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란에는 원대신문사의 연속기획 <우리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와 글쓰기센터의 연속기획 <세계고전강좌> 원고를 번갈아 싣습니다. 특히 <우리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에는 2012년 1학기부터 새로 개설된 '글로벌인문학' 강좌의 내용도 게재합니다. 국내외 여러 석학들이 함께 참여하는 이들 연속기획을 통해 인간 이해와 사유의 깊이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1. 진리에의 충동

  밤하늘을 바라보면 별들이 하늘을 가득 매우고 있다. 그 많은 별들은 모두 자신들의 궤도를 따라 움직인다. 달도 지구도 마찬가지다. 무심한 천체들이 무슨 지조라도 지키듯  운행의 규칙을 지킨다. 해바라기는 여름날에 작렬하고 코스모스는 가을바람 속에 나부낀다. 제비는 꼭 봄에 오고 기러기는 겨울 하늘을 난다. 이렇게 산천초목이 질서를 좇아 피고 지는가 하면 곤충과 새들도 때를 맞춰 오고 간다. 아마 우주와 세계는 무질서나 카오스의 덩어리가 아닌 질서와 로고스의 조합과 같다. 인간은 오랜 시간 신통한 우주의 비밀, 세계의 진실에 목말라 했다. 
  진리를 추구하는 대표적 집단은 학문하는 사람들이다. 과학자와 신학자가 포함되겠지만 인문학적 진리에의 충동에 몸살을 앓는 부류는 철학자들일 것이다. 철학자들은 진리의 효용적 가치를 염두에 두지 않고 진리 자체를 향해 열정을 쏟는다. 진리란 사실과 진실의 가치를 지니기 때문에 인간의 진리충동은 가장 인간다운 성향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 같은 진리의 순교자를 낳기도 했다.
  우리는 상식에 의존해 산다. 해는 동족에서 떠 서쪽으로 진다는 상식이 우리의 시간 의식이다. 하지만 천동설은 초보적인 과학적 지식에 백기를 든다. 자연과 인간의 내면을 조금만 관찰해도 우리의 상식은 많이 틀린다. 우리는 막강한 상식으로도 풀리지 않는 난문제(aporia)에 봉착하게 된다. 자신의 무지가 폭로되고 진리에의 외경심이 생긴다. 플라톤은 "경이의 염이야말로 지혜를 사모하며 탐구하는 자의 정이다. 철학의 시초는 이 외에 없다."고 말한다. 허위를 경계하지 않고 진리에 무심한 자는 철학의 단초에서 실패한다. 
 철학은 애초부터 허위와 오류를 배격하고 진리의 속살을 천착하는 행위다. 이러한 진리에의 동경은 사랑(eros)이다. 철학적 사랑은 자신의 무지를 방관도 절망도 아닌 진리를 향한 치열한 도전을 감행한다. 진리에의 길은 험난하고 진리에의 충동은 난파의 위험에 노출된 항해사처럼 늘 모험과 조우한다. 그러나 인간은 진리를 향한 충동으로 인해 인간의 품위를 지탱할 수 있다.
 
 2. 형이상학적 충동
 쇼펜하우어는 인간을 일러 '형이상학적 동물'이라고 말한다. 어떤 고등 동물도 가능하지 않은 소질이다. 인간은 자신을 포함한 존재의 근원을 묻는다. 또 존재의 종말과 정점에 대해 묻는다. 형이상학의 어원은 가시적 현상의 배후 또는 근저에 은폐되어 있으면서 모든 존재의 원인이 되는 존재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그것은 시간적으로 최초일 것이며, 변하지 않는 것이어야 하며, 모든 운동의 원동력인 것이다. 형이상학을 말하는 Metaphysics에서 meta란 물리적 세계의 배후나 초월의 의미를 가진다. 형이상학이란 단어는 원래 주역에서 나온 것으로 형이상자를 다루는 학문인데 여기서 형이상자란 '도'를 뜻한다. 
 서양철학은 출발부터 대부분 형이상학자들의 무대였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 플라톤의 이데아, 헤겔의 절대정신 등은 모두가 형이상학적 소재다. 물론 중세의 신 역시 형이상학적 물음의 한 답이다. 형이상학적 물음은 인간 존재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비켜가지 못한다. 신학은 인간의 탄생에 대해 설명하고 있지만 방점은 인간의 사후에 대한 설계에 있다. 계율과 징벌을 고지하는 경전을 떠나서 인간의 종교적 욕구는 형이상학적 충동의 중심에 선다.
 철학의 역사를 통해 2천년 이상을 누려온 형이상학도 정답을 얻고 있지 않다. 시대와 학자에 따라 근원적인 존재의 규정이 다르다. 유물론과 유심론은 한 치의 양보 없이 맞서왔다. 인간의 몸과 정신을 둘러싼 논쟁도 진행형이다. 모든 존재의 운동에 대한 논의도 목적론과 기계론의 대결로 이어져 왔다. 형이상학적 작업은 이성을 매개로 이루어진다. 인간을 일러 생각하는 갈대라고 설파한 파스칼의 말을 '형이상학적 갈대'로 바꿔도 무방할 것이다. 갈대가 전개하는 생각은 존재의 종국인 죽음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형이상학적 태도는 우리 인생의 실제에 영향을 준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형이상학의 충동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3. 도덕적 충동
 우리의 일상생활은 특정한 선택을 수행하는 과정이다. 모든 선택은 평가를 전제한다. 여기서 말하는 판단은 당연히 가치판단이다. 자동적인 행동을 제외하고 자발적이고 의도적인 행위, 다시 말해 자유의지에 의해 결행되는 행위가 있다. 바로 도덕적 행위다. 도덕적 행위는 일반적으로 그 실행에 고통을 수반한다. 인간은 자신의 행위가 공동체가 합의한 도덕적 수준에 미달할 때 고뇌하며, 동시에 밖으로부터 오는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근원이 어디인가를 따지기 전에 인간의 도덕적 충동은 매우 자연스럽다.
 도덕적 판단은 통상적으로 옳음, 좋음, 나쁨, 마땅함, 양심, 책임 등의 단어를 사용한다. 이런 언어들은 일정한 가치관점을 나타내는 가치어들(value terms)이다. 도덕적 판단은 가치어들을 사용해 특정한 가치지향을 표출한다. 도덕적으로 올바른 판단과 행동을 실현하려면 행위자의 유의미한 가치의식이 전제된다. 인간의 정신적 가치로 논리적 가치, 심미적 가치, 도덕적 가치, 종교적 가치를 든다면, 성스러움을 대상으로 하는 종교적 가치를 제외하고 도덕적 가치가 우선하는 가치다. 도덕적 가치란 모든 인간에게 요구되는 보편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성스럽지 않다고 비판하지 않으며, 미인이 아니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그러나 도덕적이지 않으면 지탄을 받는다. 지탄은 보통 밖으로부터 오지만 자신의 내면에서 비롯하기도 한다. 칸트는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내 가슴 속엔 도덕률이 빛나고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이처럼 도덕의 유전자를 가진 존재다. 도덕적 행위는 의무감으로부터 나온 것이어야 한다. 취향이나 경향성으로부터 나온 행위는 비록 선을 초래했을지라도 도덕적 가치가 없다. 인간은 도덕적 존재가 됨으로써 자신을 인간으로 간수하는 의무를 이행한다. 인간이 도덕적 존재를 지향하는 정서는 자연스럽고 고귀한 충동이다.
 
 4. 심미적 충동
 아름다움에의 충동은 지적 충동이나 윤리적 충동과 다르게 감성의 발로가 두드러진다. 미의 추구와 실현은 즉각적이고 실질적으로 우리의 삶을 기쁘게 하기 때문이다. 미를 추구하는 것은 일정한 질서와 조화를 구하는 충동이다. 혼돈에서 오는 불안보다 질서를 획득하고, 부조화에서 야기되는 미숙을 교정하는 장치다. 사물과 자연 그리고 인간의 형상과 행동까지 우주 전체는 균형과 조화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이것은 세계 창조의 본래적 의미일 수도 있다. 미의 인식과 미적 창조에 참여하는 행위는 세계와의 유대이기도 하다. 미는 진리 인식의 가치나 윤리적 행동의 가치가 아닌 체험과 표현의 가치다. 미적 충동은 어떤 주체가 미적 대상이나 현상을 감상하거나 직접 창조 행위를 통해 미적 체험을 구체화한다. 우리가 수채화를 그리거나 피아노를 연주하는 일 또는 시를 짓는 창작 행위는 모두 미적 표현이요 체험이다.
 예술은 그 행위 대상의 범위가 넓다. 도덕적 행위가 살아 있는 인간에 한정되는 것과 달리 미적 대상은 무생물이나 가상의 것까지 가능하다. 무너지는 돌담길도 회화의 대상이 되고, 천국과 무릉도원도 회화의 대상으로 자격을 갖는다. 도덕적 행위는 언제나 실천적 해위여야 한다면 예술적 행위는 표현으로 성립한다. 미적 충동은 강렬하지만 누구나 실현해야 할 의무는 없다. 누가 시인이 아니거나 발레리나가  아닌 것 때문에 비난받지 않는다. 그러나 도덕적 가치는 모든 인간에게 요청되는 가치다. 실지로 모든 사람이 미인이어야 할 의무는 없지만 도덕적 행위는 모든 사람에게 그 실천을 압박한다. 
 미적체험의 하나로서 예술품 감상은 작품 속에 녹아 있는 삶의 역사를 간파해내는 능력을 요구한다. 어떤 예술품이 저항과 고발을 담아낼 때 작품에 내재된 역사성에 접근하지 못하면 미적체험은 불완전한 상태에 그친다. 미적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감동과 진지함을 체험케 한다. 인간의 미적충동은 인간이 창조한 최고의 이상과 이념의 깃발을 목도하려는 충동이기도 하다. 아무리 소박하게 말해도 미적 충동의 충족은 인간의 어깨를 가볍게 하고 동시에 발걸음을 경쾌하게 하는 삶의 묘약이다.
 
 5. 의미에의 충동
 인간의 염원과 희망 가운데 최고의 것은 자신의 삶의 의미와 가치의 제고일 것이다. 의미 있는 삶과 깊이 있는 존재를 지향하는 충동이 우리의 내면에 도도하게 흐르고 있다. 탈 없이 밥 먹고 편히 잠자는 수준으로 자신의 삶을 고착시키려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밀의 지적대로 우리는 결코 '배부른 돼지'로 만족하지 않는다.
 인간의 집요하게 매달리는 물음이 있다. 무엇 때문에 사는지, 어떻게 사는 삶이 옳은지, 인생에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우리들은 매순간 이런 물음과 대면하며 산다. 작은 벌레든 덩치가 큰 황소든 그것들은 자신의 존재의미에 관심이 없다. 삶의 의미를 묻고 답하는 고뇌를 수행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니체의 철학에서도 등장하는 이론이지만, 특히 <죽음의 수용소>를 쓴 빅터 프랑클은 절망에 빠진 인간의 의미 회복을 통한 치료법을 제안한다. 사람들은 존재의 무의미와 깊이 없는 삶을  두려워한다. 이유와 의미가 확인되면 삶의 비극이 극복된다. 
 인간과 인간적 삶의 의미를 채색하는 요인은 죽음의 문제다. 사람은 죽고 인생은 무상하다는 의식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절대로 죽지 않을 것처럼 착각한다. 죽음을 면제받거나 회피하려고 몸부림하고, 때로는 망각의 장치를 강구한다. 죽음을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전략들은 결국 미봉책에 불과하고 이로 인해 신경증적 불안에 빠진다. 죽음에 대한 불안은 자신의 삶과의 화해를 방해한다.
 죽음에 대한 의식이나 견해는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 결정에 영향을 준다. 인간은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의 인식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창조한다. 인간의 삶은 타협과 절충이 허용되지 않는 죽음과 불현듯 마주치는 일이다. 1회성으로 제약되는 죽음은 1회성으로 마감되는 생을 의미한다. 의미의 유무는 인생의 생사여탈의 문제와 같다.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인문학적 충동은 인간의 인간적인 매우 인간적인 징표다. 
  성진기 교수(전남대학교 명예교수)
 
 <필자소개>
 · 전남대학교 인문대학장 역임, 한국철학회 회장 역임
 · 한국니체학회 이사(현), 전남대학교 명예교수(현)
 ·'Cafe Philosophia'대표
 · 저서로 『니체이해의 새로운 지평』, 『인간의 길 가치의 세계』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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