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사라져 유령처럼 떠돌던 영화들이 귀환한다. 소문으로만 전해지던, 혹은 부박한 기억 속에 박제된 이미지로만 남아 있던 영화들의 귀환.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만나는 네 편의 한국 고전영화들은 현재의 시간으로 소환된 과거로의 특별한 여행으로 관객들을 안내한다.


첫 번째 여행은 디지털과 함께 돌아온 세 편의 고전영화들이다. 2006년 발굴돼 숱한 화제를 모았던 <미몽(죽음의 자장가)>(1936)과 오랫동안 소재조차 알 수 없던 필름을 찾아 복원한 신상옥 감독의 <열녀문>(1962)은 한국고전영화 복원에 있어 중요한 선례와 기준을 만든 작품이다. 자체 기술로 복원된 <열녀문>은 2007년 깐느에서 처음 공개되었는데, 이 영화들을 통해 축적된 복원 경험과 기술은 2008년 김기영 감독의 <하녀> 복원이라는 또 다른 성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특히 한국 영화사상 가장 기이한 감독이라 불리는 김기영 감독의 1960년작 <하녀>는 마틴 스콜세지가 이끄는 세계영화재단(WCF : World Cinema Foundation)의 후원으로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복원해 2008년 깐느영화제 복원섹션에서 첫 공개되면서 세계 관객들의 이목을 모았던 작품. 한 중산층 가정에 하녀가 들어오면서 시작되는 가족의 몰락과 이를 지켜보는 가장의 공포를 다룬 <하녀>는 이후 김기영 감독의 영화에서 꾸준하게 반복되는 소재를 최초로 드러낸 작품으로 10년을 주기로 <화녀>(1971) <화녀 82>(1982) 등으로 재창조되었고 비슷한 소재의 <충녀> <육식동물> 등으로 변주되었다. 세트는 물론 촬영, 조명에 이르는 영화 전체 과정이 감독의 치밀한 통제 하에서 이루어진 영화는 특히 계단을 중심으로 1, 2층으로 놓인 이층집의 기괴한 미장센과 불협화음이 관객에게 극도의 긴장감과 공포를 선사한다.


지금 봐도 기이한 매력으로 충만한 작품이지만 사실 <하녀>의 복원과정 자체는 그리 녹녹하지는 않았다. 프린트 중간 중간 박혀있는 다양한 자막들을 지우는 것 역시 복원 과정 중 부딪힌 난점 중 하나였다. 당시 열악했던 한국영화의 제작여건상 복사본이 아닌 원본 자체를 수출하는 경우가 많았고 <하녀> 역시 완전한 프린트가 아닌 여러 버전에서 조금씩 가져와 붙인 프린트만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전주영화제에서는 가장 큰 문제였던 자막 문제를 보완한 최종 복원버전으로 국내외를 통틀어 최초로 소개된다. 사실 복원과정에서 부딪힌 이러한 문제들은 다른 두 영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유성영화이자 󰡐3천만의 연인'으로 불리며 식민시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문예봉 주연작인 <미몽>이나 아예 필름 자체가 유실됐던 영화를 대만전영자료관에서 수집, 복원한 <열녀문> 등의 수집, 복원 과정은 필름의 보존 자체에 무심했던 한국영화사의 한 시절에 대한 짙은 씁쓸함을 던져준다.


<하녀>와 <미몽>, <열녀문>이 열악하고 가난했던 지난 한국영화사의 그림자를 보여준다면 이두용 감독의 <최후의 증인>은 80년대라는 암울했던 역사적 시간이 남긴 상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김성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운명적으로 얽힌 비운의 주인공들을 통해 한국전쟁이라는 한국현대사의 비극적인 시간과 상처를 다룬 작품. 그 무게만큼이나 영화 역시 서슬 퍼런 검열의 칼바람 아래 숱한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던 비운의 주인공이다. 1980년 개봉 당시 검열에 의해 50여 분이 넘게 잘린 100분 버전이 상영됐고 1987년 출시된 비디오는 여기서 10분이 더 잘린 90분 버전이었다. 2002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154분이라는 온전한 모습으로 만날 수 있게 된 영화는 어둡고 거친 화면 속에 암울했던 시대를 묵직하게 그려간다. 영화 내내 먼지가 잔뜩 내려앉은 외투를 걸치고 신발이 헤질 때까지 '최후의 증인'을 찾아 벌판을 헤매는 오형사의 모습은 시간의 흐름 속에 은폐되고 망각해왔던 어두운 역사의 기억을 찾아내고 우울하고 뒤틀린 시대에 맞서고자한 감독 자신의 분신이기도 할 것이다.


열악했던 제작환경 때문에 혹은 시대의 아픔 때문에 사라지거나 훼손됐던 영화들, 전 세계 아카이브들을 뒤져 그 영화들의 존재를 찾아내 필름 곳곳에 켜켜이 내려앉은 먼지를 털어내고 새롭게 단장해 지금의 관객들과 만나게 하는 것, 그것은 식민경험과 전쟁, 가난과 억압을 지난한 시간을 통과하며 유독 잃어버리고 비워진 부분이 많았던 한국영화사라는 거대한 퍼즐을 맞추는 의미 깊은 작업의 시작이 될 것이다.


모 은 영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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