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작가 심상대를 만난 때는 4년 전 어느 문학캠프 자리에서였다. 그 무렵 나는 그의 첫 소설집 「묵호를 아는갯를 읽고 작가를 꼭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침 어느 문학캠프에 그가 초청작가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헐레벌떡 접수를 했고, 다시 한 번 그의 작품집을 꼼꼼히 읽었다.

 이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그야말로 일곱 빛깔 무지개처럼 다양한 소재, 형식, 문체를 갖고 있다. 책을 펴는 순간 마주친 「묘사총」의 섬뜩하면서도 고전적인 울림에서부터 「병돌씨의 어느 날」의 황당하면서도 유쾌한 비극을 지나, 진지하게 「묵호를 아느냐」고 묻는 리얼리즘적 문체로 돌변, 쉬르리얼리즘 실험소설의 극단까지 몰고 간 「몬드리안과 로스코를 위한 구성」과 같은 형식까지. 결국 선녀와 나무꾼을 각색한 「나무꾼의 뜻」으로 명쾌한 마침표를 찍는 작가는 복화술사처럼 다양한 목소리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고 있다. 

 그는 캠프에 참가한 사람들이 강당에 들어와 자리를 채우고 있을 때도 한쪽에 외떨어져 무언가를 끼적거리고 있었다. 잠시 후 강단에 선 그는 자신이 필명이 담고 있는 의미와 문학관에 대해 설명하고(그는 그 동안 필명을 여러 번 바꾸었다) 문장의 운율을 강조하면서 가벼운 춤을 추었다. 나는 그의 발랄함이 좋았다. 그러면서 「묵호를 아는갯라는 단편에 담아놓은 상징을 발견하는 평론가가 없다고 개탄했다.

 작가 자신의 작품을 정말 '세계명작'이라고 생각하느냐는 한 청중의 날카로운 질문에도 그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나는 그가 오만하다고 생각했으나 불쾌하지는 않았다. 예술가의 오만은 뭇 사람들의 오만과는 다르다. 그 오만은 전혀 공격적이지 않다. 오히려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면이 있다. 다자이 오사무라는 일본 작가는 첫 소설집 만년을 쓰기 위해 그 전에 습작한 백여 편의 작품을 불태웠다고 한다. 그 불태운 백여 편에 대한 잣대는 오로지 다자이의 것이다. 양지의 오만이든 음지의 오만이든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강연이 끝난 후, 작가의 서명을 받으려고 줄 선 사람들을 뚫고 나는 그에게 감히 내 소설과 그의 첫 소설집을 내밀었다. 지금의 나로선 도저히 감행하지 못할 일이다. 그는 물리치거나 비웃지 않았다. 다만 내 소설을 한 번 주욱 훑어본 후, 그의 첫 소설집에 이렇게 써주었을 뿐이다. -강건모님께. 소설 좀 잘 쓰시오.

 오랜만에 그의 책을 펴보니 무주에서 보낸 어느 해 여름 밤의 풍경이 자란자란 떠오른다. 자신이 예술가임을 강력하게 주장하던 몇 년 전 이 작가의 용감한 외침이 벽에 부딪쳐 저음으로 가라앉지 않기를 진정 바란다.              

강 건 모 (문예창작학과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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