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21일 북한이 정찰위성 로켓을 발사하고, 우리 정부는 9.19 군사합의의 부분적 파기를 선포하고, 이윽고 22일 북한은 9.19 군사합의의 사실상 전면 파기를 선언하며, 남북한 관계를 다시 긴장과 갈등으로 들어서고 있다. 이 긴장과 갈등은 비단 남북한 사이에서만 상존하는 반복성이 아니다. 미국과 중국 사이, 중국와 일본 사이, 한국과 일본 사이, 미국과 러시아 사이 등등 동북아시아를 구성하는 각 나라들의 관계 어디에나 갈등과 긴장이 상존할 뿐만 아니라, 최근 세계의 정치경제 상황이 악화되어가면서, 점점 더 악화일로로 들어서는 느낌을 받는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국제정치 패러다임이 대안을 찾지 못하고, 점점 가열 차 지는 상황이다. 이런 역사적 상황은 사실 새로운 것이 전혀 아니다. 오늘날의 문제는 바로 이것이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닌, 기존의 역사적 상황과 패턴을 계속 반복하면서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무한경쟁과 적자생존 그리고 승자독식의 세계를 살아가야만 할까? 
 오늘의 국제정치는 각 나라와 민족이 국제정치의 행위자가 되어 상호작용하는 패러다임을 기반으로 한다. 그리고 그 상호작용은 서로를 생존을 위한 경쟁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각자도생을 위한 협력과 배신이 주를 이룬다. 이러한 정치의 상상력은 근대에 발명된 '민족-국가' 개념에 기반한다. 국제정치의 행위자를 나라 혹은 민족을 단위로 조망하는 습벽이다. 그 외 너무 많은 행위자를 정치적 상상력에 들여놓게 되면, 고려해야 할 변수들이 너무 많아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정치적 상상력이 현실의 복잡성을 너무 환원주의적으로 축소하여, 단순화시킨다는 것과, 각 나라와 민족을 개체 행위자로 간주하는 습벽이 늘 현실을 적자생존과 약육강식 그리고 승자독식과 각자도생의 세계로 그려낸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이렇게 경쟁주의의 관점으로만 바라보게 된다면 우리에게는 출구가 없다.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는 잡아먹어야 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일본 제국이 저질렀던 아시아 침략행위에 대한 역사적 트라우마가 여전히 상존하고 있는 상태에서 남북한의 대치와 중국과 대만 간의 군사적 갈등고조, 그리고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이 고조되는 있는 상황은 더욱 더 '우리 스스로 강해져야만 살아남는다'는 자강론(自强論)을 부추긴다. 실제로 근대 초기를 살아가던 동북아시아의 지식인들이 다가오는 서구제국들의 위협 앞에서 공유했던 대안이 자강론이었다. 
 그런데 각 개체가 생존을 위한 무한경쟁을 벌인다는 세계상, 이 진화론적 경쟁의 세계상은 서구 열강이 거대한 제국들이 되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약소민족들을 식민지로 점령 침탈해 가면서, 자신들의 행위에 도덕적 윤리적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며, 우리는 역사적 트라우마에 여전히 사로잡혀 우리 스스로 더욱 더 그 경쟁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해가며, 가혹한 경쟁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살아가는 존재들 모두가 개체로서 생존을 위한 경쟁을 벌이며 살아가는 것은 분명 아니다. 오히려 많은 존재들은 서로와 연결되어, 함께 삶을 만들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우리가 식용으로 즐겨먹는 버섯을 만들어내는 곰팡이균은 다른 존재들과 함께 얽혀 삶을 만들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생물이다. 여러 다른 존재들을 연결하여, 함께 살아가가는 삶을 구성하는 곰팡이균은 '바위와 같은 암석류를 먹어치우고, 흙을 만들며, 오염물질을 소화하여 정화시키고, 나무와 같은 식물류를 양육하거나 죽이고, 우주 공간에서 생존가능하며, 환각을 일으키고, 음식물을 생산하고, 페니실린과 같은 의약품의 원료를 제공하며, 동물의 행동을 조작하거나 지구 대기의 구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래서 곰팡이균은 '생태계 엔지니어'라고 불리기도 한다. 

 버섯류를 포함한 곰팡이균의 살아가는 모습들 중 가장 특징적인 것은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큰 유기체는 땅속 식물성 곰팡이균인데, 전체 숲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시켜 주면서 살아간다. 예를 들어 숲의 나무들은 광합성을 통해 생산한 지방이나 당같은 탄소 영양분들을 균사체 네트워크에 제공하고, 대신 곰팡이균들이 바위와 같은 암석류를 녹여 추출한 인이나 질소 같은 탄소영양분을 제공받는다. 살아있는 유기체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미네랄은 바로 이 곰팡이균들이 암석류를 통해 채취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들이 행성 위에 살아가는 존재들에게 얼마나 필수불가결한 존재인지를 새삼 절감하게 된다. 이들은 '하나'가 되어 살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데,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곰팡이균들이 살아가는 모습들은 비단 그들만의 모습은 아니다. 우리 '인간'들도 이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예를 들어, 우리는 생존을 위해 음식물을 섭취하지만, 우리의 몸 자체는 그 음식물들을 자체로 소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이빨로 조그맣게 잘라서 넘긴 음식물들은 우리의 장 내에 공생하는 미생물들과 박테리아들을 통해 '분해'의 과정을 거쳐야, 우리의 위장이 흡수할 수 있는 양분의 상태로 전환이 된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그 미생물들과 박테리아가 없다면, 우리는 생존이 불가능하다. 숲의 나무들이 곰팡이균의 네트워크가 없다면, 미네랄 섭취가 불가능해 생존이 불가능한 것과 같은 상황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결코 '개체'(individual)의 형식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집단(the collective)의 형식을 취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동북아시아를 상상하고 있을까? 생존을 위한 경쟁 속에서 각자도생하는 세계에서 우리가 망각하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는 다른 존재들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기후변화와 생태위기는 모든 존재들이 서로 얽혀 살아가고 있으며, 그 얽힘의 구조는 매우 민감하여, 아마존 숲에 사는 작은 나비의 날개짓이 텍사스만의 허리케인으로도 발전할 수 있을 만큼 초기 조건에 민감한 구조를 구성하고 있다. 불가능한 가정이지만,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곰팡이균들이 멸종한다면, 더 이상 미네랄 영양분을 섭취할 수 없는 우리를 포함한 다른 고등 생명체들도 함께 공멸의 위험을 맞이할 것이다. 이는 단지 생태계의 모습뿐일까?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치도 이와 마찬가지의 운명을 공유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대한민국에서 한글로 논문을 작성한 나의 학문적 업적은 비단 나의 것만은 아니다. 그 글을 쓰는 과정에서 내가 참고한 많은 책들은 여러 미국학자들의 책들을 참고했을 뿐만 아니라, 학회참석과 이메일 교류 혹은 대화를 통해 그들과 공유한 아이디어들이 반영되어 있으며, 나와 나누었던 생각들이 또한 그들의 작업에 영향을 미치며 우리는 그렇게 함께, 그러나 또 각자, 서로의 작업들을 구성해 나아가고 있다. 여기에 한국과 미국 간의 선명한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국가가 아니라, 우리들 각자가 다양한 삶의 형식으로 구성하는 '행위자-네트워크'가 이 세계를 구성하는 가장 기초적이고 근원적인 행위자인 것이다. 곰팡이균의 네트워크를 통해 조망하는 세상은 결코 '홀로 걷지 않는' 세상이다. 서로와 연결되어 함께 삶을 만들어 나가는 행위자-네트워크의 눈으로 세계와 동북아시아를 다시 바라본다면, 서로를 의심과 혐오의 눈길로 바라보는 동북아시아는 새롭게 대안적 정치를 구성해 나아가는 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박일준 교수(한중역사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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