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들의 인권에 대한 관심은 청나라 말기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여성 인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때 '여계혁명'을 외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하진'이다. 하진은 1886년 태어나서 1904년 근대중국의 대표적 지식인의 하나로 이름이 알려진 유사배와 결혼했다. 결혼 이후 상해애국여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면서 '반'이라는 이름에서 '하진'으로 개명했다. 1907년 유사배와 함께 일본에서 하진은 중국 최초의 무정부주의 잡지 중 하나인 『천의보』를 발간했다. 당시 하진은 육회권, 서아준, 주노도, 장욱 등과 함께 '여자복권회'를 설립하여 『천의보』를 통해 여성 인권과 무정부주의를 선전했다.

프랑스 여성 무정부주의자 루이즈 미셸(Louise Michel)의 초상화
프랑스 여성 무정부주의자 루이즈 미셸(Louise Michel)의 초상화

 『천의보』의 '천의'는 하늘의 뜻이라는 의미로, 여계혁명을 포함하여 정치, 경제혁명이 모두 마땅히 일어나야 한다는 의미였다. 무정부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여성주의자였던 하진은 인류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여성해방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다른 무정부주의자들이 여성문제를 계급문제보다 낮은 차원으로 이해했던 것과 달리, 하진은 여성문제야말로 가장 먼저 시작해야 하는 문제라고 보았다는 점이 달랐다. 혁명을 주장했던 것만큼 하진이 여성해방을 이루는 방식은 폭력적이었다. 여자를 때리는 남자가 있으면 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여성 자신의 생각이 바꿔야 한다고 보았다. 그것은 남녀 간의 불평등이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진 고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중국에서 남자가 여러 명의 여자와 사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신분이 높을수록, 돈이 많을수록 그것은 더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그런데 그와 더불어 여자에 대한 남자의 지위와 권력도 함께 높아졌고, 결국 여자는 남자의 부속품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상문화에서도 반영되었는데, 아내가 죽으면 남편은 1년 상만 지내면 되는데, 남편이 죽으면 아내는 3년 상을 지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사회에서는 남자를 중시하고 여자를 경시하는 풍조가 형성되었다. 하진은 그것이 습관과 교육에 의해 만들어진 풍조이지, 인간의 천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풍조이니, 사람에 의해서 없앨 수도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러한 풍조를 없애는 것이 바로 여성해방이라고 생각했다. 
 전통적인 여성은 집안에서 자식을 키우고 살림을 잘 하는 것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것이 '남녀유별'이라는 윤리로 확립되어 여자는 인간이 아니라 물건으로 전락했다고 하진은 생각했다. 그런데 여자가 이렇게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인정받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남자도 권리를 상실하게 되었다. 여자를 집안에 가두자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일은 오롯이 남자의 몫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중국은 딸을 시집보낼 때 지참금을 내야하는데, 그 부담이 또 만만치 않았다. 그것도 다 남자의 몫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여성해방은 곧 남성해방이기도 하다고 하진은 생각했다. 하지만 여성해방을 남성에 의해 이루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여성해방은 여성이 이루어야 진정한 여성해방이라는 것이다. 
 하진이 여권을 쟁취하기 위해 제시한 일곱 가지는 첫째, 일부일처제이다. 둘째, 부모 모두의 성을 따르는 것이다. 셋째, 아들과 딸 둘 다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넷째,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자식을 키우는 것이다. 다섯째, 부부 사이가 좋지 않으면 헤어지는 것이다. 여섯째, 초혼은 초혼과, 재혼은 재혼과 혼인하는 것이다. 일곱째, 창녀를 없애는 것이다. 이 일곱 가지는 지금으로서는 당연한 것 같지만, 당시에는 파격적인, 그래서 '혁명적인' 생각들이었다. 이런 당연한 생각들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시대였기 때문이었다. 
 하진은 이런 주장에서 더 나아가 사회혁명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장한 것이 '여계혁명'이다. 왜 하진은 여성혁명이 아니라 여계혁명을 주장한 것일까? 가정과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이 경계를 허물어야 비로소 그 보다 더 큰 단위 국가와 국가의 경계가 허물어질 것이고, 그리고 계급 간의 경계도 허물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진은 '사회혁명의 막을 열고 싶다면, 반드시 가정에서 시작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가정, 사회, 국가, 세계 모든 영역에서 강권과 억압이 사라지는 날을 꿈꾸었다. 
 결국 하진이 무너뜨리고 싶어 했던 청나라가 무너졌다. 그러나 여성해방은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다. 1920년대 신문화운동 시기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여성해방을 부르짖었다. 많은 사람들이 여성해방을 부르짖게 된 배경에는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도입도 한 몫을 했다. 여기저기 공장이 생겼고, 값싼 노동력으로 여성 노동력이 필요해졌기 때문이었다. 중일전쟁 이전 남성 노동자가 1.5각을 임금으로 받았다면, 여성 노동자는 0.5각을 받았다. 이렇듯 여성 노동자의 임금이 남성 노동자의 3분의 1 정도였다. 이렇게 여성이 집안에서 사회로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아편전쟁 이후 서양 사상의 영향도 큰 몫을 했다. 자유, 평등, 박애 등의 개념은 모두 서양에서 전파된 것이었다. 무술유신 전후로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남녀평등에 대한 생각이 많이 알려져 있었다. 여성의 발을 감싸서 자라지 못하게 하는 전족이나 남자가 여러 명의 첩을 두는 제도 등 전통적인 악습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청나라 말기 서양 전도사들이 여학교를 세운 이후 하나 둘 여학교가 생겨났다. 하진이 다닌 여학교도 그 중 하나이다. 유신변법을 시도했던 양계초는 여성 교육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여자가 교육을 받지 않는 것이 바로 천하가 약해지는 근본적 이유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여성에 대한 교육은 하진이 바랐던 여성 스스로의 각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부녀주의'라고 불리던 페미니즘은 신문화운동을 거치면서 '여성주의'로 바꿔 불리기 되었고, 이후 30년대 이후에는 '여권주의'로 불리었다. 그것은 여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근대 중국에서 일어났던 이런 여성운동은 남녀 간의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했지만, 남자에 대한 여자의 도전과 투쟁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의 인간이라는 생각에서 모든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쟁취하려는 투쟁으로 발전했다는 특징이 있다. 즉 여성과 남성의 차별의 철폐에서 출발하여, 이 세상 모든 차별의 철폐로 나아가길 원했다. 가정에서의 차별의 철폐에서 출발하여, 나아가 사회에서, 그리고 국가에서, 그리고 세계에서의 차별이 모두 사라지기를 원했다. 
 1949년 신중국이 성립하고, 1954년에야 비로소 <중화인민공화국헌법>에서 '남녀평등'이 헌법적 지위를 얻게 되었다. <헌법>에 "여성은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그리고 가정에서의 생활 등 방면에서 남자와 평등한 권리를 누린다."라는 명시되었다. 현대 중국의 사전에는 '우먼 파워(女强人)'라는 단어가 실려 있다. 중국 사회에서 남성을 능가하는 알파걸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하진의 꿈이 조금은 실현된 것일까?

 김현주 교수(원광대 HK+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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