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란에는 원대신문사의 연속기획 <우리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와 글쓰기센터의 연속기획 <세계고전강좌> 원고를 번갈아 싣습니다. 특히 <우리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에는 2012년 1학기부터 새로 개설된 '글로벌인문학' 강좌의 내용도 게재합니다. 국내외 여러 석학들이 함께 참여하는 이들 연속기획을 통해 인간 이해와 사유의 깊이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 디지털콘텐츠의 시대

 우리는 디지털 지식 시대를 살고 있다. 인터넷과 정보화는 인문학에도 새로운 장을 열었다.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디지털화, 인터넷으로 유통시키는 작업이 추진되고 있다. 고문헌 원전과 번역물 역시 디지털화되었거나, 현재 진행 중이다. 

 검색의 편의성 역시 크게 신장되어, 손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정작 어떤 정보가 더 중요한가 하는 것이 문제다. 정보의 특성과 활용을 검토해야 할 시점이다. 그래서 콘텐츠(Content)의 등장과 더불어 문화(Culture)에 주목하게 되었다. 깊이 없는 콘텐츠는 관심을 끌 수가 없다. 문화와 콘텐츠의 접점으로서의 문화콘텐츠가 중요한 요소로 떠올랐다.  

 문화콘텐츠는 고부가가치와 창조적 상품(Creative Product)의 하나가 되었다. 정부에서도 문화콘텐츠를 전략 산업으로 육성하고 있다. 문화산업은 국가외교, 홍보, 문화교류 등 움직이는 국가 브랜드로 작용하는 효과가 크다. 문화 강국으로의 국가 브랜드를 높이는 것과도 이어지고 있다. 

 이 같은 측면에서 볼 때 전통문화는 경쟁력을 지닌 문화자원이 될 수 있다. 그들을 디지털화함으로써 인터넷 시대에 걸맞는 유용한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특별히 조선왕조실록에 주목하고자 한다. '조선왕조실록'은 단일 왕조사로는 세계에서 최장 기간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총 1,893권 888책(국보 151호). 1997년 유네스코(UNESCO)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으로 지정되었다. 

 ◆ 전통문화콘텐츠, 조선왕조실록의 편찬

 조선시대에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이름의 책은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이란 이름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태백산본 실록을 1/8로 축쇄, 영인, 간행하면서 붙인 것이다(1950­1958). 당시에는 왕 이름 뒤에 '실록'을 붙여서 말했다. 예컨대『태조강헌대왕실록』, 『세종장헌대왕실록』.  

 사관은 왕의 행동을 기록하는 좌사(左史)와 말을 기록하는 우사(右史)가 있었다. 정7품 이하의 참하관으로 직위는 낮았지만, 역사기록이란 기능과 더불어 왕의 측근에 있었기 때문에 엄격한 절차를 거쳐 제수되었다. 

 그들은 정론(正論)과 직필(直筆)을 생명으로 삼았다. 왕의 전제를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대신과 관료들은 물론 왕이라 해도 잘못이 있으면 직필로 역사의 심판을 받게 했다. 사초(史草)는 아무리 왕이라 하더라도 볼 수 없었다. 중국과는 다른 점이었다. 그래서 사관들은 직필할 수 있었다. 오백년 역사를 지탱할 수 있었던 원동력의 하나라 해도 좋겠다. 

 실록은 사관들이 기록한 사초와 시정기 등을 토대로 한 종합 기록이었다. 왕이 죽은 후에야 실록청을 설치하여 편찬했다. 때문에 왕이 죽은 이후 '후대 역사가의 평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교 문화권에서 그것은 큰 의미와 비중을 가졌다. 언로를 막지 않는 것과 역사의 평가를 기다리는 점에 의해 특징 지워질 수 있다. 사관과 실록은 정치의 주요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실록은 초초(初草), 중초(中草), 정초(正草) 등 3단계에 걸쳐 제작되었다. 정초본 외에 3부를 활자로 인쇄, 간행하여 춘추관과 충주, 전주, 성주 등 네 곳의 사고(史庫)에 보관했다. 임진왜란 중에 춘추관, 충주, 성주 세 사고의 실록은 소실되었다. 전주 사고의 실록만이 병화를 면했다.  

 전주 사고본을 다시 인쇄해 신간본 3부는 춘추관·태백산·묘향산에 보관하고, 전주 사고의 원본은 강화도 마니산, 교정본은 오대산에 보관했다. 춘추관 보관 실록은 소실되었으며, 묘향산 실록은 무주 적상산으로 이전했다. 마니산 실록은 정족산으로 옮겼다. 해서 20세기 초까지 실록은 정족산, 태백산, 적상산, 오대산 사고에 보관했다.

 일제하에서는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을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했으며, 해방 후 서울대학교 규장각으로 이어졌다. 오대산본은 일본으로 유출되었으며 관동대지진(1923) 때 대부분 불탔다. 남은 부분이 동경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었다가, 2006년 7월 반환되었다. 적상산본은 장서각에 보관되었다가 북한에서 가져가, 김일성종합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 조선왕조실록의 국역(國譯)

 실록은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전문 연구자들조차 가까이 할 수 없었다. 실록을 학문 연구에 활용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졌으며 영인본을 만들게 되었다. 하지만 한문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읽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우리말로 옮겨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게 되었다.  

 국역 사업은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1968년 『세종실록』을 처음 번역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가 1972년 함께 참여해 본격화되었다. 마침내 1993년 번역을 완료하게 되었다. 국역 사업에는 26년이라는 시간, 국내 학자 3천여 명이 동원되었다.   북한에서도 1975년부터 사회과학원 주관 아래 추진하여, 1991년 국역 작업을 마쳤다. 총 400책. 

 실록이 우리말로 번역됨으로써 쉽게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양이 엄청났다. 국역본 총 413책, 16만 페이지, 하루에 50페이지씩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 읽을 경우 무려 8년 7개월이 걸린다. 그 기나긴 시간을 누가 투자할 수 있을까. 전산화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 조선왕조실록 CD-ROM과 디지털화

 1995년 10월 『국역 조선왕조실록 CD-ROM』이 간행되었다. 국역 실록을 디지털화해, CD-ROM에 담아냈다. 서울시스템 한국학DB연구소에서 50억 원의 예산을 투입, 3여 년에 걸쳐 이루어냈다. 손쉽게 자료를 검색할 수 있게 되었다.

 이어 2003년 3월 『표점·교감 조선왕조실록 CD-ROM』국사편찬위원회, 서울시스템)이 간행되어, 다시 한 번 전기를 맞게 되었다. 한문 원전을 디지털화했으며, 표점이라는 17개의 문장 부호를 부과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다섯 질의 조선왕조실록을 갖게 되었다. 각 왕대별 실록(1,893권 888책), 해방 이후 축쇄 영인된 『조선왕조실록』(48책), 『국역 조선왕조실록』(1993, 413책), 『국역 조선왕조실록 CD-ROM』(1995), 그리고 표점 교감 조선왕조실록 CD-ROM(2003)이 그들이다. 명실상부한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의 디지털화 사례'라 하겠다.

 방대한 분량의 자료를 DB로 구축함으로써 한국학 자료 디지털화의 효용성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제 온라인을 통해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국역 실록과 표점 원전 실록이 인터넷으로 서비스 되고 있다.
 

 

 ◆ 조선왕조실록으로 오늘을 읽는다

 이제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실록을 접할 수 있다. 학자들의 독점물이다시피 했던 실록이 누구에게나 문을 열어주었다. 조선의 다양한 분야들을 다룬 책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그만큼 역사가 가까이 온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오늘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실록 CD-ROM 간행과 디지털화는 역사를 대중화 하고, 대중을 역사화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역사 드라마나 TV 프로그램, 영화 등에서 적극 활용, 조선 사회와 역사를 생생하게 재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정조 대왕을 다룬 역사극 <이산>, 세종대왕을 다룬 <대왕 세종>과 <뿌리깊은 나무>, 의녀를 다룬 <대장금>, 영화 <왕의남자>, <성균관스캔들>, <해를 품은 달> 등이 좋은 예라 하겠다.      

 이제 오늘의 시각으로 조선왕조실록을 읽어볼 수도 있고, 거꾸로 조선왕조실록으로 우리 시대를 읽어갈 수도 있다. '오늘에 살아 있는 역사', '역사를 통해서 살아가는 오늘'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은 전통문화콘텐츠의 '보물창고[寶庫]'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전통 문화 역시 시대에 걸맞는 형태로 재창조되어야 한다. 

 바야흐로 전통문화유산이자 세계기록유산 조선왕조실록을 다각도로 그리고 창조적으로 ICT(Information & Communication Technology) 시대에 맞게 활용해가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전통문화 콘텐츠의 보고 조선왕조실록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제 자신의 관심사에 맞추어 조선왕조실록을 '클릭(click)' 하는 일만 남은 셈이다.

이남희 교수(한국문화학과)


<필자 소개>

 ·전라북도 문화재전문위원, 도시계획위원

 ·서울시스템 한국학DB연구소장 역임

 ·현재 원광대학교 한국문화학과 교수

 ·저서로『영조의 과거(科擧), 널리 인재를 구하다, 『클릭 조선왕조실록』,『조선후기 잡과중인 연구』,  Click into the Hermit Kingdom  (공저)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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