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란에는 연속기획 <우리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란 제목으로 비교과통합센터의 <세계고전강좌>와 공개강좌 <글로벌인문학>, <지역학(익산학)> 강연 원고를 번갈아 싣는다. 국내외 여러 석학들이 함께 참여하는 연속기획을 통해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유의 깊이를 넓혀 가길 바란다. /편집자
 

『논어』 / 출처 : 공공누리
『논어』 / 출처 : 공공누리

 

1. 공자와 논어

1-1. 시대적 배경
   공자(B.C.551~B.C.479)가 살았던 시대는 동주(東周, B.C.771~B.C.250)부터 춘추시대(B.C.771~B.C.404)까지 해당한다. 특히 춘추시대는 공자의 사상형상에 중요한 배경이 된다.
   서주(西周) 시기(B.C.1111~B.C.771)에 천자(天子)는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권위라 여기고 천하를 다스렸다. 때문에 제후들이 천자를 상대로 공격하고 침범하는 전쟁이 일어날 수가 없었다. 만약 그러한 제후가 발생한다면 다른 제후들이 연합하여 그를 제압하였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흘러 여러 제후국들의 국력이 크게 신장된 반면 주나라는 오랑캐 견융에게 패한 뒤부터 국세가 날로 쇠약해져만 갔다. 그 결과 천자의 권위가 약해지는 동시에 강대해진 제후국들도 출현하게 된다. 이것은 곧 봉건질서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으로, 점차적으로 강대국이 약소국에 예속되어 갔다. 춘추시대 초기에는 제나라 환공이 패자인 제후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는 천자를 받들어 모시면서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나머지 제후들을 규합하여 천하의 질서를 회복하려 했다. 이후 춘추오패(春秋五霸)라 불리는 진 목공(穆公송 양공(襄公초 장왕(莊王)등이 등장한다.
   그러한 혼란 속에서 공자가 태어난다.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지금의 산둥지방)는 춘추 초기에는 어느 정도 국력을 지녔으나 이후 계손(季孫숙손(叔孫맹손(孟孫) 등 삼환씨(三桓氏)라는 대부 집안의 세력에 의해서 정치가 잘못되면서 날로 쇠약해졌다. 때문에 공자의 염원 중 하나는 노나라 공실의 무력한 권위를 바로잡는 것이었다. 이처럼 춘추시대의 노나라는 정치적으로 혼란스럽긴 했지만 우수한 문화적 환경을 간직하고 있었다. 덕분에 공자가 유가를 이룩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될 수 있었다.

1-2. 주유천하(周遊天下)
   공자는 55세에 모든 벼슬을 버린 다음해부터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나라를 찾아 여행길에 오른다. 그 뒤 68세에 노나라로 돌아올 때까지 여러 나라의 임금을 만나 도덕정치의 이념을 설득하였다.
   『사기』 「십이제후연표에서는 공자가 70여 개 나라의 임금들을 유세했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어지러운 천하를 바로잡으려는 이 긴 여정에서 공자는 자주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이미 공자가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정치가로서 명성이 높았고, 뛰어난 학문과 심오한 사랑으로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찾아간 곳마다 상당한 대우를 받기도 했다. 논어에는 당시의 공자가 위나라 영공(靈公)을 비롯한 여러 나라 제후와 귀족들을 만나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기록들이 보인다.
   그러나 공자의 이상실현을 위한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다. 도덕중심의 이상사회 건설에 뜻을 함께하여 실현하고자 하는 군왕이 없었기 때문이다. 공자 스스로도 진()나라를 방문한 뒤에는 돌아가자! 돌아가자! 내 고장의 젊은이들은 뜻은 너무 큰 데 비하여 일에는 거칠고, 겉모습은 아름다운 무늬를 이루고 있는 것 같으나 앞뒤를 잘 헤아리어 일을 처리할 줄은 모르고 있다”(논어』 「공야장)고 탄식하면서 노나라로 돌아갈 뜻을 비쳤다. 결국 B.C. 484(공자 68) 계강자(季康子)의 초청을 계기로 공자는 위나라를 떠나 고향인 노나라로 돌아왔다.

1-3. 논어의 개괄
   『논어라는 책명이 실려 있는 가장 오래된 전적은 예기(禮記)방기(坊記)편에는 논어에 이르기를 삼년 동안 아버지의 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효도할 것이다고 하였다라고 적혀있다. 논어는 공자 생전에 집필한 책이 아니라 공자 사후에 그 제자들이 결집한 책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편찬되었을까? 한나라 시대의 유향(劉向, B.C. 77~B.C. 6)별록(別錄)에서 공자의 제자들이 훌륭한 말들을 기록한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후 여러 학자들은 논어는 공자의 제자들이 막연히 편찬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논어가 공자의 어록이 담긴 성경(聖經)이라는 점이다. 논어의 내용은 공자의 말씀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각 장마다 나오는 제자들의 말과 대화도 공자의 말씀을 부연 설명하는 내용이다.
 

2. 논어속 공자의 마음공부

   마음공부란, 마음의 원리를 알고 그 원리에 따라 마음을 잘 지키고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우리가 마음공부의 길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의 구조와 원리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음의 작용을 구조상으로 살펴보면 본래 마음’, ‘나는 마음’, ‘내는 마음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본래 마음이 어떤 상황을 접하기 전 분별이 없는 고요한 마음이라면, 나는 마음은 어떤 상황을 접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마음을 말한다. 내는 마음은 어떤 상황에서 본인의 의지에 따라 취사선택하는 마음을 말한다. 본래 마음은 평상시 명상·기도·주문 등을 통해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내재적인 힘을 기를 수 있다. 나는 마음은 상황에 따라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마음이기 때문에 도덕적 가치판단을 하지 않은 채 일어나는 마음 그대로를 온전히 바라보고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나 내는 마음은 다르다. 내는 마음은 본인의 의지에 따라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그에 따른 결과는 반드시 스스로가 책임져야 한다. 따라서 시비이해의 정확한 판단에 따라 올바른 취사를 해야 한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서 마음의 세 가지 구조와 작용을 대하는 자세를 밝히자면 아래와 같다. 이제 마음의 세 가지 구조와 작용의 실례를 논어속에서 찾아보며 그 의미와 방법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2-1. 본래 마음 : 일상의 회복
   마음은 누구나가 갖고 있다. 그러나 마음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모두가 인정하고 수긍할 만한 개념 정의는 여타 종교나 철학을 불문하고 찾기가 쉽지 않다. 어쩌면 이러한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마음이 다만 본래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우리 안에서 수많은 감정이나 의지 등으로 표출되고 있다. 그러나 정작 그 작용의 주체인 마음은 무엇이라 정의할 만한 고정된 형체가 없다. 엄밀히 말하면 그 고정된 형체가 없다는 말도 사실 없다. 결과적으로 마음은, 우리의 육체적 감각기관으로는 그 실상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명심보감에서는 이러한 마음의 불가지적 특징을 범을 그리되 껍데기는 그릴 수 있으나 뼈는 그리기 어렵고, 사람을 알되 얼굴은 알지만 마음은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본래 마음을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어떠한 상황을 접하기 전에 본래 텅 비어 고요한 마음을 말한다. 텅 비어 있기 때문에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다. 텅 비었으면 아무것도 없어야 하지만 그 가운데 밝게 아는 바가 있어 소리가 나면 소리 그대로를 들어 알고, 형상이 있으면 형상 그대로를 보고 안다. 이것을 본래 마음의 참모습이라 말한다. 이에 해당되는 논어의 대표적인 구절은 다음과 같다.

 

   “子曰 天何言哉시리오 四時行焉하며 百物生焉하나니 天何言哉시리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하늘이 무슨 말씀을 하던가? 사시(四時)가 운행되고 온갖 만물이 생장(生長)하는데, 하늘이 무슨 말씀을 하던가?”

   “
詩云 德輶如毛라하나 毛猶有倫하니 上天之載 無聲無臭至矣니라.”
   《시경()은 가볍기가 터럭과 같다.’ 하였는데, 터럭도 오히려 비교할 만한 것이 있으니, ‘상천(上天)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는 표현이어야 지극하다 할 것이다.

   “子絶四러시니 毋意, 毋必, 毋固, 毋我러시다.”
   공자는 네 가지의 마음이 전혀 없으셨으니, 사사로운 뜻이 없으셨으며, 반드시 해야 된다는 것이 없으셨으며, 고집함이 없으셨으며, 사사로운 나가 없으셨다.

   “子曰 君子不器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군자(君子)는 그릇이 아니다.”

 

2-2. 나는 마음 : 일상의 치유
   본래 텅 빈 마음에서 상황에 따라 갖가지 마음이 일어난다. 화가 나는 상황에서 화가 나고, 짜증이 나는 상황에서 짜증이 일어나기도 한다. 인지상정(人之常情)이란 말이 있듯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마음이 일어날 수 있다. 또는 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마음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일례로 파도가 치는 해변의 그림을 보고 어떤 사람은 행복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불행을 느끼기도 한다. 행복을 느낀 사람은 해변의 그림을 보고 가족 간의 지난 추억이 생각난 것이다. 반면 불행을 느낀 사람은 해변의 그림을 보자 바다에 빠져 죽은 사랑하는 사람이 떠오른 것이다. 그렇다면 그 해변의 그림이 우리에게 행복과 불행을 주는 것일까? 그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의 주체가 무엇을 경험했는가에 따라 다르게 일어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마주한 상황 때문도 아니고 더욱이 지금의 나의 탓도 아니다. 마치 콩을 심은 데 콩이 나고 팥을 심은 데 팥이 자라듯 내가 과거에 지은 바에 따라 때가 되어 그저 거둘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마음에 대해서는 다만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도덕적인 시비 판단을 통해 억압하거나 부정할수록 오히려 끌려가고 매몰되기 마련이다. 다만 끌리고 안 끌리는 대중만 잡아간다. 이것이 요령이다. 이에 해당되는 논어의 대표적인 구절은 다음과 같다.

 

   “子曰 君子有三戒하니 少之時血氣未定이라 戒之在色하고 及其壯也하여는 血氣方剛이라 戒之在鬪하고 及其老也하여는 血氣旣衰戒之在得이나라.”
   공자가 말하였다. “군자는 세 가지 경계하는 것이 있으니 어려서는 혈기가 정하여지지 않았는지라 경계할 것이 여색에 있고, 장성함에 이르러서는 혈기가 바야흐로 강성한지라 경계할 것이 다툼에 있고, 몸이 늙음에 이르러서는 혈기가 이미 쇠해졌는지라 경계할 것이 얻으려는 데있다.”

   “子曰 關雎樂而不淫하고 哀而不傷이니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시경(詩經)』 「관저편(關雎篇)은 즐거우면서도 지나치지 않고, 슬프면서도 상하지 않는다.”

   “顔淵死어늘 子哭之慟하신대 從者曰 子慟矣시니이다 曰 有慟乎非夫人之爲慟이요 而誰爲리오.”
   안연이 죽자, 공자께서 곡하시기를 지나칠 정도로 애통하게 하셨다. 따르는 자가 말하였다. “선생님께서 지나치게 애통해 하십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지나치게 애통함이 있었느냐?” 저 사람을 위해 애통해 하지 않고서 누구를 위해 애통해 하겠는가?”

 

2-3. 내는 마음 : 일상의 활용
   나는 마음은 상황에 따라 과거 지은 바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으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드리는 수용의 자세가 필요한 것이라면, 내는 마음은 각자가 주체가 되어 적극적으로 옳은 일은 죽기로써 실행하고 그른 일은 죽기로써 버리는 마음을 말한다. 여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원리가 있다. 바로 인과보응이다. 어릴 적 이야기의 교훈으로 자주 들었던 권선징악(勸善懲惡)도 이 원리의 다른 표현이다. 내가 짓고 내가 받는 인과의 원리에 따라 선을 짓는 마음으로 행복을 장만하고 악을 끊는 마음으로 불행을 방지하는 공부가 내는 마음의 핵심이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성현이 한결같이 말씀하신 가르침의 본의라고 할 수 있다. 이에 해당되는 논어의 대표적인 구절은 다음과 같다.

 

   “子曰 性相近也習相遠니라.”
   성품은 서로 비슷하나 습관에 의하여 서로 멀어지게 된다.

   “視其所以하며 觀其所由하며 察其所安이면, 人焉廋哉리오 人焉廋哉리오.”
   그 하는 것을 보며, 그 이유를 관찰하며, 그 편안히 여김을 살펴본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을 숨길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을 숨길 수 있겠는가?

   “子曰 爲善者天報之以福하고 爲不善者天報之以禍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은 하늘이 그에게 복으로 갚아주고, 착하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은 하늘이 그에게 재앙으로 갚는다.”

   “顔淵季路侍러니 子曰 盍各言爾志子路曰 願車馬衣輕裘與朋友共하여 敝之而無憾하노이다 顔淵曰 願無伐善하며 無施勞하노이다 子路曰 願聞子之志하노이다 子曰 老者安之하며 朋友信之하며 少者懷之니라.”
   안연과 계로가 공자를 모시고 있었는데, 공자께서 어찌 각기 너희들의 뜻을 말하지 아니하는가?” 하셨다. 자로가 말하였다. “수레와 말을 타는 것과 가벼운 갖옷을 입는 것을 친구와 함께 하다가 망가지더라도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안연이 말하였다. “자신의 잘하는 것을 자랑함이 없고 공로를 과시함이 없고자 하옵니다.” 자로가 선생님의 뜻을 듣고자 하옵니다.” 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늙은이를 편안하게 해주고, 붕우(朋友)에게는 미덥게 해주고, 젊은이를 감싸주고자 한다.”

 

3. 논어의 오래된 새 길
   『논어는 공자 사후에 제자들이 결집한 공자의 어록으로, 공자의 이상과 철학뿐만 아니라 춘추시대라는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공자와 그 제자들이 어떻게 마음을 사용하였는지에 대한 흔적들을 엿볼 수 있다. 그 흔적들은 인생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방법인 동시에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올바른 삶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논어의 구절구절마다 그 오래된 마음의 흔적들을 살펴보면서, 우리 역시 각자의 마음길을 어떻게 새로이 체현할 수 있을지 고민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각자에게는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길이 있을 것이고 앞으로 살아가고픈 길이 있을 것이다. 공자는 우리에게 따뜻한 마음길을 남겨 놓았다. 논어를 통해 공자의 마음길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또한 그 길 위에 서 있게 될 날이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공자의 마음길과 우리의 마음길이 둘이 아니고, 공자가 꿈꾸던 삶과 우리가 꿈꾸는 삶이 둘이 아닌 날이 다가오기를 바래본다. 공자의 오래된 길이 우리의 삶에 그런 새로움의 의미로 다가가기를 바래본다. 이것은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다. 누구나 마음은 있으니까.

   우리는 매 순간 깨어있을 권리가 있다.
   삶이 흔들릴 때마다 논어는 당신의 삶의 지침서가 되어주고 안내자가 되어줄 것이다. 그러니 두려워 말고 앞으로 나아가자. 그리고 나만의 살아있는 새로운 마음길을 만들어 가 보자.

박성호 교수(원광대학교 마음인문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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