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제 6대왕 단종은 12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자신의 삼촌이었던 세조에 의해 폐위됩니다.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한양 100리밖에 떨어져 있다는 단종의 묘 장릉에 다녀왔습니다.
 

 

 

 사극을 즐겨본다면 삼촌이 어린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는 이야기를 자주 접했을 것이다. 여기서 삼촌은 조선의 7대 왕 세조, 어린 왕은 조선의 6대 왕 단종이다. 기자는 단종의 능이 있는 장릉에 다녀왔다.
  단종은 12살 때 조선의 제 6대 임금으로 올라 자신의 삼촌에게 폐위돼 영월로 유배를 온 비운의 왕이다. 단종의 죽음에 대한 야사는 많다. 하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에 따르면 단종은 영월의 자규루에서 사약을 받고 승하했다고 한다. 세조는 단종의 시신을 거둬들이는 사람은 삼족을 멸한다고 말했지만 영월에 살던 엄흥도는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거둬 이곳에 매장했다. 
 조선 왕릉은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장릉 앞에 도착하니 유네스코에서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는 마크가 돌담에 새겨져 있었다. 표를 끊고 입구로 들어서니 단종 역사관이 보였다.
  단종역사관은 단종의 생애와 사육신 및 생육신의 충절을 재조명하기 위해 건립한 전시관이다. 단종 역사관 안에는 단종제향과 단종제를 소개하는 글이 있었다. 단종제향은  1516년(중종 11년)에 단종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제사를 시작으로 1698년(숙종 24년)에 왕실 제례로 확립돼 전국에서 유일하게 왕릉에 제향을 올리는 유서 깊은 유교 제례의식이다. 이 의식은 보존과 전승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2011년 강원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단종역사관 안에는 단종 역사에 관한 책들이 전시돼 있었다. 책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왕의 생활 등 다양한 정보도 볼 수 있었다.
 특히 기자의 눈에 띤 것은 단종의 유배거리를 지도로 정리해 놓은 것이었다. 단종은 서울 창덕궁에서부터 여주와 원주, 그리고 영월까지 말과 배를 타고 가야했다. 어린 나이에 홀홀단신으로 유배를 간 단종의 쓸쓸함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종역사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단종에 관한 역사적 사료가 적어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들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전해진다는 것이었다.  
 단종 역사관에서 나와 단종의 능을 향해 걸어갔다. 단종릉은 평지에 있는 다른 왕들의 능과 달리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단종의 능은 조선왕의 능 중 유일하게 서울 100리 밖에 떨어져 있다. 
 왕릉을 오르는 길에 서있는 소나무들은 단종의 부인 '정순황후'가 있던 남양주로 고개가 향해 있다고 한다. 단종의 능에 도착하니 알 수 없는 외로움이 느껴졌다. 어린 나이에 왕이 돼 영월에서 사약을 받기 까지, 어린왕의 비애라는 말이 실감났다. 왕릉에는 문신석과 무신석이 세워져 있지만 칼든 자에게 왕위를 뺏긴 단종의 능에는 문신석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단종의 능에서 내려와 장릉 일대를 돌아봤다. 기자의 눈에 제일 먼저 든 것은 높게 세워져 있는 나무 기둥이었다. 이것은 홍살문이라고 하는데 홍살문 앞에는 참도가 위치한다. 참도는 참배하기 위해 드나드는 길로 신도와 돌길이 함께 위치해 있다. 신도는 신이 다니는 길이기 때문에 일반 관광객들에게 이 길을 걷지 말아달라고 요구하는 표지판이 있다.
 참도를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정자각과 단종비각이 있다. 정자각과 단종비각은 영조 9년 지어졌다. 비각의 앞면에는 조선국단종대왕장릉이 새겨져 있고 뒷 면에는 단종의 생애가 기록돼 있다.
 정자각은 단종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어졌다. 정자각은 아직도 단종의 제사를 지내는 장소로 사용된다. 영월에는 매년 4월 단종을 기리기 위한 지역축제를 개최한다.
  조선의 왕 중 유일하게 국장을 치르지 못한 단종에게 군민들이 국장을 치러주는데 정자각에서 제를 올린다. 기자 또한 중학생 때 국장을 체험해본 적이 있다. 기자는 궁녀역할이었는데 무작정 행렬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영조국장도감의궤』와 『국저상례보편의』를 참고해서 구성했다고 한다.  군민 1천명이 덕포리에서 출발하여 장릉까지 이동하는 국장행렬은 또 하나의 볼거리이자 좋은 역사공부가 된다.  
 발걸음을 돌리고 참도 근처에 있는 영천에 갔다. 영천은 우물인데 정조 15년 정조의 어명으로 영월부사 박기정이 수축하여 한식 때 제정으로 사용했다. 우물의 물은 아직까지 마르지 않았으나 관광객들이 던진 동전이 밑에 쌓여있었다.
 장릉에서 나오는 길목에 있는 재실로 갔다. 재실은 1930년대 지어진 건물로 능을 지키는 참봉1인과 수호군 9인이 기거하고 있었다고 한다.
 장릉의 입구 바로 앞에는 큰 바위 위에 정자 하나가 세워져 있다. 배견정이라고 불리는 이 정자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사람이 아닌 새를 위한 정자라고 한다. 배견정은 '두견새가 절을 하는 정자'라는 뜻이다. 단종이 사약을 받고 승하할 때 단종을 모시던 6명의 시녀가 지금의 동강 금장강에 몸을 던진다. 몸을 던진 시녀 6명의 영혼이 새가 되어 단종을 모신다는 이야기에 당시 영월부사였던 박기정이 정자를 하나 세웠는데 그것이 배견정이라고 한다.
 배견정을 끝으로 장릉에서 나왔다. 작은 공간이지만 그곳에서 단종의 짧지만 강렬했던 생애를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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