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술 - 여신 : 그녀는 우리에게 누구인가

여신에 대한 우리의 관념
' 여신'이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흔히 팔등신, 전아(典雅)한 아름다움, 조화로움, 성적 매력 같은 말을 떠올린다. 그리고 머리 속에는 이런저런 화첩이나 TV에서 본 밀로의 비너스상,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그리스 조각이나 폼페이 벽화에서 본 관능적인 여신들의 이미지가 줄지어 지나갈 것이다(그림 1).

 그런데 우리가 익히 아는 여신의 이런 이미지는 인류 역사에서 보면 비교적 최근, 좀더 정확히 말하면 3,000 전쯤에 형성된 것으로, 기원전 30,000년 경에 시작된(그래서 기원전 7,000년 경까지 지속된) 구석기시대를 인류 역사의 여명기로 볼 때, 우리가 문화를 일구며 살아온 역사 전체의 10분의 1 정도에 해당하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에 형성되고 통용된 이미지라 할 수 있겠다.

 여신이 하나의 절대적인 존재, 신비로운 힘과 권능을 가진 신으로 숭배되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시대로 보인다. 프랑스나(그림 2) 터키의 샤탈 휴익에서 발굴된 유적들을 보면 구석기 시대에 이미 여신은 풍요와 다산의 상징, 만물의 위대한 어머니로 숭배되었고, 크레테 섬의 크노소스 궁전에서 발굴된 미노아 문명의 여신상들(그림 3) 역시 풍만한 가슴을 드러내고 만물의 생명력과 부활을 상징하는 뱀을 양 손에 움켜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런 위대한 모신상은 적어도 서양에서는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서기 313년 무렵, 모든 이교(異敎)의 신들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각지에 있던 여신의 신전들이 파괴되고, 그 사제들이 마녀로 치부되고, 여신이 지녔던 힘과 권능은 사악한 세력으로 악마화되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여신들의 기억은 성모 마리아라는 단일한 캐릭터 안으로 흡수 통합되거나, 온갖 괴물과 마녀로 변용되었고, 이 두 번째 타입은 뱀파이어나 살로메, 그리고 온갖 대중 매체에 등장하는 '치명적인 여인(femme fatale)'들로 진화했다. 그렇다면 선사 시대에 그토록 보편적으로 숭배되던 여신들이 언제부터 어떤 경위로 변화하기 시작한 걸까?                  

 

 여신의 존재와 숭배시작 '구석기 시대'


 뱀 - 여성비하와 그 합리화에 이용


 성모 마리아 - 여신의 변천사 보여줘

 

여신상의 변천    
 역사가들의 추정에 의하면 서구에서 여신 숭배가 남신 중심 종교로 대체된 것은 중앙아시아 초원에 살던 인도 유럽인들이 기원전 3500년에서 1천년 사이, 유럽의 남부 지역으로 이주한 무렵이라고 한다. 하늘신 종교를 가진 이들은 3200년 경에는 이란, 2200년 경에는 아나톨리아, 기원전 1400~1200년 경에는 그리스에 정착했고, 그 곳에서는 1000년 경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올림포스의 열두 신으로 이루어진 신앙 체계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하늘신 제우스의 아들, 그리고 그 자신이 태양의 신인 아폴로가 델로스에서 여신 또는 여신 숭배를 상징하는 뱀을 죽이고, 그 뱀의 이름(Pytho)을 자신의 이름 뒤에 붙인 것도 이 과정의 한 단계를 나타내는 일화이다. 영국의 수호성인 성 조쥐, 게르만 신화의 영웅 지그프리트, 스칸디나비아 신화의 베오울프 등, 유럽의 하늘신 종교에 등장하는 영웅들은 한결같이 여신을 상징하는 뱀이나 용을 살해하는 것으로 그 명성을 얻고 있다.

 뱀은 그 후에도 수많은 문화적 이미지로 변신, 여성의 이질성이나 위험성, 열등성, 부정적인 면을 형상화하고 부각시킴으로써 여성 비하를 합리화하는 데 이용되어 왔다. 만물의 창조자, 모든 신의 어머니, 풍요와 다산의 상징, 농경, 방직, 각종 도구 등 생활의 근간이 되는 기술의 발명 및 전수자였던(이는 여성들이 그런 일에 종사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관념이겠지만) 대모신(大母神)들은 그 풍요성의 상징인 뱀, 황소, 물고기 등과 함께 비하되거나, 그것들을 남신에게 넘겨주면서, 때로는 남신의 아내로, 때로는 그의 딸이나 연인으로, 그리고 때로는 그에 의해 처치되는 괴물로 전락했던 것이다. 

성모 마리아는 이런 여신의 변천 과정 및 그 결과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그녀는 이나나, 아스타르테, 이시스, 아프로디테 등 근동의 여러 여신의 속성들을 고루 물려받은 존재이다. 그녀는 1) 이시스처럼 남신의 어머니, 희생되는 풍요/청년신을 애도하고, 그의 부활을 목도(目睹)하고, 2) 새벽별의 여신, 선원들의 수호자이며, 푸른색(하늘의 여신)과 붉은색(대지의 여신)을 갖춘 옷을 입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세 가지 면에서 그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즉 성모는 1) 신성(神性)이 완전히 결여된 순전한 인간이고, 2) 선사 및 고대 여신들의 가장 큰 특징이 풍요성과 번식력, 성적 에너지, 만물을 감싸안는 모성(母性)인데 반해 마리아의 경우는 그 순결성이 강조된다(無汚孕胎 Immaculate Conception). 가부장 신화 속의 여신들은 아테나, 아르테미스, 마리아의 예에서 보듯 처녀성을 유지하는 남신의 딸로 변화되는 예가 많은데, 이 순결성(asexuality)은 여신/여성의 자존성, 독립성보다는 남성의 절대적 소유권, 결혼 제도의 안정성을 반영한다. 그리고 성모는 3) 신자의 기도를 들어주는 신이 아니라 아들에게 그걸 전해주는 중개자일 뿐이다.

여신의 현대적 의미
 우리의 과학 문명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나 자신을 수없이 복제하거나, 은하계의 생성 과정을 역추적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자연이나 타인은 물론 자기 자신과도 건강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고, 이런 소외는 사회와 가정은 물론 개인 안에서도 많은 모순과 고통을 빚어내고 있다. 여신에 대한 역사적이고 포괄적인 이해는 그래서 더욱 절실하다.

 하늘에 고하거나 하늘에서 온 남신의 이미지가 우리의 종교를 독점할 때, 여성은 그 남신과 남성의 존재를 떠받치는 부수적이고 우연적인 존재일 수 밖에 없고, 이것은 사회에서의 여성 비하를 원천적으로 정당화해 주는 하나의 억압적 신화로 작용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선사 및 고대의 위대한 여신들에 대한 새로운 기억과 연구는 여성들이 자신의 참모습을 되찾고, 새로운 자아상, 더 건강한 사회상을 정립해 가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그림 4)

손 영 미 (영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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