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할 기억, 잊지 말아야 할 것들

 필자는 평범한 집에서 평범하게 자라 과학을 좋아하고 역사를 싫어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그저 지루해서, 중학교 때는 다른 공부가 더 재미있어서, 역사라는 과목은 시큰둥하게 바라봤었다. 그런 내 세상이 조금 달라진 것은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부터였다. 우리학교는 신기한 전통이 있었는데, 1학년 수련회 장소가 꼭 광주였다. 광주시에 있는 모 청소년 수련원에서 수련회 일정을 마치고 나면 의례적으로 마지막 행선지는 바로 광주 5.18 묘지 방문이었다. 우리들은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평소 책 속의 따분한 지식정도로 여겨졌던 1980년 5월 광주의 생생한 현장 모습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글로만, 숫자로만 접했을 때 느끼지 못했던 다양한 감정들과 우리들이 몰랐던 1980년 5월 광주 사람들의 외침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비로소 현재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가 그들의 희생이 쌓이고 쌓여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그제야 실감했다. 
 故 임균수 열사에 대해 처음 알게 된 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5월, 아마 봄이 지나고 여름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계절이었을 것이다. 평소에도 다양한 퀴즈를 즐겨 내셨던 교무님께서 그날도 새로운 퀴즈를 내셨다.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 학생이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사람이 있다. 아마 교정을 돌아다니면서 종종 마주치기도 했을 것이라 하시면서 한번 맞혀보라"고 하셨다. 허준, 총장님, 학장님 등 다양한 답이 나왔지만, 아무도 답을 맞히지 못했다. 그때 교무님께서 임균수 열사의 추모비 사진을 보여주셨다. 교무님은 "임균수 열사는 여러분과 같은 한의과대학 학생이었고, 민주화운동이 한창이었던 1980년 5월에 공주에서 돌아가셨다"며, "학생회관 앞에 추모비가 있으니 한번 찾아가 보면 의미가 있을 것이다"고 설명해주셨다. 그때만 해도 대학생들은 다들 어른인 줄 알았을 때니, 그저 '멋있는 선배가 있구나'라고 생각했었다. 막연히 우리대학 선배님들 가운데서도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신 분이 계시는 구나. 그렇구나, 정도였다. 
 이제 필자도 민주화운동 당시의 故 임균수 열사와 같은 본과 2학년이 되었다. 본과 2학년, 4년째 대학을 다니고 있는 성인이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아직 어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선배, 후배, 동기들과 함께 학교에 다니고, 울고 웃으며 생활했을 故 임균수 열사의 모습을 상상해보면서 이 땅에서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던 많은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나는 과연 그들처럼 그러한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평범한 이들이지만, 그들이 낸 용기와 목소리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점심 메뉴를 고를 때, 반장을 뽑을 때, 대통령 선거에서, 일상생활 속에서도 다분히 우리는 민주주의를 누리며 살고 있다. 선배님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다고, 당신께서 바라던, 이제는 민주주의가 당연한 세상이 왔다고 소리치고 싶다. 또, 정말 많이 감사하다고, 당신의 희생을 우리가 기억하겠다고 전하고 싶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외쳤던 많은 목소리에 보답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초록이 몰려오는 5월, 그들을 기억하고, 떠올려 보자. 평범한 이들이 나아가 외쳤던 소망을 기억해 보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정예린(한의학과 본과 2년)
 

 


그해 오월은 지났어도 정신은 여전히 내려와

 눈 내린 들판을 걸어갈 제(踏雪野中去) / 발걸음을 함부로 어지러이 걷지 마라(不須胡亂行)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今日我行跡) /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遂作後人程).

 이 시는 故임균수 열사가 생전에 가장 좋아했던 시인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라고 한다. 애송하는 시의 내용처럼 그는 민주주의의 이정표가 되었고, 그의 희생 역시 우리에게 자유를 누리게 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게 해주었다. 그림을 그릴 때, 새하얀 도화지에 첫 점을 찍는 것이 가장 어려운 것처럼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겠다고 마음을 다잡고 발을 떼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을까?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민주화를 위해 내디뎠던 그의 올곧은 발걸음은 훗날 민주주의의 이정표가 되었고 지금 우리는 그 발걸음을 따라 걷고 있다. 
 1980년 5월 21일, 당시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 본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故임균수 열사는 계엄군의 발포로 인해 전남도청 앞에서 총상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집회에 참석한 후 계엄군의 철수를 약속받기 위해 들뜬 채로 기다리고 있던 그와 다른 시민들에게 돌아온 건 총탄 세례였다. 그렇게 오랜만에 가족들을 보기 위해 광주에 왔던 그는 영영 가족들을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좋은 동생이자 아들이었던 故임균수 열사는 그렇게 하늘의 별이 되었다. 
 교과서, 미디어 등을 통해서 우리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많이 접해보았고, 이에 관해 나름대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시험 성적을 올리기 위해 어떤 시간 순서로 5·18 민주화운동이 진행되었는지 외우고 있는 학생도 많을 것이다. 
 한국사를 좋아했던 나 역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라는 제목의 책을 읽으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5·18 민주화운동은 민주화를 열망하던 집단이 이루어낸 하나의 큰 사회적 사건이지만, 그 집단 역시 개개인으로 이루어져 있단 것을 깨달았다. 이 사건으로 희생되셨던 분들은 우리 주변에 존재하셨던 분들이며 그들도 누군가의 가족이었고, 여전히 가족들은 그들을 많이 그리워하고 있다. 이를 깨닫고 나니 5·18 민주화운동의 희생자들뿐 아니라 가족들의 희생 역시 느껴지며 지금의 자유가 마냥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의 나보다 어린 나이였던 故임균수 열사가 시위에 나섰을 때의 마음가짐, 민주주의를 이루어내겠다는 열망은 감히 헤아리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故임균수 열사가 평소 좋아했던 '한가족, 한마음, 우리'라는 말의 가치를 알고 실현하고, 뒷사람들을 위한 이정표가 되는 것이 우리 후배들이 이어나가야 할 정신이자 목표가 아닐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하였다. 누군가의 이정표가 됨과 동시에 그동안의 많은 분들께서 걸어와 주신 발자국을 뒤돌아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한다.
 어느덧 따스한 봄바람이 불어와 우리를 안아주는 계절, 5월이 왔다. 우리대학 교정의 한복판에서 늘 원광인과 함께하고 있는 故임균수 열사, 푸르른 캠퍼스를 거닐며 이 봄이 어떻게 찾아왔는지를 한 번쯤 생각해보길 소원한다.  

 

조소연(한의학과 본과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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