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 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브레히트(Brecht)의 시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살아남은 자의 슬픔」 전문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란 말은 언젠가부터 관용어구가 되어 버렸다. 80년대, 그 시기를 살아남은 사람들을 일컬어 저 말은 흔하게 쓰였다. 마치 습관처럼. 그리고 수많은 관용어구가 그렇듯, 나는 그 기원을 알지 못했다. 일 년 전 어느 날, 시를 쓰는 친구의 자취방에 놀러갔다가 책장에 꽂힌 노란색 표지의 낡은 시집을 보고, 그에게 브레히트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특유의 저음으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읊어주었다. 내 친구가 인간적으로 아름다워 보였던 건 그 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곧바로 그 책을 ‘영구 대출’했다. 그 후 오랫동안 브레히트는 내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 책은 분명 시집이다. 그런데 왜 소설을 읽는 느낌이 들까. 단지 시집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서정과 서사성 때문에? 아니다. 아무래도 그의 시를 보고 있노라면 2차 세계대전의 비참함과 아우슈비츠의 분노, 절망을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싯구는 많은 얘기를 하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살아남은 자는 왜 슬픈가. 폭력적이고 위악적인 공기로 가득한 이 세상 속에서 죽지조차 못한 채 여전히 발 붙이고 비루하게 숨 쉬는 자신에 대한 슬픔이다(브레히트는 ‘강한 자는 살아남'기 때문에 자신이 미워졌다고 했다). 단지 조금 운이 나쁘고, 조금 더 예민한 탓에 이 공기 속에서 살아남지 못한 친구들에 대한 죄책감이다.

 브레히트는 독일 문학사에서 괴테만큼 많은 시, 소설, 희곡 등을 남긴 작가다.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에 그는 펜으로 히틀러에 맞서고자 했다. 어찌 보면 그는 시를 썼다기보다, 시를 사용할 줄 안 사람이다. 시에 교훈이 있고, 독자들을 꼬집는 구석이 있다. 그런가하면 다음과 같은 시도 있다.

 그녀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땅 속에 묻었다/ 꽃이 자라고, 나비가 그 위로 날아간다……/ 체중이 가벼운 그녀는 땅을 거의 누르지도 않았다/ 그녀가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나의 어머니」).

 죽음이 가볍다(Tod ist leicht)는 인식. 이 시는 오래도록 내 가슴에 남았다. 1956년 별세한 브레히트는 이제 꽃처럼, 나비처럼 또는 바람으로 우리 곁에 남았다.

 강 건 모 (한국어문학부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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