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은 어떤 새인가?
 캠퍼스를 거닐다 보면 자주 마주치는 새 한 마리가 있다. 바로 우리 대학의 상징 봉황이다. 봉황의 봉(鳳)자는 약 3,000년 된 글자인 갑골문에서부터 등장한다. 신(辛)자와 조(鳥)가 결합한 형태로, 신은 무기를 뜻하며, 조는 토템을 상징하여 곧 제정일치 시대의 왕권을 나타낸다. 지금 우리가 가진 문헌 자료에서 '봉황' 두 글자가 나오는 최초의 책은 『산해경』이다. 산과 바다에 관한 경전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책은 신비한 동물과 기이한 사람들을 이야기하며,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신화서라고 평가받는다. 여기서 봉황은 금과 옥이 많이 나는 단혈산이라는 곳에서 산다. 

 이곳의 어떤 새는 생김새가 닭 같은데 오색으로 무늬가 있고 이름을 봉황이라고 한다. 이 새의 머리의 무늬는 덕을, 날개의 무늬는 의를, 등의 무늬는 예를, 가슴의 무늬는 인을, 배의 무늬는 신을 나타낸다. 이 새는 먹고 마심이 자연의 절도에 맞으며, 절로 노래하고 절로 춤추는데 이 새가 나타나면 천하가 평안해진다. 

 생김새가 닭을 닮았다 하니, 수덕호의 봉황각이 '닭 다방'이라 불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셈이다. 그러나 봉황은 닭을 닮았을지언정, 저 홀로 덕, 의, 예, 인, 신 다섯 미덕을 고루 갖추었으며, '먹고 마심이 자연의 절도에 맞다'는 말은 그 삶의 방식이 자연의 흐름에 맞고 다른 존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모든 것이 순리대로 흘러가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봉황이기에, 그가 나타나면 곧 그 세상이 평화로운 곳이라는 뜻이 된다. 
 유가 경전 중의 하나인 『예기』에도 봉황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기린, 봉황, 거북, 용을 일러 사령이라 한다. 그렇기에 용을 가축으로 삼으면, 물고기들이 놀라 도망치지 않을 것이고, 봉황을 가축으로 삼으면, 새들이 놀라 날아가지 않을 것이며, 기린을 가축으로 삼으면, 발굽 달린 동물들이 놀라 떠나가지 않을 것이며, 거북을 가축으로 삼으면, 인정을 잃지 않을 것이다. 

 발굽 달린 동물의 으뜸이라는 기린(麒麟)은 목이 긴 아프리카 초식 동물이 아니라 뿔 하나, 사슴의 몸통에 소꼬리를 가졌다는 상상의 동물이며, 봉황처럼 태평성대에만 나타난다고 전해진다. 용은 물의 속성을 지닌 동물이기 때문에 물고기의 우두머리이고, 봉황은 조류의 으뜸이다. 거북이가 인정을 잃지 않게 해준다는 것은 거북이 배딱지나 등껍질에 질문을 적고 불을 쫴 그 갈라지는 모습으로 점을 쳤기 때문이다. 기린, 봉황, 거북, 용으로 이루어진 사령은 보통 사신(四神)과 혼동되는데, 사신은 오방설에 따라 네 개의 방위에 배치된 청룡, 백호, 주작, 현무를 말한다. 사령과 달리 사신은 동서남북 방위가 중요해서 그림도 네 방향에 맞게 그려진다. 반면에 사령은 한 번에 같이 등장하는 경우는 많이 없다. 
 봉황은 또 한나라 사람 허신이 글자에 대해 해설한 『설문해자』에도 나온다. 

 봉황은 신성한 새다. 황제가 말하길, 봉황의 생김새는 앞은 기린이고 뒤는 사슴이며, 뱀의 머리에 물고기 꼬리, 황새의 이마와 원앙의 뺨, 용의 무늬에 호랑이 등, 제비의 턱과 닭의 부리에 다섯 색깔을 두루 갖추었다. 동방 군자의 나라에서 탄생하여 사해 밖을 유유히 날았다. 곤륜을 넘어 지주에서 목을 축이고, 약수에서 씻었으며, 저녁에는 풍혈에서 묵었다. 이를 보면 천하가 태평해진다.

 앞 시대의 문헌에 비해 여기서는 훨씬 풍부한 특징을 갖추었다. 생김새도 『산해경』에서는 닭의 모습에 다섯 빛깔 깃털을 지녔다고만 했는데, 여기서는 부위마다 닮은 동물이 다르다. 태어난 곳과 활동 반경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상상의 존재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이처럼 변한다. 

우리대학 60주년 기념 봉황탑 / 사진: 원대신문
우리대학 60주년 기념 봉황탑 / 사진: 원대신문

우리문화 속 봉황의 의미
 이처럼 봉황은 군자의 나라에서 태어난 신성한 새였으며, 태평성대를 예고한다는 특징 때문에 전통 시기 군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도상으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부터 그 모습이 보이며, 고려·조선 등 전통 시기를 거치며 봉황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유물을 남겼다. 봉황무늬 거울, 봉황무늬 수막새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무늬였을 뿐만 아니라, 봉황은 또 음악의 신이기도 했기 때문에 방향(方響), 편경(編磬) 등 전통 악기 상단에는 봉황 머리를 새겨놓곤 했다. 대한제국 시기에도 봉황은 황실을 상징하는 중요 도상이었기 때문에 영친왕비의 봉잠 등 다양한 유물을 확인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잠시 모습을 감추었던 봉황이 다시 나타난 것은 1955년이다. 1955년 발행한 이승만 대통령 80세 탄신 기념우표에 꼬리를 길게 늘어뜨린 봉황 두 마리가 마주 보는 모습이 그려졌다. 뒤이어 1956년 제3대 대통령 취임식 및 광복절 기념식에도 긴 꼬리를 가진 봉황 두 마리를 그린 휘장을 내걸었다. 제4대 윤보선 대통령 재임 시절은 2년에 불과해서인지 관련 자료를 확인할 수 없으나, 1963년 발행된 박정희 제5대 대통령 취임 기념우표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 때와 같은 양식의 봉황 두 마리가 그려져 있고, 또 대통령 관저 내부를 촬영한 사진에도 봉황 병풍을 확인할 수 있다. 1967년 <대통령 표장에 관한 공고 제7호>가 발표되며 봉황이 청와대의 상징으로 공식적으로 확정되었다. 이명박 정부 때 잠시 '왕조시대의 잔재 같은 고압적이고 권위적인 인상'이라는 이유로 폐지되었으나, 반대에 부딪혀 다시 복원한 일을 제외하고는 봉황은 줄곧 청와대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애용되어 왔다. 한 나라의 수장이라는 3,000년 전 상나라 때 부여받은 상징이 아직 유지되는 셈이다. 

원광대 교조로서 봉황의 의미
 지금의 교표 속 봉황은 그 조형에 있어 한눈에도 백제 금동대향로 뚜껑의 봉황을 참고했음을 알 수 있다. 백제 금동대향로가 출토된 곳은 부여 능산리 능사(陵寺)로, 이는 백제의 중흥을 이끌었던 위덕왕이 신라와의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아버지 성왕을 기리며 지은 사찰로 알려져 있다. 금동대향로는 약  6~7세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 시기 조형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특히 첩첩이 쌓인 산봉우리 위에 곧게 선 봉황은 반원형 날개를 펼치고, 부리와 가슴 사이에 여의주를 품고 그 발아래 보주(寶珠)를 딛고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것 같은 모습이다. 
 이 향로는 불교와 도교적 이상세계를 표현하고 있으나, 우리 대학의 봉황은 그 모습은 닮았을지라도 다른 이상세계를 꿈꾼다. 봉황이 그려진 지금의 U.I는 2001년부터 제작·사용하기 시작했지만, 봉황이 우리 학교의 상징 새로 지정된 것은 그 이전인 것으로 보인다. 이미 1974년에 캠퍼스에 봉황상이 조성된 사진이 있으며, 1976년 준공한 수덕호 봉황각 위에도 봉황이 우뚝 서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봉황은 세상을 내려다보는 듯 원대인의 웅지와 힘찬 젊음을 표출한다. 원대인에게 봉황은 풍요로움과 편안함, 길함과 뛰어남을 의미하며, 그 어떤 난관도 허락하지 않는 힘과 실(實)을 상징한다. 우리 대학 본부 건물 2층에 지구본이 하나 있는데, 이 지구를 떠받친 석상에는 글귀가 하나 새겨져 있다. 
 "봉황의 날개로 세상을 덮는다" 
 우리 대학이 70여 년 전 봉황을 상징으로 삼았던 데에는 바로 여기에 이유가 있다. 이 뜻을 이어받아 원대인 모두가 세상을 따뜻하게 보듬을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이정하 교수(원광대 HK+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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