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필자가 처음으로 김영하의 소설을 접한 것은 모 방송에서의 짧은 드라마에서였다. (『엘리베이터에 낀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였을 것이다, 아마도.). 당시에 시청했을 때 생경하고 독특한 소재의 단막극이었으나 작가에게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물론 지금도 작가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지만, 작가의 소설에 등장한 대부분의 인물들이 낯설지만은 않았다.

 얼마 전에는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의 동명 영화로 원작을 충실하게 재현하려했다는 소식에 영화도 보았지만 소설에는 미치지 못한 듯 했다. 하지만 소설에 관한 어떠한 지식과 이해가 없이도 평범하면서 안정적이지 못한 인물들의 행적과 심리, 그리고 음습하고 위태롭게 살아가는 배경은 다시금 소설을 상기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작품은 거의 10여 년 가까운 시기에 앞서 쓰여졌지만 현재에 와서도 당대와 이어진 세상과 죽음에 대한 주제의식은 곱씹어보기에 주요한 것이다. 최근에 다시 개정판이 출판되어 허상의 가능성에서 발현한 또 다른 현실의 영역을 재각인 시킨다(표지도 바뀌고 책값도 올랐다!). 속도감, 섹스, 죽음으로 맞물린 가상의 세계와 C와 K, 미미와 유디트, 그리고 자살보조업자 ‘나’라는 허구의 인물은 이제 우리들의 모습이다.

 작품 내에서 보이는 미학적 죽음은 보편적인 틀을 얻기보다 세계의 방법과 본질의 일부에 편승한다. 자살조차 자발적인 의지와 인식이 배제된 상황에서 ‘나’는 보조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직업으로 변동된다. 파괴의 책임은 누구도 지지 않으려 한다. 다만 현재에서 자신이 남긴 증거를 인멸하기 위한 치밀한 자기애로써 잔존한다. 현대는 선과 악, 미와 추의 개념 구분을 초월했다. 어쩌면 인생은 살아있음으로 인해 죽음의 당위성을 내포한다.

 그렇다면 적극적인 삶의 방식이 죽음에 대한 치열한 노력이 되는 것일까? 그 자살이 자신을 파괴할 권리일까? 선택일 수는 있겠다. 기회비용을 가늠할 수 없는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억측이나 환상이 실재와 현실로 되어가는 세계를 우리는 살고 있다. 삶은 고되고 무미건조하며 죽음은 유혹이자 휴식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혹시 죽음의 저편에서도 이곳의 세상을 추상하는 것은 아닐까?

 세상보다, 죽음보다 더 중한 것들이 있을 것이다. 아니, 분명히 있다. 누구에게도 삶과 죽음에 관련한 어쭙잖은 질문과 답변은 위험하리라. 기껏해야 하루 일찍 죽고 하루 나중에 죽을 뿐. 하지만 무책임하게 삶을 방관하거나 죽음을 동경하는 일은 벌이지 말아야겠다. 그렇기에 잘 살고 못 살고를 떠나서 삶도 죽음도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은 것이다. 죽음의 관심은 곧 삶의 징후이다.

천 명 구 (인문학부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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