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홀연히 복면의 칼잡이가 나타나 강호의 고수에게 결투를 청한다. 가벼운 내상을 입었으나 고수를 물리치고는 사라진다. 또 얼마 후 다시 나타나 또 다른 고수를 가뿐하게 물리치곤, 이제는 강호를 평정했다며 은퇴를 선언했다. 세간 사람들은 복면의 칼잡이를 알파고라 불렀다.
법(法)은 사람(자연인, 법인)이 아니면 물건(物件)이다. 그 구분에 따르면 알파고는 물건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물건의 등장에 혼란스러워한다. 괴물이라 하기도 하고, 인공지능이라 하기도 한다. 문제는 그 명칭을 뭐라 하든 알파고는 결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두 번의 등장에도 많은 사람의 뇌리에 박힌 알파고는 따지고 보면 오직 승리만을 위해 만들어졌다. 단일한 목적만을 위한 물체라 정의할 수 있다. 알파고도 실수가 있었다. 첫 번째 결투에서 받은 가벼운 내상이 그 방증이다. 자칫 인간으로 착각할 뻔했으나, 그 물체는 일부러 패하진 않을 거라는 점이다. 그래서 알파고라는 칼잡이는 무서운 것이다. 더 이상 적수가 없다며 자기 맘대로 은퇴를 선언해도 사람들은 강호의 도리를 따지지 못하고 있다. 혼란은 두려움이 된 것이다.
인공지능이라고 하는 것이 적잖이 많은 화두 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알파고만이 아니라 로스도 있다. 로스는 '솔로몬의 재판'에서와 같이 사람들의 '옳고 그름', 즉 시비(是非)를 가려주려고 한다. 인공지능은 레갈 마인드(legal mind)조차 넘보고 있는 셈이다.
과연 인공지능은 프로메테우스의 불일까, 아니면 판도라의 상자일까? '인간이기 때문'에 모른다고 해야겠다. 그러나 또 '인간이기 때문에'라는 원인(原因)에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그동안 인간은 개, 돼지와 같은 동물과 다른 점을 부각하여 인간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부단히 노력해 왔다. 호모 사피엔스나 호모 파베르 등의 특칭을 통해 지구상의 다른 동물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주장해 왔다. 이젠 인간은 인간과 동물이 아닌, 인간과 기계와의 차이 내지 차별점을 놓고 생각해야 한다.
게으름 때문인지, 편안함을 추구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호기심 많은 인간이기 때문인지 알아서 굴러가는 자동차도 만들었다. 일컬어 자율주행자동차가 현실화되면서 인간은 겁이 났다. 인간은 그 자동차로 야기될 수 있는 법적 문제 등을 고민하게 된다. 더 나아가 특이점을 넘어선 '강한 인공지능체'를 상정하고 호들갑스럽다고 할 정도로 난리다. 개념조차 정의조차 구분하지 아니하고 다양한 용어를 써가며 어떠한 정황을 가정적으로 생각하며 단정하려 들고 있는 꼴이다.
"나는 그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랑한다'라는 그 국어의 어색함이 그렇게 말하고 싶은 나의 충동을 쫓아 버렸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에서 나오는 대목이다. 그렇다. 특이점을 넘어선 인공지능체가 저런 미묘한 사랑의 감정을 드러낼 줄 안다면 승복하련다. 나보다 한 수 위라고.
영화 <에이리언 커버넌트>에서 인공지능체 데이빗은 창조자 피터에게 묻는다. "당신은 날 창조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누가 창조했습니까?" 따지고 보면 인간도 인간이기 위해서 함부로 셈할 수 없는 시간의 길을 따라왔다. 적어도 인공지능체도 그 정도의 노력은 인간과 같이 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고 보면 지금부터 시작하면 되겠다. 인간과 데이빗과의 선문선답(禪問禪答)을…. 

장규원 교수(경찰행정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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