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

오 상 아 (화정고등학교 3학년)

 늙은 개는 오늘도 혀를 쑥 빼물고 있었다. 나는 빌라 계단에 앉아 빈 공터 한 가운데에 누워있는 녀석을 바라보았다. 진돗개만한 크기인 녀석의 털들이 먼지덩어리처럼 뭉쳐있었다. 걸레짝같이 늘어진 녀석의 목덜미 쪽 털 사이로 다 뜯어지고 때가 탄 빨간 목걸이가 보였다. 분홍색 혀를 길게 빼물고 헐떡거리며 숨을 내쉴 때마다 늙은 개의 몸이 바쁘게 아래 위로 움직였다. 땅에 배를 대고 고개만 살짝 들어 올린 채로 누워있던 녀석은 이따금씩 불안한 듯 자꾸만 주변을 훔쳐보았다.

 공터는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주택가들 사이에 덩그러니 위치해 있었다.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늙은 개는 이곳에 자꾸만 나타났다 사라졌다. 모래 위로 듬성듬성 나있는 죽어버린 누런 풀들과 칠이 벗겨진 시소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녀석은 지루할 만큼 길게 잠을 잤다.

 나는 교복 와이셔츠의 넥이 닿는 뒷목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강렬하게 내리 쬐는 햇볕 때문에 살갗이 자꾸만 따끔거렸다. 목을 쓸어내리자 진득한 땀이 손에 묻어났다. 나는 이마를 찌푸렸다. 열쇠를 찾기 위해 몇 번이고 교복 치마 속을 뒤져 보았으나 운영비 미납금 용지만 손에 걸릴 뿐이었다. 비밀번호만 누르면 열리는 전자키를 달지 않겠다고 한사코 반대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열쇠도 있는데 굳이 돈을 들이면서까지 바꿀 필요는 없다는 게 이유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공터 주변에 나있는 담 뒤로 높게 올라가 있는 아파트들이 눈에 들어왔다. 힘없이 가방 속에 들어있는 물을 꺼내들자 맞은편 공터에 누워 있던 늙은 개가 꼬리를 흔들며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녀석에게 위협적인 손을 들어보였다.
아버지는 맞은 편 단지에서 경비를 맡고 계셨다.

 겨우 2년 전에 완공된 아파트였다. 아파트단지 뒤 쪽에 줄지어 늘어서 있는 주택 단지로 오기 위해서는 아파트사이를 가로질러 오는 쪽이 훨씬 수월했다. 가끔씩 친구들과 단지를 거쳐서 올 때면 매주 토요일마다 오후 순찰을 돌고 있는 아버지와 마주쳤다. 아버지는 늘 그랬듯이 오른쪽 다리를 절며 위태로운 걸음걸이로 걷고 계셨다. 저 아저씨, 걷는 게 좀 이상한 것 같아, 친구들이 아버지를 훔쳐보며 낮은 목소리로 키득거렸다.

 나는 아파트 단지의 가장 오른쪽 구석에 있는 경비실로 다가갔다. 붉은 벽돌로 이루어져있는 경비실 옆에는 노란 요구르트 가방이 세 개나 쌓여있었다. 나는 가방 옆에 나있는 손바닥만한 창문에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먼지가 낀 창문 너머로 텅빈 경비실 내부가 보였다. 나는 창문을 두어 번 톡톡 두드렸으나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때 책상 위에 어지럽게 흩어져있는 서류들 사이로 아버지의 열쇠꾸러미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주변을 훑어보았다. 주차된 몇 대의 차들만 있을 뿐 아무도 보이지않았다. 경비실 창문을 열자 드르륵 소리가 나며 안쪽에 놓여 있던 '순찰중' 이라는 팻말이 툭 넘여졌다. 나는 재빨리 열쇠 꾸러미를 집어 들었다. 여러 개의 열쇠들이 서로 부딪치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집 열쇠들 찾아내자 나는 뒤도 걸어보지 않고 걷기 시작했다. 먼 곳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친구들이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그 뒤로 긴남색 소매를 팔뚝까지 걷어올린 아버지가 걸어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어색하게 손을 들어올렸다. 오른손 안에 꼭 쥐고 있던 열쇠가 경비실 안에서 햇볕에 달구어져 있었던 탓인지 데일 것 처럼 뜨거웠다.

 으이그, 핏덩이들을 배더니 …. 얼마 전에 저 쪽에서 하두 이상한 냄새가 나서 가보니 그 오동통했던 녀석들이 다 바짝 말라서 모래 위에 죽어있더라구. 결국 내가 치워주긴 했지만…. 늙은 개가 공터를 찾아오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던 날, 옆집에 혼자 사시는 할머니가 바닥에 함부로 던진 음식쓰레기 봉투의 입구가 힘없이 풀렸다. 시큼한 냄새가 나는 벌건 국물이 내리막길을 따라 줄줄 흘러내렸다. 공터에서 얼쩡거리던 녀석이 한걸음에 달려와 국물을 핥아먹기 시작했다. 뭉쳐버린 털들 사이로 녀석의 까만 눈동자가 나를 흘깃거리고 있었다.

 나는 창문 난간에 몸을 기댔다. 시계가 벌써 9시를 넘기고 있었다. 한참동안 공원 한가운데에 지루하게 누워 있던 늙은 개 가 느릿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녀석은 가볍게 몸을 털더니 죽은 풀들 사이로 코를 박았다. 그런 녀석이 마치 거대한 먼지덩어리 같아보였다.

 그 때 기다란 그림자가 골목 쪽에서 걸어 나왔다. 늙은 개의 걸음처럼 남자는 느릿느릿하고 위태로운 걸음으로 공터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오른손에 든 봉지에서 병들이 마주치는 맑은 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남색모자를 꾹 눌러쓴 아버지의 얼굴이 어둠에 드리워져 있었다.

 아버지는 공터에 들어서서 높이가 고르지 못한 벽돌 위에 앉았다. 늙은 개는 먼 곳에 떨어져서 나를 올려 다 본 그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탁자 위에 올려둔 열쇠를 흘깃바라보았다. 텅빈 탁자 위에 열쇠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내 가슴 속에 닫아둔 자물쇠들이 하나씩 풀려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팟, 하는 소리와 함께 공터 쪽 가로등의 불이 들어왔다. 노란 불빛이 덕지덕지 눌러붙은 아버지의 회색머리카락 위로 환하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끝>

저작권자 © 원광대학교 신문방송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