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Keiner liebt mich>는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라는 뜻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을까? 독일 여성작가이자 감독인 도리스 도리(Doris Doerrie)의 독특한 컬트페미니즘 영화 <파니 핑크, 1994>는 무겁지 않게 때때로 폭소를 터트리게 만들면서 이 진지한 질문에 답한다.
독일 쾰른 변두리의 낡은 아파트. 입주자들 역시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뒤섞여 있다. 이들 가운데 공항의 소지품 검색원인 29세의 독신여성 파니 핑크(마리아 슈라더 분)가 있다. 그녀는 혼자라서 외롭다는 것 빼고는 집, 직업, 친구 등을 모두 가진, 부족할 게 없는 인물이다. 내심 남자가 있기를 바라면서도 다른 한편 자신만의 자유를 포기하기 싫어한다. 작가의 말처럼 자유롭지만 외로운, 현대적인 삶의 방식을 살아가는 이 시대의 전형적인 여성상이다. 파니는 '여자가 서른 넘어서 결혼할 확률은 원자폭탄에 맞을 확률보다 낮다'면서 자신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자신감' 카세트테이프를 들으며 마인드컨트롤을 하거나 '스스로 결정하는 죽음'이라는 모임의 회원으로 관을 짜서 방에 두기도 하지만 항상 소심하고 외롭다.


또 다른 입주자인 아프리카계 독일인 오르페오는 사이비 점성술사 겸 게이 바에서 립싱크로 노래하는 게이 󰡐가수󰡑다. 때로는 거리에서 구걸까지 하지만 그는 늘 가난하다. 그래도 그는 파니 핑크가 갖지 못한 스스로를 개발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자신 앞에 놓인 상황을 이해할 줄 아는 오르페오는 특정상황에 대한 유머가 있으며 이를 넘어 그 상황을 즐길 줄 아는 창조적 인물이다. 그에게는 살짝 사기꾼 냄새가 나지만 관객의 호감을 끌어내는 능력이 있다.


어느 날 고장난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난 후 파니는 배우자 찾기 점을 치기 위해 오르페오를 찾아간다. 그러나 파니가 기대했던 아파트 관리인과의 로맨스는 깨어지고, 이때쯤 사랑하던 남자에게 버림받은 오르페오는 임대료 미납으로 아파트에서 쫓겨나 파니의 집에 들어와 눌러 앉는다. 처음에 돈을 뜯어내기 위해 파니에게 접근했던 오르페오지만, 다른 듯 비슷한 상황에 놓인 두 사람은 이후 특이한 우정을 쌓아간다. 병든(혹은 병든 체 하는) 오르페오를 돌보는 과정에서 둘은 의지하고 서로를 친구로서 사랑하게 된다. 있는 그대로 상대방을 받아들이며 서로의 약점을 감싸고 위로해준다. 영화는 상처 입은 이 두 사람의 자기 치유과정을 그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침내 오르페오를 떠나보낸 파니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마치 그동안의 자신의 모습을 오르페오와 함께 떠나보낸 것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자신감을 얻고 또 긍정적으로 변한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파니의 생일축하장면이다. 서른 번째 생일날, 파니는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어둡고 적막한 방으로 들어선다. 오르페오는 온몸에 해골 모양의 보디페인팅을 한 채, 캄캄한 방에서 파니를 위한 깜짝 파티를 준비한다. 서른 개의 촛불로 장식된 케이크를 들고 에디트 피아프의 'non, je ne regrette rien(아니오, 난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요)'를 립싱크로 불러주는 오르페오. 파니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우울하게 지낼 뻔 했던 서른 살 생일을 행복하게 마무리한다. 폭발적인 에너지를 탑재하고 전율을 일으키는 피아프의 노래는 <파니 핑크>의 시작과 끝 그리고 중간 중간에 삽입되어 영화의 아름다움을 북돋운다. 피아프의 샹송 외에도 모차르트의 '밤의 여왕' 아리아, 오르페오가 립싱크로 부르는 󰡐배가 올 거예요󰡑 등 이 영화의 탁월한 음악선택은 환상적인 우울한 푸른 색조와 더불어 이 영화의 미장센을 끌어올린다.


결국 아무도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우울해하기보다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과 언제나 '지금'이라는 시간만이 더 소중함을 영화는 짐짓 가벼운 듯이 설득한다. 관을 아파트 창밖으로 던져버리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보듯 과감히 세상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중요하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서 모든 스탭이 함께 부르는 '난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요'를 들어보자.


'아니오, 난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남들이 내게 했던 행복도 슬픔도 내게는 같은 거예요. 난 과거에 신경 쓰지 않아요. 그건 대가를 치뤘고 사라지고 잊혀졌어요…
나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거예요. 나의 삶, 나의 기쁨은 지금 당신과 함께 시작되는 것이니까요.'
제 5회 독일 영화상 우수 작품상, 여자 주연상 수상.

윤시향 (유럽문화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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