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을 권하다' 코너의 원고청탁서를 봅니다. 내게 명작이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명작(名作)의 의미는 그 뜻만 놓고 보면 '이름난 훌륭한 작품'일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나에게 명작은 아직도 마음 적적할 때 찾아보는 작품으로 요약됩니다. 자코 반 도마엘 감독의 〈토토의 천국〉이나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시네마 천국〉 혹은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카모메 식당〉 같은 영화가 떠오릅니다.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어딘지 모르게 늘 한 끗이 부족해 보입니다. 오해를 줄이기 위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 끗이 부족한 영화는 역설적으로 영화를 감상하는 사람의 자유로운 사유의 시간을 허락해 줍니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자산어보〉 는 첫 장면부터가 무척 인상적으로 묘사됩니다. 화면 가득한 흑백의 영상 속에서 작은 돛단배가 하나가 마음 고요하게 넘실거리기 때문입니다. 이후 이야기의 전개는 마치 바둑 고수들의 바둑판을 보는 것처럼 빠르게 전개됩니다. 성리학과 실학의 수가 장면 곳곳에서 아슬합니다. 약용과 약전 두 형제가 주고받는 편지에서도, 흑산도 사람들의 정겨운 삶의 대화에서도, 그리고 주인공 창대와 약전의 긴장감 있는 감정선에서도 바둑 고수들의 '교차 착수'를 보는 것 같아 무척 흥미롭습니다. 특히 강진 백련사에서 약용의 제자와 약전의 제자가 서로 시 짓기의 자웅을 겨루는 장면에서는 '이 사람들 진짜 바둑을 두네' 하며, 혼자 킥킥거리기에 맞춤입니다.
 영화 속 흑산(黑山)의 세상은 표현 그대로 흑백의 바둑판으로 묘사됩니다. 본디 흑백의 세상은 평등할진 데, 영화 속 흑산은 그러지 못합니다. 흑산의 풍경이 아름다웠기에, 그 아름다움은 오히려 흑산의 짐이 됩니다. 독이 된 셈이지요. 흑산에는 바둑의 흑 돌만 남게 됩니다. 약전이 집필하는 어보에 '흑(黑)' 자를 쓰게 되면 해를 입지 않을까, 아웅다웅하는 스승 약전과 제자 창대의 모습 속에서 그 염려는 에둘러 표현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약전은 끝내 『자산어보』의 서문에 '자산은 흑산이다'라고 기록합니다. 세상은 어느 쪽으로 가든 흑산인 셈입니다. 끊임없이 성리학의 세상을 복기하던 창대가 끝내 흑산으로 되돌아오게 된 이유이기도 하지요. 뻔한 이야기지만, 파랑새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으니까요. 개인적으로 성게알의 흑과 백이 모여 파랑새의 색감으로 잉태되는 장면은 단연 압권 중의 압권입니다. 바둑으로 비유하면, 신의 한 수입니다.
 홍어에 대한 묘사도 인상 깊습니다. 실제 『자산어보』의 기록에 따르면 흑산의 어부들이 낚시를 통해 홍어를 잡게 되는 경우, 가끔 암컷의 몸에 가시를 박고 교합하는 수컷이 함께 따라잡히기도 한답니다. 이때 홍어의 성기는 어부들의 손에 의해 가차 없이 제거됩니다. '만만한 게 홍어 거시기'라는 말이 여러 문헌에서 곱 씹히는 이유이지요. 어쨌든 아무 쓸모 없는 홍어 수컷의 거시기는 영화 곳곳에서 '아랫도리'를 향한 아픈 복선으로 깔립니다. 홍어 장사꾼으로 살면서 첩을 통해 자식을 낳은 창대의 아버지나, 실제 세금으로 고통받는 사내가 관아에 찾아가 자신의 성기를 자르는 장면 혹은 창대와 창대의 부인이 물속에서 '깨 벗고' 유영하는 이미지는 홍어의 특징을 그대로 답습합니다. (번외. 창대의 부인이 '씹할놈아'를 입에 달고 살다가, 결혼 후 '여보'하는 장면은 우리에게 성리학의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금 되묻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정약전의 신앙에 대해서도 생각해 봅니다. 『자산어보』의 서문을 잠깐 들춰보면, "내가 섬사람들을 널리 심방하였다. 어보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말을 하기 때문에 이를 좇을 수가 없었다. 섬 안에 장덕순(張德順, 일명 昌大)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두문사객(杜門謝客)하고 고서를 탐독하나 집안이 가난하여 서적이 많지 않은 탓으로 식견이 넓지 못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차분하고 정밀하여 초목과 조어(鳥魚)를 이목에 접하는 대로 모두 세찰(細察)하고 침사(沈思)하여 그 성리(性理)를 터득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말은 믿을 만하였다."라고 기록합니다. '심방'과 '창대'라는 이름, 그리고 '믿음'의 의미가 담긴 서술 어미가 유독 눈에 띕니다. 표면적으로는 어보에 관한 기록이지만, 실은 『자산어보』는 정약전만의 신앙고백이 담긴 고백록은 아니었을까 하고 문학적인 상상력을 고루 동원해 봅니다.
 끝으로 영화 〈자산어보〉를 보면서 '오징어 먹물'에 대한 묘사가 애써 그리웠습니다. 이 영화의 한 끗이 부족한 부분입니다. 『지봉유설』에는 "오징어의 먹물로 글씨를 쓰면 해를 지나서 먹이 없어지고 빈 종이가 된다. 사람을 간사하게 속이는 자는 이것을 써서 속인다."라고 기록합니다. 정약전의 『자산어보』에도 "갑오징어의 먹물로 쓴 글씨는 먹빛보다 검고 윤이 난다. 시간이 오래면 종이 위의 글자가 날아가 사라진다. 허나 그것을 다시 물속에 넣으면 먹물 글씨가 홀연 되살아난다."라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비록 영화 〈자산어보〉에서는 이 장면이 구체적으로 형상화되지 않았지만, 약전이 남긴 『자산어보』 속 어딘가에는 그가 오징어 먹물로 꾹꾹 찍어 눌러 쓴 삶의 흔적이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숨 쉬리라 상상해봅니다.

 

김정배 교수(교양교육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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