名作의 기준이 무엇인가, 근원적 질문이 슬며시 고개를 들이민다. 고민은 핑계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결국 하게 될 터이니. 마흔두 살의 나는 아직도 이토록 점잖지 못하고 종종 위악적이다. 불안과 소요의 시간을 자기연민으로 포장한 채 말이다. 
 강단에 서 20대 청춘들을 지도한 지 어느덧 12년 차다. 학생들에게 대단한 학식을 전달하진 못 하지만 함께 깨달아가고 있단 믿음이 나를 버티게 했다. 서로 대등하게 고민을 나누는 관계, 드러나지 않던 그 시간에 함께 웃고 울며 학생들과 나는 자존감을 쓰다듬었다. 그렇게 함께 앉아 바라보던 것들을 명작이라 할 수 있을까. 우스갯소리로 명작을 '누구나 좋은 책이라 말하지만 누구도 읽지 않는 책'이라던데, 그렇다면 심오한 명작으로 현학적 사유를 뽐낼 것인가, 사유가 장면을 앞서는 대중적 작품으로 '대화'를 시도할 것인가. 강의실에서 만나는, 생각만 해도 뭉클한, 학생들의 눈망울을 떠올리며 후자를 택하기로 한다. 지금, 이 시대, 이곳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경험으로 비뚤어진 프레임을 망치로 후려치는 이야기 말이다. 
 넷플릭스의 드라마 '마스크걸'은 현 시대의 실제성과 상징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외모 콤플렉스를 가진 평범한 직장인 김모미(이한별)는 마스크를 쓰고 인터넷 방송 BJ로 활동한다. 얼굴을 가리고 늘씬한 몸매로 인터넷 채널에서 구독자들의 환심을 사는 김모미, 뚱뚱한 몸과 어눌한 분위기로 존재감 無의 인생을 사는 주오남(안재홍)은 외모지상주의 사회의 표본들이다. 산업화 이후 '외모지상주의'를 다루는 콘텐츠는 셀 수 없지만, 전형적인 이분적 선악구도를 초월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스크걸'의 행보는 신선하다. 
 부족한 외모 때문에 관종 성향을 감추고 밤마다 인터넷 BJ로 나르시시즘적 욕망을 채우는 모미는 자신을 해하려는 남자 둘을 실수로 살해한다. 하나는 자신을 욕정 해소의 도구로 삼은 남자, 하나는 진지하게 자신을 사랑했던 주오남이다. 물론 주오남의 사랑은 왜곡된 집착이다. 영상 너머의 모미를 현실과 동일시하며 모미가 방송에서 얼음을 깨면 모니터 앞에 혼자 앉아 얼음을 씹어 먹고, 와인을 마시면 함께 마신다는 착각으로 술에 취한다. 소외된 자신의 세계에서 주오남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욕정을 채우고 사랑이라 정당화한다. 
 모미는 페이스오프에 가까운 성형수술 후 초미녀 아름(모미의 가명)이 된다. 그리고 자신과 배경이 닮은, 성형미녀 춘애를 만난다. 자신을 버렸던 아이돌 부용과 성형 후 재회한 춘애는 잠시 꿈 같은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실패했던 사랑이 외모 덕에 회복됐다는 희열은 곧 공허와 후회로 바뀐다. 부용은 데이트 폭력을 서슴지 않으며 춘애에게 더 큰 대가를, 희생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춘애는 부용에게서 도망치려 탈출을 시도하지만 부용에게 붙잡힌다. 춘애와 아름의 연대는 부용을 죽이는 힘을 발휘한다. 아름은 세 명의 남자를 죽인 희대의 살인마 '마스크걸'로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교도소에 수감된다. 
 라캉은 『앙코르』에서 '증오'와 '사랑받는'의 합성어 '하이나모라시옹'을 통해 사랑과 증오의 대상을 일원화한다. 사랑에 빠지면 상대에게 "사랑해"라는 표현을 앙코르하고, 상대 또한 앙코르를 원한다. 그러나 한쪽이 앙코르를 거부하면 반쪽짜리 앙코르는 상대의 앙코르 없이도 일방적 헌신으로 사랑을 감내한다. 이쯤 되면 사랑하는 대상보다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에 나를 지배당한다. 상대는 내 맹목적 사랑이 싫다 못해 두렵고 나는 죽고 싶을 만큼 짝사랑이 괴롭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살해하지는 못하므로 나와 상대를 해치는 것으로 부재의 결핍을 해소해 나간다. 그리하여 라캉은 "사랑"이 언제든 대상에게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말한다. 
 낭만이라는 착각을 뒤집어쓰고 증오를 복선에 깔아둔 채 이 사랑은 어머니와 자식의 무대로 시선을 이동한다. '여성'에서 '어머니'로 사랑의 주체가 이동하는 후반부에도 여전히 증오가 도사린다. 삶의 결핍을 자식으로부터 보상받고 싶은 경자의 개인적 욕망은 모성의 숭고에 균열을 낸다. 한편, 모미는 딸을 떠나는 것으로 모성을 지킨다. 모미는 유년기 시절 친모에게 늘 부족한 딸이었다. 정서적 애착과 위로가 필요했지만 엄마는 끝내 못난이 모미에게 곁을 주지 않는다. 딸의 이름을 '미모'라고 지은 것도, 친밀하지 못한 엄마에게 '미모'를 의탁하는 것도 애정의 결핍과 호소다.
 남성들 앞에 선 모미, 교도소에서 종교적 믿음으로 변화하는 모미 등 교체되는 마스크 너머 모미의 속내를 알 수 없어 긴장은 극에 달한다. 결국 미모의 엄마인 모미, 복수를 기다린 주오남의 엄마 경자, 모미의 엄마 영희, 이 세 명의 엄마는 한 곳에서 서로를 겨누며 폭압적 민낯을 드러낸다. 이들의 불완전한 모성은 자신을 상해하는 것으로 반쪽짜리 앙코르를 이어간다. 
 '마스크걸'의 등장은 필연적으로 마스크 너머 유약한 자아를 스포한다. 하루에도 우리는 여러 가면과 마주한다. 사람들은 가면 뒤에서 안도감을 느낀다. 민낯을 드러내는 일은 늘 부작용을 초래한다는 불안 때문이다. 아름다운 몸과 얼굴, 좋은 학력, 유복한 가정환경, 여유로운 성품. 겹겹이 가면을 쌓아 사랑받길 원한다. 그러나 진실을 외면하는 '마스크'의 욕망은 파국을 초래한다. 오전 9시, 호흡을 가다듬고 쌩긋 웃으며 교양교육원 사무실의 문을 연다. 나는 아직 마스크를 벗지 않았다.

 

이혜경 교수(교양교육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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