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동일본 대지진의 발생
 3월 11일 오후 2시 46분경, 일본 미야기 현 산리쿠 근해에서 진도 9.0에 달하는 거대 지진이 발생했다. 지진은 동일본 전체에서 발생했다. 그러나 지진 자체로 인한 희생자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지진에 이어 발생한 쓰나미로 인한 것이었다. 쓰나미는 미야기 현, 이와테 현, 후쿠시마 현의 연안 지역을 파괴했다. 가령 센다이시 와카바야구에서는 쓰나미로 익사한 것으로 보이는 시신 수백구가 발견되기도 했다. 또 항공자위대의 기지가 수몰되기도 했다. 쓰나미를 피해 재빨리 높은 곳으로 피신한 사람은 살고, 대피가 늦은 사람은 죽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많은 일본인은 직접 혹은 방송을 통해 거대한 쓰나미가 마을을 통째로 삼키고, 자동차 등을 밀어내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재난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후쿠시마 제1원전이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쓰나미는 발전소 설비를 침수시켰다. 그 결과 외부 전원이 끊어진 상태에서, 원전 내 비상 발전기의 대부분이 그 기능을 상실했다. 그리고 이것은 냉각수 주입을 불가능하게 해서 원자로를 뜨겁게 만들었다. 원전은 정지시킨다고 해도, 냉각수를 주입해서 식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뜨겁게 달구어진 원자로가 폭발해서, 체르노빌 사태와 같은 방사능 오염 사고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제1원전의 모기업인 도쿄전력은 비상상황임을 정부에 알렸고, 그 결과 사고의 수습은 일본 정부가 맡게 되었다. 이후의 사태는 긴장과 공포의 연속이었다. 직원들의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3월 12일, 3월 14일, 3월 15일에 각각 원자로 1호기, 3호기, 4호기가 수소 폭발을 일으켰다. 원자로 자체가 폭발한 것이 아니었지만, 이는 그만큼 원자로가 뜨거워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일본 정부도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간 총리는 도쿄전력 측에 물러설 곳이 없으니 목숨을 걸고 사태를 수습하라고 지시했고, 뜨거운 원자로를 강제로 식히기 위해 자위대의 동원도 지시했다. 결국, 내부 직원들이 복구 작업을 펼치는 한편, 자위대와 소방대, 경찰이 헬리콥터·소방차 등을 동원해 원자로를 강제로 식혀 폭발 위험을 막았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 작전 끝에 3월 19일과 20일을 기점으로 원자로의 대규모 폭발 위험은 크게 낮아졌다. 그리고 이후에는 원자로의 외부 전원도 복구되어 갔다. 이렇게 해서 최악의 시나리오는 실현되지 않았고, 일본과 전 세계는 안도했다. 다만, 후쿠시마 현과 그 주변의 방사능 오염 문제는 이후에도 계속된다.

쓰나미로 인해 파괴된 거리(이와테 현 오후나토시)

일본 돕기 운동의 전개 
 동일본 대지진에 대한 소식은 한국에도 생생하게 전해졌다. 동일본 대지진에 대해 한국 사회는 압도적인 재난에 대한 충격, 방사능 오염에 대한 불안, 일본 신화의 붕괴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일본을 돕고 응원하자는 움직임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일본 돕기 운동은 모금 운동으로 시작해 전반적인 일본 돕기 운동으로 발전했다. 
 먼저 한국 정부가 동일본 대지진 발생 당일인 3월 11일, 외교통상부를 통해 일본 정부와 국민에게 깊은 애도와 위로의 뜻을 전했고, 다음날인 3월 12일에는 한국 구조대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일본에 도착했다. 정치권에서도 당시 여당이었던 한나라당, 주요 야당이었던 민주당과 민노당의 주요 인사들도 메시지를 남겼다. 이러한 가운데 12일을 기점으로 시민사회에서도 일본을 돕기 위한 모금 운동이 본격화되었다. 3월 12일, 천주교에서는 위로의 말을 전하는 동시에 긴급 구호로 5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했고 기독교 단체들도 복구 지원팀을 파견하고 모금 운동을 하는 등 지원에 나섰다. 이후 모금 운동은 봇물 터지듯 이어졌다. 대한적십자사는 포털 업체 NHN(현재의 네이버)과 손잡고 구호 모금을 시작했고, 또 다른 포탈 업체인 다음(현재의 카카오의 전신)도 토론방으로 유명한 '아고라'에서 모금을 시작했다. 한국경제신문도 전국경제인연합회, 대한상공회의소, 한국무역협회, 한국경영자총협회, 중소기업중앙회의 경제 5단체와 함께 모금 운동을 시작했다. 천태종과 원불교 등 불교계도 각각 성명을 내며 모금을 추진했다. 모금은 커다란 호응을 얻으며 진행되었는데, 여기에는 인터넷의 네트워크 기능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등 주요 언론들도 유관단체와 협력해서 모금 운동을 벌였다. 또 고영진 교육감의 경남교육청도 모금 운동에 나섰다. KBS는 3월 15일 성금 모금을 위해 종일 방송을 진행하기로 했다. 이러한 모금 운동은 시민사회의 폭넓은 호응을 얻었다. 일본에서 커다란 인기를 얻고 있던 한류 스타들도 모금에 동참했는데, 가령 배용준은 약 10억, 장근석은 약 1억을 기부하기도 했다. 정부, 정치권, 종교계, 언론계, 한류스타, 교육청, 기타 인터넷 커뮤니티 등 모금 운동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전개되었다. 한국 사회에 퍼진 건 단지 모금 운동뿐이 아니었다. 일본을 향한 격려와 응원의 메시지 남기기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네이버 웹툰은 '힘내요 일본!-릴레이웹툰'을 통해 일본을 응원했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도 일본의 재난에 애도를 표했다.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위안부' 문제의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집회에서 동일본 대지진의 희생자들을 애도했던 것이다
 한국의 일본 돕기 운동에 대해, 일본에서도 감사의 뜻을 표했다. 가령 일본의 간 나오토 총리는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에게 감사 서한을 전달했다. 또 무토 마사토시 주한국대사는 3월 23일에 대사관 홈페이지에 한국 국민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고, 대사관 건물에 "일본 대지진에 대한 한국 국민 여러분의 따뜻한 지원을 일본 국민들은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라는 현수막을 걸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또 일본의 『요미우리신문』은 3월 15일 기사에서 동일본 대지진에 대한 세계 각국의 반응과 일본에 대한 응원을 소개하는 한편, 한류스타 배용준, 이병헌 등의 기부를 긍정적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아사히신문』도 한국의 일본 돕기 운동 열풍을 보도하기도 했다.
 한국 내 일본 돕기 운동은 3월에 가장 뜨거운 열기로 진행되었다. 3월 말에 일본 정부가 독도 영유권 주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중학교 사회과 교과서를 검정한 것에 대해 반발과 싸늘한 시선이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일본 돕기 운동은 지속되었다. 최종적으로 일본 돕기 운동은 모금을 중심으로 대략 2011년 가을까지는 지속되었던 것 같다. 

일본 돕기 운동의 의미 
 한국에서 일본 돕기 운동이 전개되었고 이에 일본 측에서 고마움을 표했다고 해서 한일 관계가 전면적으로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사실 일본 돕기 운동 초기 한국 내에서는 이후 한국과 일본이 새로운 우호 관계를 만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해 3월 하순에 일본 문부성이 독도 영유권에 관한 주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교과서를 검정하자, 그와 같은 기대는 보기 좋게 깨어졌다. 지진, 쓰나미, 원전 사고의 후유증을 앓고 있으면서도 독도 영유권 주장을 지속하는 일본에 대해 한국 사회도 조금씩 일본에 대해 냉담한 태도를 갖게 되었다. 이후 2012년 8월,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을 계기로 한일관계는 완전히 경색되었다. 그리고 일본 돕기 운동 자체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져 갔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관점에서, 당시의 일본 돕기 운동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를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가해와 피해라는 관계의 극복이 시도되었다는 점이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일본을 가해자, 한국을 피해자로 규정했고, 때로는 사과와 보상에 미온적인 일본에 분노를 표시했다.  따라서 오랫동안 한국 사회서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였다. 그러나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거대한 재난 앞에서 한국 사회는 일본 돕기 운동을 통해 과거사 문제를 뛰어넘어 일본을 도왔다. 둘째, 일본을 상대적인 눈높이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한국인의 인식에서 일본은 오랫동안 경제대국, 선진국이었다. 그러므로 일본은 도와주어야할 대상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인식은 동일본 대지진을 계기로 크게 흔들렸다. 당시 일본은 저성장과 주력 산업의 쇠퇴를 겪고 있었는데, 안전신화마저 붕괴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한국 사회는 일본을 도움이 필요한 나라로 인식하게 되었다. 셋째, 한국 사회가 다른 나라의 아픔에 적극적으로 공감했다는 점이다. 그 이전에도 한국 사회에서 다른 나라의 비극에 공감해서 이를 돕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과거 그러한 일은 일부 사람들의 동참에 의해 이루어졌을 뿐, 사회 전반의 열풍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커다란 비극이 일어나고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의 나라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1년에 한국 사회는 우리나라가 아닌, 남의 나라 일에 기꺼이 동참했고, 이는 거대한 열풍으로 번졌다. 이제 한국 사회도 남의 나라의 아픔에 적극적으로 공감하고, 이를 도와줄 수 있는 사회로 변화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싶다. 
 현재 동북아시아 정세는 갈등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동일본 대지진과 같은 거대한 재난은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기에, 재난 앞의 협력 및 화해는 대단히 중요하다. 최근 대두되고 있는 한국의 백두산 폭발의 가능성, 일본의 수도직하형 지진 및 후지산 폭발의 가능성을 염두도 두면 더욱 그렇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의 일본 돕기 운동은 언젠가 다시 조명 받는 날이 오리라 생각한다.  

 

윤현명 교수
(원광대 HK+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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