과 도사를 만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의문을 풀기 위한 구도를 포기할만도 했지만 대종사는 20세부터 다시 기도와 명상, 깊은 사색을 통한 구도과정을 계속 밟아 나갑니다. 그리하여 기나긴 구도생활 끝인 1916년 4월 28일, 대종사는 마침내 동녘에 해가 떠오를 무렵, 우주의 진리를 ‘크게 깨닫게’ 됩니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지 여섯해 되는 1916년 4월, 26세의 한 이름 없는 젊은 청년 소태산 대종사가 이룩한 ‘큰 깨달음'이 지닌 우주사적(宇宙史的) 의미는 “만유가 한 체성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 없는 도와 인과보응 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는 대종사님의 가르침 속에 상징적으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같은 대종사의 ‘큰 깨달음'은 나라를 빼앗긴 채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던 조선 민중들의 앞길을 환하게 비추는 횃불과 같은 의미를 지닌 역사적 대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큰 깨달음'을 이룬 대종사는 그 후 “시종일관하신 성의(誠意)와 순일무사하신 공심(公心), 청탁병용하시는 포용(包容)"이라는 탁월한 리더쉽을 발휘하면서 나라 없는 조선 민중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하면서, 다가올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이상사회를 향한 공부길을 힘차게 열어가기 시작합니다.

 1916년 4월 28일 이후부터 모여들기 시작한 제자들은 대종사를 스승으로 모신 가운데, 1917년에는 금주단연(禁酒斷煙)과 허례폐지, 공동노동과 좀들이 쌀 저축운동을 내용으로 하는 저축조합(貯蓄組合) 운동을 전개하였고, 1918년에는 영광 길룡리 앞 바다를 막는 간척운동을 전개하여 3만여 평의 농지를 개척하였으며, 1919년에는 세상과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온통 헌신하자는 일대 기도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진리로부터 인정을 받는 ‘법인성사(法印聖事)'라는 큰 기적을 보이시게 됩니다.

 그러나 간척지 개척 성공과 ‘법인성사'의 기적이 일어난 직후부터 대종사는 일본 경찰의 날카로운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됩니다. 이에 자극받은 대종사는 전북 변산(邊山)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변산에 숨어 5년간의 준비 끝인 1924년 6월, 대종사는 현재의 전북 익산시 신룡동에서 ‘불법연구회'라는 임시 이름으로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하고, 1943년 돌아가실 때까지 정신개벽(精神開闢)을 통한 이상사회 건설운동을 계속합니다. 이 ‘불법연구회'가 바로 오늘의 원불교의 전신(前身)입니다.

 대종사는 53세라는 길지 않은 인생을 살고 가셨습니다.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어지러운 시대에 태어나신 대종사는 평생토록 태극기가 마음껏 휘날리는 그런 날을 하루도 보지 못한 채 살다 가시었습니다. 그러나 대종사님의 큰 가르침은 대종사가 돌아가신 뒤 더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합니다. ‘큰 깨달음'에서 솟아난 대종사의 ‘사자후(獅子吼)'는 망해버린 조선 민중들의 마음을 움직여 ‘개벽(開闢)의 일꾼'으로 거듭나게 하셨으며, 정신개벽을 위한 공동체인 오늘의 원불교 교단을 이룩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어둡고 암울하기만 했던 식민지시대  조선 땅 한 켠에 소태산 대종사라는 민중적(民衆的) 지도자가 계셨기에 오늘의 원불교와 오늘의 원광대학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대종사의 크신 가르침이 계셨기에 원불교는 식민지시대, 해방정국과 한국전쟁기, 군사정권시대 등 어둡고 힘든 시대를 뚫고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성장할 수 있었으며, 1916년 역사의 무대에 처음 등장한 이래 아직 1백년도 아니 되는 아주 짧은 역사 속에서도 한국사회과 국제사회로부터 따뜻한 관심과 기대를 받는 ‘호감 가는 종교'가 되었습니다.

 아흔번째 대각개교절을 맞이하는 오늘, 원불교의 모든 신자들은 전국 각지에 있는 교당(敎堂)에 모여 축하 행사를 엽니다. 전북 익산의 원불교 중앙총부에서는 구내에 있는 소태산 대종사 성탑(聖塔)을 참배하며 “원불교가 주위로부터 받고 있는 큰 주목과 기대, 칭송 등 이 모든 공덕을 대종사님께 돌리옵니다"라는 회향(回向) 기도를 올립니다. 이 글을 읽는 학우들도 원불교의 가장 큰 명절인 대각개교절을 맞이하여 원불교 신자들이 올리는 기도처럼 오늘 하루만이라도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의 일생과 그 가르침을 조용히 묵상(默想)해 보는 시간을 가져 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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