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묘〉와 우리대학 박물관

 무당, 풍수사, 장의사들이 거액의 돈을 받고 묘를 이장하며 생기는 미스터리를 다룬, 최근 개봉한 장재현 감독의 영화 <파묘> 열풍이 뜨겁다. 장재현 감독은 전작 <검은 사제들>(2015), <사바하>(2019)에 이어 <파묘>를 통해 K-오컬트의 세계를 확장하고 있다. 한편으로 김은희 작가의 <악귀>(2023)도 작년 큰 화제를 모았었다. 이에 따라 한국 무속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는데, SNS 상에서 한국 무속 관련 학술서적을 서로 추천하는 모습도 보일 정도이다. 

 영화를 보고 혹 한국 무속에 관심이 생겼다면 우리대학 박물관 3층의 상설전 <무(巫)-인간의 염원을 하늘에 잇다> 전을 추천하고 싶다. 이 전시는 우리대학에서 1972년부터 1978년까지 박물관장을 역임한 바 있는 고(故) 남강 김태곤(1936∼1996) 교수가 기증한 무속 유물을 중심으로 마련되었다. 남강이 1960년대 주로 수집한 563건 606점의 무속자료를 바탕으로, 신령에게 선택받아 인간의 염원을 하늘에 전하는 무당에 대해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전시이다.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부는 '무신도, 신령의 모습을 보여주다', 제2부는 '무구, 신령의 위엄을 나타내다', 제3부는 '굿, 신령과 인간이 만나다'의 주제를 통해 무신도, 무신상, 무구, 지역별 굿의 특징 등을 상세히 알 수 있게 하였다. 

 무당들이 모신 도당천신, 칠성, 산신, 바리공주, 대신마누라, 남성수, 관성제군, 장장군, 용궁부인, 일월신, 제석, 삼불제석, 오방신장 등의 다양한 신격들을 그림과 상(像)으로 형상화한 모습과 방울, 부채, 삼지창, 월도, 투구, 갑옷, 작두, 신칼 등의 신을 불러오고 그 신의 위력을 보여주는 무구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굿을 연행하는 현장을 생생하게 재현한 공간을 전시실에서 직접 보노라면, 요사이 영화·드라마 등의 문화 컨텐츠에서 한국만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요소로 자리잡은 무속에 대해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故 남강 김태곤 / 사진: 『한국 문화의 원본을 찾아서』, 국립민속박물관
故 남강 김태곤 / 사진: 『한국 문화의 원본을 찾아서』, 국립민속박물관

남강 김태곤의 무속 연구와 원본사고

 전시를 보다 보면 남강에 대한 궁금점이 생긴다. 그는 어떻게 이 많은 자료들을 모았으며, 무속에 대해 어떠한 연구를 하였을까? 사실 그의 무속 유물은 원광대학교뿐 아니라 경희대박물관(몽골, 야쿠츠크 등의 국외 자료 474점 및 국내 무속자료) 및 국립민속박물관(유물자료 1,299건 1,471점, 아카이브 자료 1,883건 30,198점)에도 소장되어 있을 정도로 방대한 양을 자랑한다. 그는 충청남도 서산 출생인데, 국학대학(현 고려대학교)에서  1963년 졸업하였고, 경희대학교에서 1966년    「황천무가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일본 동경교육대학에서 1977년 「한국무속의 연구」를 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원광대학교에서 1971년부터 1978년까지 재직하였고,  1978년 경희대학교에 부임, 민속학연구소장, 중앙박물관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1960년대 당시 미신으로 치부하여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던 무속에 대하여 큰 애정을 쏟았는데, 현장을 중시하여 무속인을 직접 찾아가 만나고 무가를 받아적으며, 조사일지를 작성하는 등의 노력을 쏟았다. 한편 굿이 끝나면 말미상에 올렸던 쌀을 사람들에게 담아 주기도 하였는데, 무거운 쌀을 마다하지 않고 짊어지고 갔다는 일화도 남아 있어 그 따뜻한 인간적 면모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학문적·문화적 가치가 폄하되었던 민속·무속 유물자료를 집념을 발휘하여 모았다. 무구, 무신도 등은 보통 묻거나 불태워져 없어지기 마련이라 더욱 더 이들 자료의 가치가 클 수밖에 없다. 이렇듯 평생을 전국의 민속 현장을 다니며 조사·연구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국무가집』, 『한국무신도』,  『한국무속의 연구』, 『한국민간신앙연구』, 『한국무속신화』, 『무속과 영의 세계』 등을 비롯한 수많은 연구성과를 내었다. 그는 평생동안 수집한 자료를 통해 무속박물관을 건립하고자 하였으나, 일찍 타계하여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소멸로부터 지켜낸 방대한 자료들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남아 연구자들과 일반인들에게 한국 무속의 가치를 드러내고 있다.

 한편으로 남강은 자료의 수집과 정리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무속을 철학적으로 파악하려 하였다. 곧 무속의 본질을 원본(原本, Arche-Pattern)으로 제시하여 우리 문화를 해석하는 패러다임으로 제시하였다. 이는 융과 엘리아데가 말했던 원형과는 다른 개념으로, 공간과 시간 이전의 무공간, 무시간의 영원성을 중시하여, 이것이 존재의 근원이 되는 카오스라고 보았다. 무한존재인 카오스로부터 코스모스의 존재 생성이 가능하며, 코스모스와 카오스 간의 순환이 반복되어 존재가 영원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본사고가 특히 무속에서 잘 나타난다고 보았다. 남강의 원본사고 학설은 학계에 큰 공감을 얻지는 못하였으나, 무속이라는 현상을 이론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값진 시도였음은 분명하다.

북방문화권의 연구범위 확대·목적

 그의 현장 조사는 국내 전역의 무속 및 민속분야에만 그치지 않고 세계로까지 이어졌다. 우선은 1970년대에 일본과 대만 등의 인접한 동아시아 현지조사로부터 시작하였는데, 이후 경희대학교 시베리아관 개관 사업에 착수하며 1990년 내몽골과 몽골을, 1992년부터 1995년까지 7차례의 시베리아 현지조사를 하였다. 곧 1992년 시베리아 야쿠티아의 야쿠츠크 주변 및 멘데이, 구타나, 나유긴 지역을, 1993년에 시베리아의 하바롭스크 주변과 야쿠츠크 멘데이 주변을, 1994년에 시베리아의 멘데이, 마야, 예린그리, 나이힌 주변을, 1995년에 몽골의 울란바토르, 가슈르트 주변과 시베리아의 야쿠츠크, 하바롭스크, 나이힌 등에 마지막 발자취를 남겼다. 

 이 조사를 통해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한국민속과 북방대륙 민속의 친연성」(1994), 「시베리아 샤마니즘과 한국무속의 상관성」(1994), 「한국 샤마니즘의 정의」(1995) 등의 논문이 작성될 수 있었다. 이들은 시베리아와 한국 무속 간의 상관성을 잘 보여주는 논문이다. 

 그가 몽골·시베리아까지 비교의 범위를 확대하여 북방문화권을 검증하려 하였던 것은 1982년과 1983년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객원교수로 있을 당시 구입한 샤머니즘 관련서적을 통해 샤머니즘의 중심지인 시베리아를 조사해야만 한국 무속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해외국가의 조사연구가 우리 민족과 문화의 근원을 찾는 것으로 귀착한다고 본 것이다. 남강의 제자인 김명자 안동대학교 명예교수는 남강이 시베리아를 조사연구한 목적을 다음과 같은 네 가지로 정리하였다. 첫째, 한국문화와 북방대륙문화의 비교연구, 둘째, 한국문화의 북방문화적 요소 색출, 셋째, 한민족과 한민족문화의 근원탐색, 넷째, 한민족문화의 기반 위에 남방적(동남아) 요소의 복합예상 색출. 그러나 이의 궁극적 목적은 우리의 문화를 보기 위함이라 덧붙였다. 

 남강의 해외조사연구에 있어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시베리아의 경우, 여러 국가들이 소련의 사회주의 국가체제에 있었기에 살아남은 샤먼들은 몇몇 밖에 없었다. 에벤키족 샤먼은 툰드라 지대의 오지에 거주하고 있었기에 영상 40도의 폭서와 영하 60도의 혹한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직접 만나고 조사하기 위해 남강은 강한 의지를 발휘하였다. 그는 현장의 어려움 속에서도 고군분투하며 몽골, 일본, 야쿠츠크 등에서 조사노트 73건 2,017점을 남길 수 있었다. 

 이 중 미발표자료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앞으로 이 자료에 대한 후학들의 합당한 연구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이는 동북아시아를 아우르는 그의 원본사고를 검토하는 작업임과 동시에, 무속·샤머니즘의 비교연구를 통해 공통의 정체성을 강화하여 동북아시아 평화공생체를 이루려는 한 모색이기도 하다. 갑작스러운 작고로 인해 북방대륙을 아우르려 했던 남강의 거대담론은 멈추고 말았지만, 그와 그의 연구를 떠올리며 다시금 우리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답을 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박병훈 교수 (원광대 HK+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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