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춘 / 사진 : 연세대 동은의학박물관
이영춘 / 사진 : 연세대 동은의학박물관

 

 2019년 11월에 처음으로 발생한 코로나바이러스는 2020년 1월부터 전 세계로 퍼지기 시작했다. 코로나19는 이후 수많은 확진자와 사망자를 기록했고, 현재까지 진행 중이다. 이처럼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보건은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나라의 보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쌍천(雙泉) 이영춘(李永春, 1903~1980)이다.
  최근 문화재청에서 이영춘이 기록한 3건(자혜진료소 일지, 개정중앙병원 일지, 농촌위생연구소 일지)을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한다고 발표하면서 이영춘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지고 있다. 이에 의료 혜택을 받지 못했던 농민을 위해 농촌에서 보건 향상에 힘썼던 이영춘의 삶을 조망하고자 한다.

훈도에서 의사로 선회하다
 평양고등보통학교에서 사범과 1년을 수료한 이영춘은 훈도(訓導, 일제 강점기에 초등학교의 교원을 이르던 말)가 된다. 첫 부임지인 별창보통학교에서 대구보통학교로 전근한 이영춘은 고향에서는 크게 의식되지 않았던 열악한 농민 환경을 목도한다. 고향에 비해 더운 지방이어서인지, 아니면 생활 습관이 달라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대구의 농촌 환경은 열악했다. 전염병이 자주 발생한 여름에는 질병에 의해 결석하는 학생이 많아졌다. 심지어는 이질로 인해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사실에 이영춘은 상당히 큰 충격을 받는다. 이후 이영춘은 학생들에게 주변을 잘 정리하고 몸도 깨끗하게 잘 관리하라고 당부하였다.
 훈도로 생활하던 이영춘은 습성늑막염에 걸려 장기간 요양을 하게 되면서 삶에 큰 변화를 겪는다. 이 시기에 이영춘은 의사라는 직업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의사의 한마디에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달라지는 모습을 보며, 의사도 훈도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는 것이라는 이치를 깨닫는다. 이후 학교에 사표를 제출한 이영춘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하며, 훈도에서 의사로 선회한다.
 이영춘은 연구와 실험에 몰두하며 기초 의학을 연구하는 의학자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의사가 되었으니 개업을 해서 형에게 받은 은혜를 갚고 사람의 도리를 지키라는 아버지의 당부에 황해도 평산온천 지방 공의(公醫, 보건 복지 가족부 장관의 명에 따라 특별한 의료 시책이 필요하거나 의사가 없는 지역에 배치되는 의사)로 부임한다. 평산에서의 생활은 이영춘에게 질병과 위생에 대한 무지가 얼마나 큰 불행으로 다가오는지를 다시 한번 일깨워주었다. 당시 농촌의 보건위생은 최악이었다. 평산의 열악한 보건위생 환경에 깊은 연민을 느낄 때마다 이영춘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에비슨 교장이 졸업사에서 언급했던 '병들어 고통받는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업은 병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구마모토와의 만남·진료소 생활
 공의 생활을 마치고 병리학 교실 조수로 일하던 때, 이영춘은 농장 전속 의사를 제안받는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이영춘은 전라북도 옥구군 개정면에 있는 구마모토(웅본) 농장에서 근무하기로 결심한다. 구마모토 농장은 군산에서 가장 큰 규모로 구마모토 리헤이가 운영한 곳이다. 구마모토를 만난 이영춘은 만약 자신이 5년 이상 근무하게 된다면 장기적으로 보건과 위생을 연구할 수 있는 연구소를 세워달라고 요청했고, 구마모토는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1935년 4월 1일, 이영춘은 구마모토와 약속한 날짜에 개정에 도착하여 진료를 시작했다. 이영춘의 진료 덕분에 구마모토 농장의 농민은 건강을 되찾았다.
 이영춘은 개정으로 돌아오기 전 지도교수인 윤일선 교수의 권유로 경도제국대학에 제출한 논문으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조선인 지도교수 밑에서 학위를 받은 경우가 한 번도 없었던 시기에 이영춘은 조선인 지도교수 밑에서 탄생한 조선인 의학박사 제1호의 영광을 누렸다. 학위를 취득했음에도 이영춘은 진료소 생활을 이어가며 농촌위생과 학교위생, 그리고 보건부(보건 요원) 설치라는 큰 틀을 잡고 세부적인 계획을 추진했다. 또한 이영춘은 '민족을 망치는 세가지 독한 병'을 기생충, 결핵, 매독이라고 판단하고 예방과 퇴치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질병에 대한 무지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이영춘은 고심 끝에 어린 학생을 대상으로 계몽했을 때 변화가 일어난다는 결론을 내리고 개정보통학교 교의가 되어 어린 학생의 생각과 습관을 바꾸기 시작했다. 

농촌위생연구소를 설립하다
 이영춘은 농장이 개장된 지 40년이 되는   1942년에 구마모토에게 6년 전 개정으로 내려올 때 약속했던 연구소 설립을 요구한다. 하지만 대동아전쟁으로 인해 사업수익의 8할이 세금으로 징수되는 상황이라서 연구소를 설립하기가 어렵다는 답변을 듣는다. 이영춘은 연구소 설립이 어렵게 되었으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사업계획을 더욱 구체화시켰다. 그렇게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고 1945년 8월 18일, 해방을 맞이한다. 이영춘은 해방된 조국에서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지 판단하기 힘들었다.
 그때, 구마모토가 떠난 농장의 직원이 찾아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결성한 '웅본농장자치회'의 위원장직을 이영춘이 맡아줬으면 좋겠다고 청했다. 이영춘은 진료소를 열고 진료를 계속 봄과 동시에 위원장직을 수락한다. 또한 농장에 남아 농촌위생과 보건을 책임질 농촌위생연구소를 열기로 다시 한번 다짐한다. 이영춘은 1948년 7월 1일 자신의 숙원인 농촌위생연구소를 설립한다. 이후 다른 부설 진료기관과 합병하여 농촌사회와 농민생활 전반에 대한 조사연구도 병행한다. 아울러 그는 농어촌지역 주민의 교육과 보건요원확보의 필요성을 확인하여, 1951년 개정간호학교, 1952년 화호여자중학교, 1961년 화호여자고등학교를 설립한다. 1957에는 농촌위생원 구내에 일심영아원, 1965년에는 일맥영아원을 설립하여 버림받거나 의지할 곳이 없는 영아의 양육에도 힘썼다.
 지병인 천식이 악화되어 1980년 11월 25일에 별세하기 이전까지 이영춘은 농민 보건 향상에 온 힘을 다했다. 그는 명성을 얻은 후 개업을 해서 안정적인 생활을 누릴 수 있었지만, 사회적 약자를 위해 평탄한 길을 뿌리쳤다. 또한 이영춘은 조선인 지도교수 밑에서 학위를 처음으로 받았음에도 학자로서의 길을 포기하고 묵묵히 농촌의 의료 발전을 위해 살아왔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는 예방의학의 선구자임과 동시에 공중보건의 개척자임에 틀림없다. 

〈참고문헌〉
*이영춘가옥 내부 게시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영춘>
*강찬민, 『이 땅 농촌에 의술의 불을 밝힌 쌍천 이영춘 빛 가운데로 걸어가다』, 푸른사상사, 2007.

박성호 교수(인문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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