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들어가는 말
 '대화하는 인간'에서 '인간'은 주제어이고, '대화'는 인간에 딸린 형용사이다. 이 형용사가 없으면 인간에 대한 내용이 불투명해진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미가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이다. 노동하는 인간, 사색하는 인간, 등 어떤 관점에서 인간을 해명하느냐에 따라 내용의 결과가 달라진다. 따라서 '대화하는 인간'의 논지를 바로 잡기 위해 먼저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물어야한다. 이에 따라 대화하는 인간과 인간의식의 연관성을 밝히되 인문학적 관점에서 봐야한다. 인간이란 플라톤 이후 헤겔에 이르기까지는 정신의 원리에 따라 형이상학적으로 해답을 찾고자 했고, 헤겔 이후부터는 육체의 원리에 따라 사변적적으로 해석해 왔다. 그러나 인간을 생물학적으로 해석하고자 한 철학자들이 플레스너 등의 인간학자들이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는 삶이고, 둘째는 앎이며, 그리고 셋째는 존재이다. 만일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에게는 어떠한 앎도 삶도 무의미하게 된다. 따라서 철학에서는 존재가 가장 우선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면서도 동시에 자연인가하면 동시에 우주공간속에 존재한다. 이를 우리전통에서는 원방박(圓方角)이라 하고, 원방각은 천지인을 말한다. 천(天)문학은 자연과학이고, 지(地)문학은 사회과학이며, 사람(人)에 관한 학문으로서 인문학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고, 사람은 자유로서 존재한다. 인문학은 인간 삶의 진폭을 넓히는 데는 필수적이지만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는 무력하다. 따라서 스티브 잡스는 인문학과 과학기술을 통섭하여 인문학과 과학의 한계를 한꺼번에 해결하고자 했다. 그는 성공했고 세상은 바뀌었다. 원 터치로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어찌 이 한 사람만이라고 하겠는가! 이로써 세계의 이목들이 인문학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인문학적 상상력은 하나의 가능성을 다양한 현실로 바꿀 수 있고, 다양한 현실을 사람됨의 가치로 바꿀 수 있다. 왜냐하면 인문학은 사람을 바꾸는 학문이고 사람의 생각을 바꾸는 가치의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문학에는 상상력이 필수적이다.

 II. 인문학적 상상력에도 논리가 있는가
 인문학은 삶과 앎의 의미를 인간의 문화로서 수용하여 가치론을 주장한다. 가치론의 지고는 신성에 있으나 사람에게는 미에서 이루어진다. 참 미는 가시적인 대상에 있지 않고 미 자체로 존재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절세미인이라고 해도 4,5십년의 세월을 이기지는 못한다. 세월 속에서 추는 날로 커져만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은 미인을 보지 않고 미 자체를 본다. 미 자체란 대상의 유무를 막론하고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순수한 호감이기 때문에 자연스러움을 거슬리지 않는다. 미 자체의 현상이 예술이고, 예술은 작품 속에 존재한다. 따라서 미란 아무나 창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천재만이 미를 창조할 수 있다는 칸트의 지론이 여전히 한편으로는 득세하고 있다.
 미 자체에 대한 물음이 끝나지 않음으로 인문학으로서의 철학은 인간의 인식과 인식능력으로서 되묻게 된다. 인식이란 참, 즉 진리는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참에 대한 인식은 인간의 삶에서 떠날 수가 없다. 인간의 삶과 앎을 보장하는 근거는 존재였다. 존재 자체란 보편적이고 무규정적이기 때문에 다가갈 수가 없다. 여기에서 형이상학적 사유가 요구되고 인문학적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인문학으로서 철학은 대화하는 인간을 자신과 사회, 그리고 세계를 함께 조망할 수 있게 한다. 나는 누구이고 너는 누구이며, 우리는 누구인가를 물음으로써 나와 너의 사회적 관계와 우리 모두의 세계적 연관성을 되돌아보게 한다. 때로는 나와 너의 토론이 필요하고 때로는 사회적 담론이 필요하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철학은 우리 모두의 사람됨가치로서 휴머니즘을 지향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쟁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평화의 방벽을 세워야할 곳도 사람의 마음이다."라는 유네스코헌장 제1조의 말을 새삼 귀담아 들어야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현대의 과학기술문명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보편타당성의 판단이나 합리성의 주장만을 따르지 않고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이를 위해 먼저 고정관념을 깨야한다. 왜냐하면 금기사항이 미지의 세계를 여는 열쇄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삼각뿔을 꼭지 점으로 세울 수 있어야 하고 우리 스스로 꼭지점으로 설 수 있어야한다. 역행이 곧 새로운 생산성이기 때문이다. 이를 가능케 하는 기초학문이 인문학이고, 철학은 우리자신으로 하여금 근원을 사유토록 한다.

 III. 인문학으로서의 철학은 무엇을 추구하는가
 인문학으로서의 철학은 사유의 대상을 자기 안에다, 즉 목적 자체에다 설정한다. 그 때문에 획일적이고 법칙적인 성격만을 띨 수가 없다. 인간은 생물학적-사회적 존재이지만 문화적-철학적 존재로서 사람됨과 자유함을 지고의 인문학적 가치로 삼는다. 이에 인문학은 '하나의 절대적 기점'(an archimedian point)을 강요하지 않음으로써 철학의 근원성보다는 인간 삶의 연관성을 중요시 한다. 존재 자체를 위해서는 근원성이 중요하나, 존재하는 것을 위해서는 인간 삶이 중요하고 과정 자체의 이해가 중요하다.
 철학은 인간 삶의 의미와 가치를 대상으로 삼는다는 의미에서 자기 스스로를 창조하는 사람됨의 학문이다. 그러나 그 실천성 때문에 무력하다면 철학의 실천가능성을 '대화하는 인간'에게서 찾을 때 실현가능하고, 그것이 인간본래의 휴머니즘을 실현하는 길이 된다. 특히 인문학에서 대화의 실천가능성은 철학이 사람의 생각을 바꾸는 구상력의 학문이기 때문이다. 철학을 실천할 수 있는 현장은 먼저 '대화'(Dialog)이고, 대화는 인문학적 방법론에서 두드러진다. 그 다음은 '소통'(Kommunikation)이고, 소통은 사회학적 방법론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이 모두는 철학적 근원성에서 이루어져야한다. 먼저 교육학적 틀이 중요한 것은 인간다움을 실현하는 데는 대화가 우선하기 때문이고, 사회학적 틀이 중요한 것은 인간의 공동체의식을 사회화하는 데는 철학적 구상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서도 이론이나 방법론이 철학적으로 정당화될 때 교육학적 방법론에서는 대화의 철학이 필수적이고 사회과학적 방법론에서는 소통의 철학이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대화란 무엇이고 소통이란 무엇인가? 대화는 서로 마주보고 의견을 나누는 것을 말한다. 대화에는 말하는 사람이 있어야하고 사안이 있어야한다. 사안보다는 사람이 우선이고 서로간의 신뢰성이 우선이다. 신뢰성을 전제로 하는 대화에는 말할 수 있는 능력과 들을 수 있는 능력, 그리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한다. 그러나 소통에는 신뢰성보다는 정당성을 가지고 상대방을 설득하는 논의가 필요하다. 논의의 전제조건은 사회성이고 정당성이다.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먼저 논리적 근거가 제시돼야하고 사실의 연관성이 짚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논의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논의의 결과로서 합의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합의가 담론으로서 소통의 궁극적 목적이라면 합의는 진리의 한 척도가 된다. 이때 진리는 절대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진리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화에서는 물론이고 소통에서도 진리란 소유가 아니기 때문에 상실될 수 없다. 그럼에도 진리에 대한 욕망은 모든 강제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자신의 해방감에서 비롯된다. 인간해방이 대화에서는 사람간의 신뢰성회복을, 그리고 소통에서는 국제간의 정당성회복을 전제로 한다. 이 양자는 차원을 달리하나 진리로 통하는 길은 하나이다. 그러나 이 길은 시대적으로 다양하여 심화되기도 한다.
 대화의 철학을 현대사회에서 정초한 사람은 부버이고, 소통의 철학을 정립한 사람은 야스퍼스이며, 소통을 행위이론으로 정당화한 사람은 하버마스이나, 디지털시대에서 대화와 소통의 담론을 새로 마련한 사람은 플루서이다. 그에게는 부버나 야스퍼스, 심지어 하버마스도 더 이상 통하질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의 지론들이 문자시대의 아날로그에 의한 처방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루서는 기원전 2000년대에 문자가 발명됐고, 기원후 오늘날 2000년대에 영상이 발명됐다는 디지털시대의 사회관에서 출발한다. 그는 산업사회에서 지고의 가치가 노동이었으나 디지털시대에서는 오직 정보라 하고, 정보생산의 과정으로서 대화와 소통을 수용한다. 정보생산의 첫째 과정이 대화이고, 둘째 단계는 소통이다. 대화에서는 정보가 생산되고, 소통에서는 정보가 기억으로서 저장된다. 대화는 소통과 대립되나 상호 연관도 된다. 따라서 이 양자는 상호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고 우선순위도 없다.
 대화나 소통의 현실사태는 시공간이라는 4차원의 세계이다. 이 현실세계가 추상화된 것이 3차원의 입체로서 조각품이고, 다시 추상화된 것이 2차원의 평면인 회화(사진)이며, 다시 추상화된 것이 1차원의 선으로서 문자(텍스트)이다. 이제 디지털시대에서는 0차원의 점들로서 영상(화소)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여기에서는 현실과 조각, 그림과 문자 그리고 점, 이 점은 영상디자인의 디지털로서 언제 어디서나 시공간을 초월한다. 이 디지털시대 소통의 철학적 진원지는 플라톤이다. 그는 이데아의 세계를 참된 현실세계라 하고, 현실의 우리 삶의 세계를 가상세계라고 했다. 이 현실세계가 어떻게 가상세계란 말인가? 그렇다고 이 현실이 가상이 아니고 무엇인가하고 되묻는다면 우리는 할 말이 없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이 가상공간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가상이야말로 단순한 가상이 아니라 바로 현실이다. 이 말은 패러다임의 현장이 바꿔졌음을 말한다.

 IV. 디지털시대에서도 인간성실현은 가능해야 한다
 디지털시대의 소통은 지금까지의 교육방식과 차원을 달리한다. 전통교육이 주입식서당교육이었다면 학교교육은 토론식교육이다. 서당교육은 권위주의와 타율성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서로가 대화할 수 있고 소통할 수 있는 기회마저 허용되지 않았다. 이에 토론식학교교육이 서당교육을 대신함으로써 상호간의 대화가 가능하고 소통이 가능하며, 또한 비판이 가능했다. 이 학교교육이 사회적 공동체의식의 실천성을 가능케 했다고 해도 이 디지털시대가 아날로그의 토론식학교교육을 용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선(線)의 역사시대가 점(pixel)의 탈역사시대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디지털교육이 현재 우리전체를 대신한다. 사람의 설자리가 없는데 도대체 인문학의 설자리는 어디란 말인가! 인문학 자체가 자기성찰의 근원성이고 자기역행의 본래성이며, 또한 자기반성의 인격성에 근거한다면 사람이 사람됨의 도리를 다하도록 하는 '인간성실현교육'은 이 디지털시대에서도 인간교육의 궁극적 목적이 아니겠는가! 교육의 형태는 바뀌었어도  인간성 자체가 바뀐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인간교육을 위한 인문학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인문학이야말로 희극 대신에 비극으로서의 문학, 사건 대신에 고통으로서의 역사, 그리고 불변의 존재 대신에 무에 대한 명상으로서의 철학, 더욱이 새 삶을 가능케 하는 인간존재를 되짚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적 휴머니즘은 자기 스스로를 미적 새로움으로 거듭나게 해서 사람됨의 가치와 자유의식의 가치를 깨우치게 한다. 의식이란 자신을 깨닫는 사람에게만 있고, 그렇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없다. 이를 바로 직시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인문학적 자기의식의 사람들이다. 근원을 사유할 수 있는 사람만이 참 현실을 직시할 수 있고, 참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인문학적 휴먼들이다.
 

백승균 교수(계명대 목요철학원장)

 <필자소개>
 · 고려대 중퇴. 한국외국어대 학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석사.
 · 독일 튜빙겐대학 철학박사.
 · 계명대학교 인문대학장, 대학원장, 부총장, 독일정부초청교환교수(DAAD).
 · 교육인적자원부 해외파견교수, 대한철학회장 역임.
 · 현재 계명대학교 목요철학원장, 대한철학회 이사장.
 · 저서로 『역사와 역사성』, 『변증법적 비판이론』, 『호스피스철학』, 『철학적 인간학』, 『세계사적 역사인식과 칸트의 영구평화론』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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