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 왕궁리유적지

'왕궁리유적' 계획적 조성된 백제 말기 왕궁

하늘에서 바라본 익산 미륵사지 / 사진 : 익산시

 미륵사지에서 남쪽으로 직선거리로 5km 즈음 떨어진 왕궁리(전북 익산시 왕궁면 궁성로 666)에는 또 하나의 백제 유적지인 왕궁리 터가 있다. 왕궁리유적은 백제 무왕 때인 639년에 건립된 유적지로, 전북 익산시 왕궁면에 위치하며, 백제 말기 정치·경제·문화 중심지였던 왕궁이 있다. 
 백제 왕궁은 용화산에서 발원한 능선 끝자락의 낮은 구릉 위에 조성됐다. 지난 1989년부터 전면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내용에 의하면, 백제 말기 왕궁으로 조성돼 일정기간 사용된 후 왕궁의 중요 건물을 철거하고 탑과 금당, 강당 등 사찰이 들어선 복합유적이다.
 왕궁리유적의 왕궁은 백제왕궁으로서는 처음으로 왕궁의 외곽 담장과 내부구조가 확인돼 체계적이고 계획적으로 조성된 백제왕궁의 구조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유적이다. 왕궁의 외곽에는 폭 3m의 담장을 동서 245m, 남북 490m인 장방형으로 두르고 있다. 왕궁의 남측 절반은 국가의 중요 의례나 의식을 행하던 건물, 왕이 정사를 돌보던 건물, 왕과 왕의 가족의 생활을 위한 건물들이 4개의 동서석축을 쌓아 구분·배치됐다. 북측 절반은 왕의 휴식을 위한 공간인 정원과 후원, 왕궁의 서북 측에는 백제시대 가장 귀중품인 금과 유리를 생산하던 공방지가 위치하고 있다.
 이와 같이 왕궁의 남측에 의례나 의식, 정무, 생활을 위한 공간을 배치하고, 북쪽에 후원을 배치하는 것은 고대 중국이나 일본 왕궁에서도 확인되고 있어 당시 고대 동아시아 국가 간의 문화 교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은교 기자 dldmsry11002@wku.ac.kr

 

대왕묘와 소왕묘- 무왕 쌍릉

쌍릉이 품은 그날의 이야기

 어느 지역이든 당시의 역사를 들어볼 수 있는 유물이나 유적지가 있기 마련이다. 특히 우리대학이 위치하고 있는 익산에는 사적 제87호인 '익산 무왕 쌍릉(이하 쌍릉)'이라는 유례 깊은 유적 고대 유적지가 존재한다. 쌍릉은 백제 시대에 제작된 걸로 전해지며, 내부 구조는 백제 후기 굴식돌방무덤이며, 무덤의 봉분과 돌방의 크기가 큰 북쪽의 '대왕묘'와 남쪽의 작은 것을 '소왕묘'로 나눠져 있다. 게다가, 모두 원형의 봉토무덤으로 흙을 높이 쌓아 만든 봉분까지 있다는 특징이 있다. 1916년 일제강점기, 조사 당시만 해도 이미 도굴이 돼 유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대왕묘 안에서 나무로 만든 관이 일부 발견돼 원래 모습대로 복원을 할 수 있게 됐다. 
 쌍릉에 묻혀 있는 인물은 직접적인 건 아니지만 뼈에 대한 분석과 문헌 및 고고학적 정황들을 종합했을 때 묻혀있던 당시 인물을 가늠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해당 유적지는 높은 가치를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이 유적지가 주목받는 또 다른 근거가 있다. 피장자로 추정되는 인물이 '삼국사기'로 널리 알려진 백제의 '무왕(서동)'과 그의 아내 '선화공주'라는 것이다.
 관련 사료를 살펴보면 해당 무덤에서 밤에 불빛이 춤을 추며 돌아다니는 광경이 목격됐고, 목격한 마을 여성 중엔 아이를 낳은 이들이 허다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마을 유지들이 무왕과 선화공주의 조화라 여기고 이 둘을 피장자로 여겼다고 기록돼 있다. 물론, 이는 추정인 만큼 확실치 않기에 지난 2019년에 재발굴 조사에 들어갔다.
 이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 따르면 '각고의 조사 끝에 쌍릉의 피장자 중 한명은 백제 무왕이 맞다'며 사실상 이 논란의 서사를 결론지었다. 하지만, 다른 무덤인 '소왕릉'에 피장돼 있는 인물에 대해선 정말 선화공주인지 밝히지 못해 현재까지도 조사 중으로 전해졌고, 쌍릉은 지금까지도 반쪽자리 진실을 품은 신비로운 유적지로 남게 됐다.

익산 무왕 쌍릉 / 사진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이민서 기자 leeminseo1207@wku.ac.kr
 

가장 오래된 호수?- 황등호

황등호 복원, 익산 자긍심과 미륵사 위상 재정립

황등호수와 나룻배의 모습(1923) / 사진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황등호는 미륵산을 중심으로 한 물길을 막아서 형성한 호수였다. 조선시대 대표적 문헌인 『문헌비고』에선 '황등호(湖)'를 '구교호(龜橋湖)'(요교호 또는 황등호)라 칭했고, 호의 둘레가 약 9.82km에 이른다고 명시돼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의 조사 자료인『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의하면, "1923년에 용산성(황등 용산리에 있는 옛 산성)의 석재를 빼 황등제 수축에 이용했다"고 밝혀졌다. 지금은 논으로 변했지만, 100년 전만 해도 그곳이 거대한 저수지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935년 완주군 운천면에 경천 저수지가 신설되고 이후,황등호는 불용시설이 됐고 저수지 바닥까지 현재 논으로 개답해 활용되고 있다. 
 우리대학에서 강경으로 넘어가는 길, 국도 23호선을 지나다 보면 탑천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나온다. 이를 '허리다리'라고 하는데, 그 안쪽으로 요교호가 존재했으며, 그것을 가로지르는 제방(뚝)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다리 옆에 황등제의 존재를 입증하는 요교비가 세워져 있다. 요교비는 일제강점기 황등호 수축 공사를 하던 중 발견된 비석으로, 옛비석과 석좌대로 나뉜다. 옛비석엔 1780년(정조 45년) 무너져 내린 제방을 수축하는 공사와 교량을 가설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고, 1991년 재건한 좌대엔 발굴과 재건 과정이 자세히 적혀 있다. 이를 통해 폐호돼 논으로 바뀐 황등호의 역사적 의미를 되돌아볼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로 평가받는 것은 김제 벽골제였으나, 익산의 황등제가 먼저 축조됐다는 학계의 주장도 나왔다. 황등제의 축조 시기가 기원전 3세기로 추정된다는 연구결과가 나온 것인데,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330년에 축조된 벽골제보다 600년 앞선  것이 돼 한국 최초의 저수지가 되는 셈이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일 수도 있다는 가설을 내릴 수 있다. 또한, 황등호는 백제 중엽 3대 호수로 호서지방을 구분하는 큰 역할을 했으며, 호남의 호(湖)가 황등호에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다.
 이러한 의의가 있는 황등호를 다시 복원하기 위한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황등호를 복원함으로써 미륵사 창건사와 역사적인 맥락을 함께한다는 의식을 고취할 수 있고, 백제고도지역으로써의 역사적 자긍심과 미륵사의 위상을 재정립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조혜연 기자 yeonsop321@wku.ac.kr

 

건축문화대상- 국립익산박물관

각종 백제 시대 유물 전시… '타임 레이어'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에 위치한 국립익산박물관은   1997년 개관해 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다가 2019년 '국립익산박물관'으로 변경했고,       2020년 증축해 재개관했다.
 박물관은 지상1층, 지하1층으로 지어진 건물에 상설전시실 3개와 기획전시실 1개로 구성돼 있으며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유물을 중심으로 백제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의 유물 총 소장품 1만 9천점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실은 중앙홀, 개요실, 유물실, 불교미술실로 나뉘어 있으며 중앙홀은 미륵사와 미륵사지석탑에 대한 설명, 개요실은 미륵사의 창건과 변천과정, 유물실은 미륵사 건립 이후 천년간의 불교 유물들로 구성돼 있다.
 첫인상으로 보자면 건물인지 공원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입구로 들어가 전시 공간을 둘러보니 분명한 박물관이지만, 관람을 마치고 나와 뒤돌아보면 건물은 보이지 않는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 지하로 파고들어 설계돼 위에서 내려다보면 약간의 경사로를 포함한 그저 넓은 대지처럼 보인다. 하지만 덕분에 바로 옆 세계문화유산 '익산 미륵사지 터'는 인위적인 건축물의 시각적 방해 없이 이곳을 찾는 누구에게나 옛 고귀함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다.
 특히 미륵사지 터에 남아 있는 두 개의 석탑과 주변을 둘러싸는 용화산, 남측 연못이 유려하게 어우러지는 바로 옆에 위치해 있으며, 박물관에 보관된 각종 백제 시대 유물에는 무왕과 선화공주, 왕비로 추정되는 귀족의 딸과 얽힌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처럼 뚜렷한 특색과 문화유산에 대한 세심한 배려 덕분에 익산박물관은        2020년 건축문화대상 본상(국무총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국립익산박물관을 건축한 유선엔지니어링 신유진 대표는 "'흔적을 발견하는 공간', '시간을 찾아 들어가는 공간', '공간 역사의 시간과 만나는 공간', '시간의 켜가 겹쳐진 공간'으로 구현하고자 했고 이것을 '타임 레이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자 했다"고 설명한다.

국립익산박물관 / 사진 : 서혜주 수습기자
국립익산박물관 / 사진 : 서혜주 수습기자

배성민 기자 aqswdefr3331@wk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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