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대학이 위치하고 있는 익산은 전통문화의 숨결이 도도히 흐르고 있는 도시이다. 그 중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은 유네스코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을만큼 가치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이들 유적들이 세계문화로 등재되기까지 우리대학 마한백제문화연구소의 역할과 노력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원대신문에서는 원광대학 개교 77주년을 맞아 미륵사지의 유래와 복원, 그 과정에서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업적과 향후 나아갈 방향에 대해 조명해 보았다. / 편집자

사진 : 현서진 수습기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미륵사지 조사의 첫 삽… 세계유산 등재에 한 몫

마백연구소- 익산의 백제문화 가치 규명의 '일등공신'
마백연구소- 지역문화 연구, 대학과 지역사회 상생모델

 익산시 금마면에 있는 미륵사지는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유산이다. 익산과 공주, 부여에 있는 백제문화유산 8건이 2015년 세계유산이 되었는데, 익산에서는 미륵사지와 왕궁리유적 2건이 포함되었다. 익산의 이 유산들이 세계유산에 등재되는 데에는 우리 대학의 부설 연구소인 마한백제문화연구소의 역할이 컸다. 왜냐하면 익산 백제문화유산의 세계유산 등재추진을 처음으로 제기한 곳이 연구소였고, 그 시작은 2006년 당시 소장을 역임하고 있었던 고고미술사학과의 최완규 교수의 제안이었다.
 당시에도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던 필자는 미륵사지 등 익산의 백제문화유산을 세계유산에 등재해 보자는 소장님의 의견을 들었을 때 부정적인 생각부터 들었다. 세계유산이라고 하면 말 그대로 세계에서 제일로 유명한 문화유산을 의미하는 것이며, 유네스코가 여러 단계의 심사를 거쳐서 선정하기 때문에 그 관문을 통과한다는 것은 어림없는 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미륵사지, 세계유산이 되다
 등재 추진을 시작한 2006년 말 당시 미륵사지는 1,400여년이나 된 절터였기에 백제 당시에 만들어진 것이라고는 미륵탑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허허벌판의 절터였다. 미륵사의 옛 영광을 보여주는 미륵탑 마저도 새로운 단장을 위하여 해체되느라 닷집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랬기에 미륵사지가 중요한 것은 인정하지만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유산으로 만들자고 하는 의견에는 전혀 동의할 수가 없었다. 상상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꼭 10년이 흐른 뒤인 2015년 7월, 보무도 당당하게 미륵사지는 왕궁리유적과 함께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그것도 백제유산이라면 누구나 첫손으로 꼽고 있던 부여의 백제유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10여년 전 얼토당토 않다고 생각했던 꿈은 현실이 되었다. 
 그 후 세계유산이 된 미륵사지의 경내에는 국립익산박물관이 세워졌으며, 작년 9월부터 10월까지 한 달 동안 개최되었던 '익산 미륵사지 세계유산 미디어아트 페스타'에는 8만 여명의 관광객이 다녀가는 성황을 이루었다. 세계유산 등재를 꿈꾸었던 20년 전만하더라도 허허벌판 미륵사지를 누가 보러오겠어 하던 예상은 멋지게 빗나갔고, 이제는 익산의 관광명소가 되었다. 특히 코로나를 거치면서 사람들이 밀집되어 있는 장소를 피하다보니 미륵사지를 찾아오는 관람객이 늘어났고, 한번 두 번 오다 보니 힐링이 필요한 요즈음, 제격의 나들이 장소가 되었다. 
 미륵사지가 그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아서 세계유산에 등재되고 사람들의 즐겨 찾는 관광 명소로 거듭나게 되기까지에는 마한백제문화연구소의 노력을 간과할 수 없다. 
 2006년 세계유산 등재 추진 시작 이후 연구소는 익산시와 손을 잡고 익산의 백제문화가 지니고 있는 가치를 규명하고 시민들에게 알리는 작업을 부지런히 하였다.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끌어내기 위하여 익산역사유적지구 세계유산 등재추진위원회를 조직하였고, 공무원, 시의원, 서비스직 종사자, 학생, 시민 등을 대상으로 수많은 시민교육과 현장답사를 진행하였으며, 연구보고서의 발간과 학술회의 개최를 통해 익산 백제문화의 가치를 찾아내고 알리는 데에 힘을 쏟았다.

세계유산등재 4차 회의 장면
세계유산등재 4차 회의 장면

 물론 미륵사지가 세계유산에 등재되는 데에 일등공신 역할을 한 것은 2009년 미륵사지 석탑의 해체과정에서 발견된 사리자엄구이다. 사리장엄구에 포함되어 있던 <금제사리봉안기>는 미륵사지 석탑이 백제 무왕대인 639년에 조성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봉안기에 새겨진 '백제(百濟)' '기해(己亥)'라는 글자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동안의 조사와 연구를 통하여 미륵사지가 백제 무왕 때에 만들어진 사찰이라고 하는 데에는 대부분 동의하였으나 무왕 때에 만들어졌다고 하는 사실을 입증할 만한 결정적인 기록이 부족한 상태여서 약간의 아쉬운 점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런데 1,400년 전 탑이 세워지던 당시에 제작되어 탑 속에 넣어진 사리봉안기가 발견됨으로써 미륵사가 백제 때에 조성되었다고 하는 진정성을 확실하게 뒷받침해 주었다. 
 세계유산으로 지정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건은 추진 유산이 지니고 있는 진정성과 완전성, 탁월한 가치를 입증해야 하는 것이다. 미륵사지 석탑 해체 과정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가 탑과 절터의 진정성을 입증해 주었던 일등공신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미륵사의 모든 가치를 입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미륵사지와 왕궁리유적이 세계유산에 등재되는 데에는 연구소의 공이 매우 컸다고 말할 정도로 연구소는 2006년 재추진을 시작한 이후, 유산의 가치를 찾아내고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쉼 없이 달려왔으나 이러한 노력이 미륵사지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데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도 말할 수 없다.
 말하자면 미륵사지가 오늘날 세계유산이 되고 사람들이 찾아오고 싶어하는 관광 명소가 되기까지에는 보다 근원적인 노력, 즉 유적의 실상과 가치를 찾기 위해 조사에 매달렸던 시간들이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1980년대 초반 이후 시행되었던 오랜 기간의 발굴조사와 연구 덕분에 미륵사지와 왕궁리유적은 세계유산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미륵사지는 1980년부터 1994년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미륵사지는 백제 사비기에 조성된 삼원병립식의 매우 독창적인 가람형식을 지닌 절터이며, 백제를 지나 통일신라, 고려, 조선 중기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던 천년 고찰 터였음을 규명해냈다. 

미륵사지 조사의 첫삽을 뜨다
 왕궁리유적 또한 1989년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한 이래  30여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정전건물지를 비롯하여 정원, 후원, 궁궐 담장, 문지, 공방, 화장실, 부엌 등 백제 사비시기 익산에 조성되었던 왕궁의 많은 것들을 밝혀냈다. 물론 미륵사지와 왕궁리유적의 조사는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사실 이들 유적에 대한 조사가 처음 시작된 것은 1970년년 중반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연구소는 1974년과 1975년에 미륵사지 동탑지 및 서탑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으며, 1976년 11월 왕궁리유적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미륵사지와 왕궁리유적에 대한 학술조사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미륵사지 동탑지 1차발굴조사(1974)
미륵사지 동탑지 1차발굴조사(1974)

 1974년 12월의 『마한백제문화』 창간호에 실린 <익산 미륵사지 동탑지 및 서탑 조사보고서>의 발간사에서 박길진 총장이 "조사에서 백제 녹유와당이나 풍탁을 발견한 것은... 미륵사지가 지닌 여러 가지 문제점을 밝히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조사 성과를 밝히고 있듯이 처음으로 실시한 연구소의 미륵사지 조사는 미륵사의 가치를 규명해 나가는 첫걸음이 되었다.
 연구소가 이렇듯 익산의 백제유적 조사에 노력을 기울일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은 익산의 시민들이었다. 1970년대 초반, 익산 상공회의소의 임원들이 원광대학교 총장을 찾아와 금마면에 소재한 문화유산들이 갈수록 훼손되어가고 있는데 지역 대학이 솔선하여 이를 막을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고 당부하였다. 시민들의 이와같은 요청이 단초가 되어 1973년 10월 김삼룡 교수를 소장으로 하여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설립되었고, 그로부터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1974년 8월 처음으로 미륵사지 동탑지 조사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문화가 자원이 되는 시대로 세상의 흐름이 바뀌어 문화유산을 세계유산에 등재하려는 각지의 관심이 높아진 지금, 먹고살기에도 팍팍했던 70년대 초반 그 시절에 미륵사지에 관심을 두었던 눈 밝은 지역의 시민들이 없었더라면, 지역 주민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마한백제문화연구소를 개설하고 지역의 문화에 관심을 기울이는 대학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그리고 연구소 개소 1년여 만에 미륵사지와 같은 역사적 현장을 발굴조사해 보겠다는 용감한 결정을 내리는 김삼룡 소장을 비롯한 연구소 연구자들의 추진력이 없었더라면 세계유산 미륵사지의 오늘은 없었을까 한다.
 오는 10월이면 연구소가 문을 연 때로부터 꼭 50년이 된다. 지방대학의 연구소로서 5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연구소는 그리 많지 않다. 게다가 지역의 문화유산 연구에 선구자 역할을 하고, 지역의 문화유산이 세계에 빛나는 유산으로 거듭나게 하는 데에 일역을 다 하는 연구소는 더더욱 드물다. 어쩌면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대학과 지역사회가 어떠한 방식으로 상생해 가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연구소는 향후 50년을 또 어떠한 모습으로 상생해 갈까. 여전히 오늘도 기대 중이다.

문이화 교수(마한백제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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