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센터에서 이번 학기부터 진행하는 2009년 세계고전강좌의 네 번째 강좌인 '떠도는 삶, 살아있는 시 - 두보 시 읽기 (2009년 4월 29일)' 강연의 주요 내용을 게재한다. 원광대신문사에서는 총 6회에 걸쳐 진행되는 세계고전강좌의 주요내용을 게재하고 있다. /편집자

두보의 방랑은 '흥'을 빚어내는 창작의 원동력


가녀린 풀, 바람이 산들거리는 언덕,
높은 돛대, 외로운 밤.
너른 들에 별은 가득 드리우고,
흐르는 큰 강에서 달은 솟구쳐 오른다.
이름이 어찌 문장으로 드러나랴?
관직은 늙고 병들어 쉬어야 하리!
홀홀한 이 몸이 무엇 같은가?
천지간 한 마리 갈매기.
細草微風岸, 危檣獨夜舟.
星垂平野闊, 月涌大江流.
名豈文章著, 官因老病休.
飄飄何所似, 天地一沙鷗.

두보의 시 <떠도는 밤의 회포旅夜書懷>의 전문이다. 이 시는 두보가 잠시나마 안정을 얻었던 성도(사천성 成都)를 떠나 충주를 거쳐 운안으로 향하는 뱃길에서 지어졌다. 마치 앞으로 펼쳐질 시인의 삶이 방랑으로 이어질 것을 예견한 듯, 불빛도 없는 망망대해를 떠가는 듯한 암담함과 고독감이 짙게 배어 있는 가운데 시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자괴감이 한데 얽혀 긴장을 조성한다. 젊은 시절부터 꿈꾸어 왔던 정치참여는 국가적 재난과 개인적 불운으로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도 쉽게 포기가 안 된다. 어떻게 할 것인가? 시를 이루는 이미지들은 모두 극대와 극소의 팽팽한 대조 가운데 놓여 독자를 시 안으로 끌어들인다. 지금의 나의 처지란 미풍에도 흔들리는 저 풀만큼 불안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 누가 알랴, 높은 돛대를 달고 한밤중 홀로 뱃길을 가는 사람의 심정을.


두보(杜甫, 712~770)는 중국 당대唐代의 시인으로 이백李白과 함께 중국 시단을 대표하며 우리에게도 친숙한 시인이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두보 시의 총수는 1430여 수를 헤아린다. 대체 무엇이 그토록 오래 지칠 줄 모르는 정열로 시를 쓰게 만들었을까? 시인이 되려면 자고로 남이 못 보는 것을 보아내야 한다. 때로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낙엽 한 장에 온 신경을 곧추세우고 때로는 한발짝 멀리 떨어져서 방관자의 자세로 사태를 개관할 수 있어야 한다. 시인을 잠 못 들게 하고 목 놓아 울게 하는 원초적인 이 힘에 이름을 붙인다면 흥興만한 것이 있을까? 흥은 중국문학이론에서 계보가 오랜 용어이다. 부賦, 비比와 더불어 시경詩經 시의 3대 창작방법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공자는 󰡐시는 감흥을 일으킬 수 있다(詩可以興)'라는 말로 시의 학습을 제창하는 동시에 독자에게 감흥을 일으키는 기능을 시의 중요한 본령으로 파악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 감흥이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시인의 내부에서 자생되는 것인가? 아니면 외부에서 오는 것일까? 중국문학에서는 끊임없이 인간과 자연의 상호영향관계를 강조해왔다. 작가는 자연을 통제하고 재단할 수 없고 다만 자연에서 영감을 받고 이를 계기로 작품을 창조한다. 작가와 자연의 관계는 쌍방향적이다. 따라서 흥은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아 시인이 내면에서 다시 재창조해 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인 두보의 방랑은 興을 빚어내는 창작의 원동력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두보의 일생은 방랑으로 점철되었으니 이는 어쩌면 운명적이었던 듯하다. 그 중 시의 창작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띠는 것은 세 차례를 꼽을 수 있다. 그 중 첫 번째는 젊은 시절 견문을 넓히기 위해 떠났던 여행이다. 오월吳越지방(강소성과 절강성), 제조齊趙지방(산동성과 하북성의 남부) 및 양송梁宋지방(하남성 개봉開封과 상구商丘)으로 이어졌던 그의 여행은 도합 1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처음 여행을 떠날 당시 그의 나이는 갓 스물에 불과했으나 마지막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서른을 훌쩍 넘겼다. 여행 도중 처음 보는 수려한 자연과 명승고적은 젊은 시인의 시정을 일으켰고 여기서 알게 된 사회의 유력 인사들과 이름난 시인들을 통해 두보의 시야는 확실히 넓어졌다. 당시 두보는 이른바 󰡒임금을 요순 위로 올려놓는다"는 원대한 정치적 이상이 있었고 그 꿈은 곧 이루어질 듯 보였다. 시에서는 낭만적 흥취를 노래했고 그러한 심정은 그의 시에 보이는 '승흥乘興'이라는 두 글자로 집약된다.


시인 두보가 현실주의, 혹은 사실주의 시인으로 거듭나게 된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안사安史의 난을 겪으면서이다. 개인적으로는 10년을 뚜렷한 성과 없이 장안에서 해바라기처럼 벼슬만을 바라보다가 결국 자신의 정치이상과는 천양지차라고 할 수 밖에 없는 미미한 관직을 얻고 터져 나오는 실소를 삼키며 장안 부근에 맡겨둔 처자를 만나러 갔을 때 이미 안사의 난은 발발했고 이후 두보의 삶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란에 휘말리게 된다. 전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장안에서의 곤궁한 삶에 대한 불만이 주로 개인적 차원의 것이었다면 전란이 발발한 뒤 두보는 비로소 사회전체를 도탄에 빠뜨리게 만든 위정자의 부패와 무능에 대해 절실하게 인식하고 이를 통렬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낭만적 흥취나 개인적 감상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바로 이때의 창작으로 그의 시는 시로 쓴 역사서와 같다는 의미에서 󰡐시사詩史'라는 칭호를 얻는다.


그의 일생에서 두 번째의 방랑은 바로 759년 화주華州를 떠나 진주와 동곡을 거쳐 세밑에 성도에 정착하기까지 일년 내내 방랑으로 이어졌던 경험을 꼽아야 하리라. 759년 관직을 버리고 정처 없는 길에 오른 두보의 전후 사정은 이러하다. 755년 안사의 난이 발발하자 벼슬이 문제가 아니라 장안에 지체하다가는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두보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고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된 뒤 사천으로 피난 간 현종의 빈 자리를 대신하여 숙종이 왕위에 오르자 두보는 이를 경하하기 위해 달려간다. 그 와중에 장안에서 반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천신만고 끝에 황제를 만나게 되자 숙종은 노고를 치하하여 좌습유 벼슬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바로 이때 현종의 재상인 방관이 동관의 방어에 실패하여 그를 파면하려고 하자 두보는 이를 극구 말리는 간언을 하게 되고 이로 인해 숙종의 미움을 사서 파직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주변 사람들의 만류로 간신히 파직은 면하고 좌천으로 끝났지만 두보의 심기는 몹시 불편하고 불안했다. 759년의 정처 없는 유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당시 기근마저 심각했고 정국은 혼란스러웠다. 두보는 착잡한 심정으로 먼 길을 떠나 진주로 향했다. 물산이 부족한 진주에서 오래 머물 수 없게 되자 동곡을 거쳐 한겨울의 추위를 무릅쓰고 이동을 감행하여 결국 세밑에 성도에 정착하게 되었다. 재난의 의미를 묻고 자신의 삶을 반추하면서 시인은 내면적으로 성숙했고 그 과정에서 시 창작의 원동력으로서의 흥은 단순하고 일회적인 경물 묘사를 벗어나 보다 시의 본질과 밀착하게 되었으며 비유와 상징의 단계로 나아갔다. 󰡐견흥遣興󰡑은 바로 이즈음의 창작 심리를 대변하는 말로 여겨진다. 󰡐감흥을 풀어내다󰡑라는 말에서 흥은 이제 더 이상 낭만적 흥취가 아닌, 시름의 다른 이름이 되고 있다. 󰡒칠나무는 쓸모가 있어 껍질이 벗겨지고, 기름은 주위를 밝힐 수 있어 태워지네(漆有用而割, 膏以明自煎)󰡓라든가 󰡒칩거하는 용은 삼년을 동면하고 늙은 학은 만리를 나는 마음을 지녔다(蟄龍三冬臥, 老鶴萬里心.)󰡓와 같은 표현에서 보듯 시인은 이제 더 이상 눈앞의 경물 자체를 노래하고 있지 않다.


이제 시인의 세 번째 방랑을 따라가 보자. 시인의 삶은 성도에서 안정되면서 심신의 평화를 찾는 듯 하였으나 기쁨은 오래가지 못하고 머물러있는 동안에도 향수와 더불어 조정에 돌아가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시달려 결국 성도를 빠져나왔고 이후 그의 삶은 더더욱 힘든 방랑에 내맡겨질 수밖에 없었다. 만년의 삶은 타향을 전전하며 향수에 시달렸고 노년의 근심과 질병이 더해졌으나 시인으로서의 자긍심은 더욱 높아갔다. 󰡐견흥󰡑에 이어 새롭게 주목할 만한 단어는 '시흥詩興'이다. "시로써 인간세상 흥을 다했으니, 이제는 바다로 들어가 신선산을 찾을 일이다.(詩盡人間興, 兼須入海求.)" 낮은 목소리로 부르는 이 노래에서 시인은 스스로 󰡒시로써 인간세상 흥을 다했다"라고 말한다. 767년 사천성 외진 곳 기주에서 지은 이 시에서는 시인으로서의 자부심과 더불어 세간의 향락과 고초를 모두 겪고 난 자의 담담한 자유가 느껴진다. 이러한 자유는 2년 전 정든 성도를 떠나 앞날을 예측하기 힘든 뱃길에 오를 때부터 이미 노정되어 있던 것이 아닐까? <떠도는 밤의 회포旅夜書懷>에서 두보는 이미 자신을 천지간을 아무런 구속 없이 비행하는 갈매기 한 마리에 비유했었다.


시인 두보가 품었던 뜻은 시종일관 정치를 바르게 펼쳐 백성을 구원하는 데 있었으나 운명은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고, 전란의 틈바구니에서 그의 삶은 자기 한 몸도 돌보기 힘들만큼 곤란해지는 때가 많았다. 시인으로 이름을 남기는 것이 그의 꿈은 아니었으나, 역설적으로 상황이 열악해질수록 그는 더욱더 시인의 눈으로 피폐한 사람과 영락한 사물을 따뜻하게 돌아보고, 보다 많은 사람이 행복해지는 방법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열정적으로 시를 썼다. 사후에 그에게 붙은 '시성(詩聖)'이나 '시사(詩史)'라는 칭호는 그의 고단하고 정직했던 삶에 대한 애도 어린 칭송이 아닐까 한다.


김의정 (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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