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부터 1976년까지 중국에서 일어난 사회주의 운동인 문화대혁명은 진시황이 책을 불태우고 학자들을 분서갱유한 것에 비견될만한 일이었다. 이 문화혁명은 처음엔 마오저뚱이 대규모 이념 투쟁 및 권력 쟁탈 투쟁의 수단으로 전개하였다. 그리고 1966년 8월 마오저뚱이 ‘프롤레탈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안16개조’를 발표한 후, 본격적으로 문화대혁명은 거센 칼날을 휘둘렀다.

 마오저뚱의 열렬한 지지자들은 주요 도시에 진출하여 마오저뚱 사상을 찬양하고 낡은 문화를 일소하기 위해서 대대적으로 반대파를 숙청하고 학교를 폐쇄하고 전통적인 가치와 부르주아적인 것을 맹렬히 공격하였다. 수많은 서적들과 서양 및 일본에서 유입된 문화재등이 파괴되었고, 유학 등 전통사상이나 서양 학문을 알고 있던 수많은 지식인들이 숙청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중국은 전통문화와 학문이 단절된 10년 동안의 문화적 암흑기를 맞는다.

 중국 영화도 혁명의 칼날을 피할 수는 없었다. 중국 영화는 문화혁명 이전에도 사회주의리얼리즘에 입각한 선전영화와 멜로영화를 통해 인민을 교육시킨다는 정책적인 입장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펼쳐진 문화대혁명은 영화계를 더욱 위축시켰고 영화인들을 양성해 내던 북경영화학교마저 1976부터 1978까지 폐쇄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문화적 암흑기는 사실주의 전통을 재해석하는 새로운 영화미학을 탄생시키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사실주의 영화미학은 중국 영화의 오래된 전통이었다. 덩샤오핑의 등장으로 문화대혁명은 종료되었고, 북경영화학교도 1978년에 다시금 문을 열어 1982년 일련의 우수한 졸업생들을 배출한다. 이들이 새롭게 중국 영화의 황금기를 연 중국의 제5세대 감독들이다. 첸 카이거, 장이모우, 황 지안신, 티안 주앙주앙, 황 준자오 등이 그 주역들이다. 이들 5세대 감독들은 82년 졸업과 더불어 새로운 작품을 통해 종래의 중국영화의 관습을 과감히 던져 버리며 세상에 자신들의 이름을 알린다. 그 시작이 황 준자오의 <하나와 여덟(1984)>과 첸 카이거의 <황토지(1984)>이다. 첸 카이거의 <황토지>는 문화대혁명 이후 최초로 해외에서 찬사와 주목을 받았던 영화이다. <황토지>는 1984년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은사자상을 수상했다. 즉 유럽 영화계에 본격적으로 제5세대 영화의 작가주의를 예고한 것이다. 이후로도 다수의 5세대 감독들은 국제 영화제에 참가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어 자국보다는 해외에서 더 인정을 받아 유명해진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5세대 감독들은 문화대혁명의 세대들이었다. 그들은 그 시기에 중국민중의 생활을 생생히 보고 느꼈으며, 공산주의 이념의 허구성을 그 누구보다도 절실히 깨달았다. 그 때문에 5세대 감독들은 한결같이 문화혁명 이후의 비참한 사회 현실을 직시하고 과거를 반성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더불어 역사적인 상황에 의해 좌절되는 인간의 모습, 여성에 관한 지위 문제, 세대간의 갈등, 사고방식의 변화, 그리고 그 변화의 절실한 필요성을 자신들의 영화에 담아냈다. 제5세대는 형식미에 그들의 미학을 집중시켰다. 지금까지 중국 영화가 전통적으로 유지해 오던 영화 속의 문학성을 과감히 버리고 영상미에 중요성을 부여하였다. 또한 주체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영상과 사운드의 역동적인 조화를 강조했다. 5세대가 문학적 유산을 물려 받기는 했지만 그들은 중요한 구성원리로 전통 멜로드라마의 양식을 더 이상은 차용하지 않았다. 대신 잠재적인 이야기로 출발하여 극의 결과보다는 전개 과정을 중시했다. 그래서 많은 에피소드로 영화를 채워나간다.

 제5세대 감독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정치적인 발언이 강하다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영화들이 제작의 목적을 관객으로 하여금 능동적이고 객관적인 자세로 현실에 대해 새로운 사고를 하도록 하자는데 두고 있다.

 5세대 감독들은 관객들에게 항상 질문을 던진다. 비참한 자신들의 모습을 직시하고, 특히 봉건적 이데올로기를 비판하여 다시금 중국문화를 재조명 해 줄 것을……

이 영 (유럽지역어문학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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