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답과 인사를 잘하는, 그러니까 인성교육이 제일 먼저라고 생각해요"
김준환 감독, 그는 2003년부터 이와 같은 신념으로 우리대학 야구부를 책임지고 있다. 우리대학 야구부가 '2010 전국대학야구대회 춘계리그'에 우승할 수 있도록 지휘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요즘 운동선수들은 수업을 일절 안하고 운동만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감독으로 들어왔을 때 생각한 것이 3가지 있죠. 가장 중요한 것은 대답과 인사 잘하기, 두 번째는 영어공부하기, 세 번째는 자기 표현력 기르기였죠"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한 김 감독이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을 떠올리며 대학생인 우리대학 야구선수들을 배려한 것이다.
"너무 운동만 하는 것도 좋지 않아요. 운동선수들하고만 어울릴 것이 아니고 일반학생들하고도 어울리면서 대학생활을 즐겨야죠"
40여 년 동안 야구공을 놓지 않은 김 감독의 야구인생은 그의 고향인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에서 5학년 때 전주로 이사 오면서부터 시작됐다.
"이사를 한 후 새로 입학한 초등학교에 야구부가 있었어요. 야구하는 모습이 신기하고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죠"
김 감독의 전환점은 고등학교 3학년 때 있었던 황금사자기 경기였다. 그는 1972년 '제26회 황금사자기 쟁탈 전국지구별 초청 고교야구대회'에 나가 부산고를 상대로 9회 말 투아웃 상황에서 기적 같은 역전 드라마를 만들었다. 8회까지 1-4로 지고 있던 군산상고는 9회 말에서 선두타자 김우근이 안타를 치고 나가면서 후속 타선이 만루를 만들었고 김일권이 밀어내기로 1점을 추가해 역전의 발판을 만든 뒤 양기탁의 2점 적시타로 동점을 만들었다. 9회 말 2아웃 상황에서 김 감독이 들어섰고 이날 김 감독의 좌전안타는 군산상고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군산상고가 '역전의 명수'라는 닉네임을 갖게 된 것도 김 감독 때문이다.
이후 '상업은행' 실업팀을 거쳐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해태타이거즈 선수가 됐다. 프로야구 선수 󰡐김준환󰡑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그 옛날 해태타이거즈 막강 타선을 떠올릴 것이다. 해태타이거즈 코치를 거쳐 쌍방울 레이더스의 감독을 맡았지만 쌍방울 레이더스가 SK로 인수되면서 2001년 프로야구에서 은퇴를 하게 된다.
"처음 원광대 야구부 감독으로 부임한 후 우승할 때까지 선수들과 숙소생활을 하기로 마음먹었어요. 들어오고 2년 만에 우승을 해서 나오긴 했지만요. 감독이 숙소생활을 하니까 선수들이 많이 불편하고 부담됐었겠죠. 선수들이 우승했으니까 빨리 나가라고 재촉하더라고요. 하하"
우리대학 야구부는 2005년 '제39회 대통령기 전국대학야구 선수대회' 결승전에서 성균관대를 7대 4로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이 경기에 최우수선수상과 감독상, 공로상 모두 우리대학 선수와 감독, 체육실장이 수상했다.
이후 꾸준히 경기에 출전해 좋은 성적을 거뒀다. 매번 준우승의 결과를 낳아 아쉬웠지만 지난달 24년 만에 '2010 전국대학야구대회 춘계리그' 우승이 그 동안의 아쉬움을 씻겨 주는 듯 했다.
"대학야구대회 중에 제일 큰 경기죠.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우리선수들이 촌사람들이어서 카메라 돌고 하니까 긴장하기도 하고 큰 대회다 보니까 선수들이 심적 부담이 많아서 실력발휘를 제대로 못하기도 했죠(웃음). 하지만 우승해서 정말 기쁩니다"
선수들을 오전, 오후, 야간 하루에 3번씩 훈련을 시키면서도 수업에 최대한 많이 들어가라고 말한다.
"학내에 야구연습장이 있으니 단체복을 입고 수업에 들어갈 수도 있고 시간나면 바로 나와서 훈련할 수도 있다는 것이 장점이죠"
전국 대학 32개 야구팀 중에 학내에 야구 연습장이 있는 곳은 우리대학이 유일하다. 때문에 우리대학 선수들은 A급의 훈련량을 자랑하고 있다. 김 감독은 선수들에게 훈련도 좋지만 대학생활을 즐기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말한다.
"우리선수들에게 즐기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친구들과 소주 한잔 하면서 인생을 논해보기도 하고 말이죠. 후회 없는 대학생활을 즐겼으면 싶네요. 수업도 많이 들어가면서요. 항상 훈련 열심히 하는 선수들에게 고맙기도 해요"
김 감독 역시 야구선수를 어린 시절부터 한 탓일까. 선수들을 좀 더 배려하고 아끼려는 마음을 그에게서 느낄 수 있었다. 야구선수가 아닌 그의 자식들에게는 어떠할까 궁금했다.
야구 감독 김준환이 아닌 아빠, 남편 김준환은 어떨까?
'빵점짜리 아빠, 빵점자리 남편이죠 뭐' 괜스리 먼 곳을 쳐다보고 김 감독이 말했다.
"아내가 아팠을 때였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든 시기였는데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하고 MVP를 받고 난 후 아내의 병도 점차 나아졌었다. 그래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 같다"
선수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어떤 것이냐는 질문에 MVP를 수상했던 1987년 한국시리즈라고 말한 김 감독이었다. 한국시리즈에서 MVP를 받아서였을까? 아니다. 김 감독, 자신의 활약에 기뻐한 아내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 감독의 눈빛과 말투에서 느낄 수 있었다.
"다정하지도 못하고 따뜻한 말도 잘 못해요. 운동을 해서 그런지 자기 표현력이 많이 부족한 탓이죠. 하지만 요새는 자식들과 소주한잔하면서 가까워지려고 노력해요. 마음처럼 되진 않지만. (웃음)"
"야구는 인생의 축소판과 같아요. 희노애락이 있죠"
김 감독의 인생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운동선수 감독이라 '좀 무섭겠지', 첫인상에서 '무서워보여'란 생각이 씻은 듯 없어졌다.
야구선수들을 생각하는 김 감독의 따뜻한 마음. 친구 같은 아빠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그의 마음. 아내를 사랑하는 그의 마음에서 진정한 따뜻함이 무엇인지 한 수 배우고 돌아왔다.
등산할 땐 힘들지만 정상에 올라서서 항상 '야호!'를 외치며 웃지 않는가. 힘들겠지만 김 감독의 지휘아래 더 높고 아름다울 정상을 향해 달려갈 우리대학 야구선수들을 응원하고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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