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형당하기 직전의 해월 최시형
처형당하기 직전의 해월 최시형

최제우의 시천주적 인간관
 지난 9일과 10일 동경대학에서 열린 "제3회 존엄학 심포지엄"에서 강연을 했다. 이번 심포지엄에서 나에게 주어진 역할은 "한국철학의 인간관"에 대해서 1시간 동안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주저없이 최시형(崔時亨)의 인간관을 소개하겠다고 하였다. 최시형(1827~1898)은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1824~1864)의 제자로,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 교단의 최고 지도자였다. 이하에서는 이날 발표한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동학(東學)은 '동방의 학문'이라는 의미로, 지금으로 말하면 '한국철학'에 해당한다. 경주 지방의 지식이었던 최제우는 서양과 일본 세력의 위협을 느끼고 1860년에 종래의 유학(儒學)을 대신하는 새로운 철학으로 '동학'을 제창하였다. 최제우의 동학이 조선의 유학과 가장 다른 점은 인간에 대한 새로운 규정에 있었다. 최제우는 모든 사람은 자기 안에 하늘님을 모시고 있다는 의미에서의 '시천주(侍天主)'라는 인간관을 제창하였다. 
 시천주의 인간관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자기 안에 '하늘님'이라고 하는 또 다른 인격체를 모시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인간은 나 혼자만으로 이루어진 '개인'이 아니다. 그리고 하늘과 무관한 세속화된 존재도 아니다. 나와 하늘님이 합쳐진 '하늘사람'(天人)이 진짜 나이다. 그래서 누구나 존엄한 존재로 대접받을 권리가 있다. 비록 나이나 성별, 부귀나 재능은 각각 다르지만 하늘님을 모시고 있다는 점은 모두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최제우가 동학을 제창하자마자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노비 2명을 각각 수양딸과 며느리로 삼은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최제우를 이은 최시형은 시천주의 인간관을 여자나 어린이와 같은 사회적 약자는 물론이고, 인간이 아닌 비인간 생명체에까지 확장시켰다. 그래서 "만물은 하늘님을 모시고 있다"고 하는 '만물시천주'의 인간관을 주창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유명한 설법을 남겼다.

 "저 베틀짜는 아낙네도 하늘님이다." 
 "어린 아이를 때리는 것은 하늘님을 때리는 것이다."
 "사람이 오거든 '사람이 왔다'고 하지 말고 '하늘님이 강림하셨다'고 말하라."
 "저 하늘을 나는 새소리도 하늘님의 소리이다."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들 수 있다. 인간 이외의 생명체도 하늘님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육식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또는 자연세계에서 사자가 토끼를 잡아먹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것은 하늘님을 먹는 잔인한 행위가 아닌가? 이에 대해서 최시형은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는 의미의 이천식천(以天食天)이라고 답하였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항상 만물이 하늘이고 만사가 하늘이라고 말했다. 만약에 이것을 인정한다면 만물이 "하늘이 하늘을 먹는" 것이 된다.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는 말은 일견 이치에 맞지 않는 것처럼 들리지만, 그것은 인간의 편협한 시점에서 보기 때문이다. 하늘 전체로 보면 하늘이 하늘을 기르기 위해서 같은 부류끼리는 상호부조로 기화(氣化)를 이루게 하고, 다른 부류끼리는 "하늘이 하늘을 먹어서" 기화(氣化)를 통하게 하는 것이다. 양자는 "하늘이 하늘을 기르는" 기화 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서 최시형은 '기화'라는 동아시아의 핵심 개념을 가지고 "하늘이 하늘을 먹는" 현상을 설명한다. '기화'는 지금은 "액체가 기체로 변화는 현상"을 말하지만, 19세기까지만 해도 동아시아 문헌에서는 이 세계의 모든 변화를 지칭하는 개념이었다. 가령 밤낮이 교체되거나 사시가 운행하는 현상을 기화라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최시형은 먹고 먹히는 포식(飽食)과 피식(被食)의 관계도 '기화'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인도 출신의 생태운동가 반다나 시바는 "인간 경제는 화폐를 교환하지만 자연 경제는 생명(life)을 교환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내 생각에 최시형이 말하는 "하늘이 하늘을 먹는" 기화란 바로 이러한 관계를 말하는 것 같다. 즉 토끼가 풀을 먹으면 풀에 있던 기(life)가 토끼에게 이동하여 토끼의 생명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토끼를 다시 사자가 먹게 되면 이번에는 토끼에 있던 기(life)가 사자에게 옮겨져서 사자의 활동 에너지로 변화되는 것이다. 이처럼 무언가를 먹는다는 행위는 '생명에너지(=기)의 이동'에 다름 아니다. 이것을 최시형은 "하늘이 하늘을 기른다"고 한 것이다. 즉 개체생명의 차원에서는 죽음이지만, 전체생명의 차원에서는 기르는 행위라는 것이다.  

내가 하늘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런데 여기에서 다시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인간이 먹는 모든 행위는 다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고 볼 수 있을까? 동물들의 세계에서 토끼가 풀을 먹거나 사자가 토끼를 먹는 행위는 자연의 섭리에 해당하는 자연스런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동식물과 달리 무한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배가 불러도 계속해서 먹으려 든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고전적인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에 나오는 가오나시(얼굴없는 괴물)를 연상하면 쉽다. 목욕탕에 들어온 가오나시는 닥치는 대로 보이는 것을 집어삼켜 버린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상징적으로 그린 대목이다. 이런 괴물을 과연 우리는 '하늘'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 그래서 최시형은 묻는다: "과연 우리는 스스로를 하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해 보면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는 명제는 편의상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하늘이'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을'이다. '하늘이'는 내가 하늘이 될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묻고 있고, '하늘을'은 내가 먹는 음식을 하늘로 대할 자세가 되어 있는가를 묻고 있다. 최시형은 평소에 음식을 먹을 때 하늘님에게 고하는 식고(食告)나 심고(心告)를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 앞의 음식을 단순한 고기가 아니라 하늘이 하늘을 기르기 위한 희생이자 증여로 생각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는 '하늘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나도 언젠가 시간이 되면 하늘이라는 주어 자리에서 물러나서, 다른 하늘을 위해 자신의 몸을 내주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호주의 생태철학자 발 플럼우드가 지적했듯이 "생명이란 지구도서관에서 100년 동안 빌린 대출 도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길어야 100년이 지나면 우리의 생명에너지는 다하고, 미생물의 먹이가 될 것이다. '하늘이'의 위치에서 '하늘을'의 위치로 자리가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 또한 "하늘이 하늘을 기르기 위한" 자연스런 과정의 하나이다.
 이런 내용의 기조강연이 끝나고 청중으로부터 질문을 받는 시간이 40분간 이어졌다.유교를 전공하시는 어느 교수님께서 이런 질문을 하셨다.
 "유학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동학의 철학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동학이 한국 근대에 어느 정도 기여를 했는지 궁금합니다. 지금도 이어지고 있나요?"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동학은 한국 근대를 열었다고 생각합니다. 동학농민혁명, 삼일만세운동, 광주민주화항쟁, 그리고 최근의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중요한 장면 장면에서 동학정신이 표출되고 있으니까요. 이것이 제가 지금까지도 동학을 놓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조성환 교수(원광대 HK+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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