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센터에서 이번 학기부터 진행하는 2009년 세계고전강좌의 첫 번째 강좌 '르 클레지오와 글쓰기의 여정(2009년 3월 18일)' 강연의 주요 내용을 게재한다. 원광대신문사에서는 총 6회에 걸쳐 진행되는 세계고전강좌의 주요내용을 게재하고 있다. /편집자

 

뿌리 찾기, 혹은 잃어버린 중심 찾기
섬, 사막 구름나라 사람들, 자신의 기원을 찾아 떠나는 여행 이야기
비극적 표류에서 󰡐잃어버린 중심 찾기'까지의 여정
르 클레지오의 작품들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주인공들은 근본적으로 여러 유형의 여행자 혹은 방랑자들이다. 르 클레지오의 글쓰기의 여정을 따라간다는 것은 주제의 측면에서 보면 사실 그의 여행이야기의 여정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 여정은 한마디로 주인공들의 비극적 표류에서부터 뿌리 찾기, 혹은 잃어버린 중심 찾기 여행으로 귀결되는 여정이다.


표류하는 삶의 이야기
초기 작품들에서는 무엇보다 존재론적인 차원의 결핍감에 사로잡혀 배회하는 인물들이 부각된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찾는지 알지 못한 채 존재론적인 불안과 고통 혹은 절망 속에서 떠도는 현대인의 표상이다. 초기소설 『조서』, 『홍수』, 『거인들』, 『전쟁』의 주인공들이 바로 그러하다. 그들은 일종의 전쟁터로 그려지는 현대도시의 삶 속에서 인생의 목표와 방향을 상실한 채 좌충우돌하며 그 어떤 내적 환상과 싸우는 존재들이다.

그들이 드잡이해 싸우는 환상은 개체적 삶의 궤적을 단숨에 흔적 없이 휩쓸어 가버리고 말 그 어떤 카오스의 움직임이다. 세계 종말의 환상을 환기시키는 이 카오스는 기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총체적 영상이다. 매 순간 온갖 존재들의 생멸의 움직임이 한꺼번에 들끓고 있는 카오스. 그 속에서 주인공들은 세상의 종말이 다가왔음을 다급하게 외치며 방황한다. 부단히 삶과 죽음의 사이클이 돌아가고 있는 총체적 세계의 움직임 속에서 개인에게 자신의 죽음은 그 자체가 곧 세상의 종말이 아닌가. 르 클레지오의 초기 소설의 주인공들은 바로 일회성의 삶에 대한 비극적 의식에 사로잡힌 채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말하는 존재들이다. 삶의 방향성을 상실한 채 표류하는 삶을 사는 이 주인공들은 종말론적 세계관의 한계의식에 갇혀 위기의식 속에 살아가는 서구 문명세계의 현대인들이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죽는 그 순간까지 삶을 전쟁으로 의식한다. 매순간 살아남기 위해 투쟁적 삶을 살아간다는 생각, 그 압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열망을 절망적으로 표현하던 르 클레지오는 타 문명권에서 하나의 출구를 찾는다.


『도피의 책』(1969)을 출판할 무렵 르 클레지오는 중앙아메리카 인디언 세계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 세계와의 만남은 그에게 의미심장한 사건이 된다. 인디언 세계는 작가에게 신화가 여전히 삶의 방식을 통치하는 사회를 보여줌으로써 도시의 미로에서 방황하던 르 클레지오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다. 그들 세계에서 르 클레지오가 무엇보다 이끌렸던 것은 시공을 초월해 신화가 살아 있는 세계, 우주보편적 삶의 질서에 순응하면서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체적 삶이다. 고대 도시와 그 문명의 단편들을 발견하면서 르 클레지오의 생각과 작품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온다. 이제 작가의 관심사는 초기 작품에서 부각되는 종말론적 환상이라든가 그 환상을 형식적으로 표현하는 글쓰기 모험 등에 있지 않다.

『도피의 책』부터 한동안 『저편세계로의 여행』과 같은 일련의 상상여행 이야기를 통해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세계로에 이끌림을 표현하던 작가는 『사막』(1980) 이후 본격적으로 제 3세계에 눈을 돌린다. 이때부터 르 클레지오의 글쓰기 여정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주인공들은 사라져버린 문명의 기원이거나 종족의 기원, 혹은 잃어버린 조상의 흔적, 혹은 어딘가 감춰진 보물 등등을 찾아나서는 여행자들이다. 이제 작가의 보다 큰 관심은 언어와 현실 사이의 관계 문제보다는 서구화된 현대사회가 진정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반성적 성찰로 귀결된다.


뿌리 뽑힌 자들의 기원 찾기 여행 이야기
삶을 용이하게 하는 합리적 사고와 기술 발전 덕택에 세계를 탐험하고 제어하고 지배해 온 서구가 이룩한 현대문명이, 과연 인류에게 가져다 준 것은 무엇인가? 그 문명이 세운 바벨탑, 대도시 속에서의 삶은 초기작품 『전쟁』과 『거인들』이 보여주듯 끔찍한 전쟁터와 같다. 그 속에 갇힌 채 출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작가의 분신들은 이제 르 클레지오의 작품에서 자취를 감춘다. 대신 인류가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근원적 향수를 나타내는 주인공들이 그 대변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막』 이후 르 클레지오에게서 만나게 되는 주인공들은 이제 더 이상 개체적 삶의 위기의식, 불안한 생존을 호소하며 향방 없이 표류하는 도시의 방랑자들이 아니다. 『섬』, 『사막』, 『구름나라 사람들』에서 부각되는 것은 어떤 이유로든 자신의 뿌리를 상실한 인물들이 자신의 기원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야기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외세에 의해 자신들의 땅을 잃어버렸거나 그 뿌리가 잘려 버린 사람들이거나 혹은 그 어떤 강압에 의해 고향에서 추방당해 떠돌이로 살아가는 사람들로서, 자신들의 조상의 흔적을 찾아 뿌리 찾기 여행을 떠난다. 개체의 죽음을 초월하여 항속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기를 기원하는 자는 자신과 동일시될 수 있는 피의 뿌리와 하나가 됨으로써 그 꿈을 이룰 수 있기를 희망한다.

가령 『사막』이나 『섬』에서 랄라나 󰡐나'-레옹이 경험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그 여행을 통해 종국적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하나로 잇는 연결고리를 발견하며 그에 의해 연속적 삶의 길을 찾아낸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이야기는 일종의 원순환적 삶의 여행이야기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르 클레지오에게서 뿌리 찾기 여행은 크게 보면 '잃어버린 중심' 찾기 여행이야기의 범주 안에 들어간다.


서구의 방랑자와 '잃어버린 중심'을 찾는 여행 이야기
르 클레지오의 글쓰기 여정에서 지금까지도 유효한 것은 아마도 서구의 방랑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 소중한 그 무엇'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다. 그 여행자가 찾는 본질적인 것을 우리는 '잃어버린 중심' 이라 부를 수 있겠다. 󰡐잃어버린 중심'을 찾는 서구의 방랑자는 종종 그의 모태인 서구사회를 떠나 다른 문화권, 다른 문명세계로 향한다. 『오니샤』, 『구름나라 사람들』, 『황금을 찾는 사람』, 『멕시코의 꿈』들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세계가 그러하다. 거기서 우리는 지상 어딘가에 숨어있는 보물섬 혹은 인류가 잃어버린 문명이나 신화세계, 혹은 실낙원의 흔적 등을 찾아 오지에서 헤매는 서구의 방랑자들을 만나게 된다.

가령 『오니샤』에서 죠프르와는 아프리카 오지를 떠돌며 사라져 버린 므로에 왕국의 흔적을 더듬어 찾는다. 그는 영생을 꿈꾸며 신화와 역사의 접경지대 어디쯤 실제로 존재할지도 모르는 실낙원을 찾아 떠도는 서구 방랑자의 테마를 여실히 부각시킨다. 르 클레지오의 여행자가 탐색하는 공간은 문명의 이기보다는 자연과 보다 가깝게 어우러져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체적 삶의 세계다. 그 공동체사회의 삶 속에서 작가는 개인주의적 이성중심적 서구사회가 갖고 있지 못한 것 혹은 문명화의 대가로 그 사회가 잃어버린 것, 보다 본질적이고 소중한 가치들을 재발견한다. 르 클레지오의 여행자는 그와 같은 전통적, 공동체적 삶의 방식에 깊이 매료되며 거기서 일종의 정신적 뿌리내리기의 통로를 발견한다.

그 통로를 통해 르 클레지오의 여행자는 그가 잃어버렸다고 느끼고 있던 존재의 중심 같은 것을 되찾게 되며, 『사막』이후 여행자 주인공들이 그들 여행에서 얻게 되는 가장 소중한 결실은 아마도 바로 그러한 중심의 발견 혹은 깨달음일 것이다. 이 깨달음은 서구의 방랑자를 내적으로 변화시켜 그로 하여금 그 공동체 사람들의 세계를 온전히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들과 합일함으로써 일종의 존재의 전환을 이루게 한다.


내적 중심을 향하여
『사막』 이후 르 클레지오의 많은 여행이야기들에서 방랑자 혹은 여행자인 주인공은 이처럼 외부세계에서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지만 기실 그 여정은 자기 자신을 찾아 떠나는 내적 여행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들에게 삶의 길은 『사막』의 주인공 랄라가 그러하듯 끝없이 펼쳐지는 '지평선'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킨 채 변하지 않는 그들 세계의 내적 '중심'을 향해 꿈꾸듯 나아가는 그러한 여정인 것이다. 또한 그것은 삶의 항속적인 순환의 움직임 속에서 앞서 간 조상이 남긴 보이지 않는 발자취를 따라 변함없이 같은 길을 걸어가는 것, 그리하여 끊임없이 떠나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그러한 삶의 여정인 것이다.


정옥상(유럽문화학부 교수)

저작권자 © 원광대학교 신문방송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