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5월 18일은 5.18광주민주화운동 43주년을 맞는 뜻깊은 날이다. 5.18하면 우리대학 한의과대학 본과 2학년에 재학 중 전남도청 앞 시위에 참석했다 개엄군 발포로 사망한 임균수 열사가 떠오른다.
   〈원대신문〉에서는 임 열사 후배들이 기고한 5.18관련 글을 매년 게재하면서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의미를 새겨보고 있다. /편집자

박정희 서거와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가 쏜 총에 맞아 죽음을 맞이한 날이다. 이 날은 18년간 이어졌던 박정희 전대통령의 폭압정치가 끝이 났음을 알리는 날이기도 하다. 우리 국민들은 새로운 세상 즉, 박정희 정권 20여년 간 이루지 못했던 민주주의 사회가 곧 도래될 것임을 기대하고 있었다.
 사실 이전부터 이런 양상은 일부 사회 중심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유신시대의 폭압적인 정치에 억눌려왔던 국민들은 1970년대 후반에 이르자 특히 대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실제로 박정희의 유신 독재 체제를 반대하며 일어났던 부마항쟁이 그랬으며, 10.26사건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됐던 민주화운동이 그랬다. 이처럼 국민들은 민주주의 사회가 실현되기를 갈망했다. 하지만 1979년 12월 12일 당시 국군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키며, 결국 민주주의의 실현은 물거품이 돼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말았다.

전두환 신군부의 쿠데타, 민주주의 물거품
 하지만 국민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 속 구절과 같이 '인간은 파멸 당할 수는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는 법'이기에 그들은 목숨이 위험에 노출되는 순간조차도 겁먹지 않고 민주주의를 향해 달리고 싸웠다.
 1980년 봄에는 신군부 세력에 반발하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시민들의 시위가 계속됐고, 이에 위협을 느낀 신군부는 5.17 비상계엄을 선포, 전국적으로 확대했다. 
 한편, 전라남도 광주에서도 비상계엄확대 소식이 시민들의 귀에 들리게 됐고, 다음날인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교문 앞에 대학생 200여명이 전국적인 시위에 동참하는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이때 공수부대가 투입돼 시위대를 향한 과잉 진압에 나서면서, 이로 인해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학생들은 시위장소를 광주 도심지로 옮겨 확산시켰고, 공수부대는 이에 맞서 곤봉과 대검 등을 이용해 이들을 무자비하게 살상했다. 한편 공수부대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민주화를 외치며 거리에 나온 광주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적인 폭력을 가했고, 시위와 무관한 시민들에게까지 진압봉을 사용하는 강압·반인륜적인 행위를 벌였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6.10 항쟁으로 이어져
 19일부터 계엄군은 실탄사격과 조준사격, 탱크를 통한 무력 진압을 가했다. 한편 계엄군의 잔혹한 행위에 분노한 광주 시민들이 시민군을 조직해 무기를 들고 시위에 동참, 계엄군에 대항했으며 이때부터 27일까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 및 확산된다.
 계엄군의 무력 진압으로 많은 사망자와 사상자를 남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결과는 결국 실패로 끝이 났다. 이후 신군부 세력이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광주시민들은 패배하지 않았다. 광주 시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과 외침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져 다시 민주주의라는 꽃을 피우기 위한 씨앗으로 자리매김했다. 6월 민주항쟁은 전두환 정권의 말로를 확인하면서 오늘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새롭게 각인시키고 있다.
 한편, 지난 3월 31일 전두환의 손자 전우원 씨가 영령들에게 사죄의 뜻을 표하고자 광주 국립 5.18민주묘지를 방문, 유가족 및 피해자와 만났다. 이전까지는 없었던 행보로 인해 5.18이 안겨준 갈등과 상처는 옅어져 갔고, 용서와 화답은 진하게 물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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