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첫 방학을 맞자마자 녀석은 거의 매일 외출을 했다. 귀가가 늦었다. 새벽녘에나 돌아오니 당연히 늦잠을 잘 밖에. "장학금 놓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아내의 걱정에도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며 녀석의 외출은 계속되었다. 생각 끝에 녀석을 꼬드겨(?) 인근 완주 대둔산으로 둘만의 산행을 하기로 했다. "너와 나 첫 동반 산행이니 네가 주관해 봐라", 녀석은 마지못해 그러마고 했다. 인터넷으로 코스를 검색하고, 스케줄과 도시락 등 나름 준비를 하는 듯 보였다.
 아파트 주차장, 내비게이션 켜지 않기, 케이블카 타지 않기 등 출발 전 몇 가지 약속을 했다. 초행길인데 내비게이션을 끄자는 말에 녀석은 뜨악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전주역을 벗어날 무렵, 대둔산에 대해 물었다.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기암괴석 등 경관이 수려해 호남의 소금강으로 널리 알려진 해발 878m의 산으로 전북과 충남의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오늘 우리가 등반할 전북 쪽에는 입장매표소, 용문골매표소, 안심사 입구 총 3개의 코스가 있고, 입장매표소 코스에는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정상에 쉽게 오르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대요", 숨도 쉬지 않는다. 녀석은 대둔산 가이드가 다 되어 있었다. 평소 말수가 적고 무뚝뚝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청산유수였다. 이야기에 팔려 이정표를 잘못 보는 바람에 삼례 쪽, 반대 길로 접어들었다. 잠시 난감해 하던 녀석이 지나는 이에게 물어 유턴했다. 모내기를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들녘은 어느새 초록이 넘쳤고, 산빛은 푸르다 못해 검었다. 대아리, 경천을 지나 출발 한 시간 만에 대둔산 주차장에 도착했다.
 약속대로 케이블카를 타지 않기로 했다. 관광호텔 뒤 등산로는 코가 땅에 닿을 듯 가팔랐다. 울퉁불퉁 돌길이라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니었다. 스틱에 몸을 의지하며 턱까지 차오른 숨을 골랐다. 저만치 원추리 꽃이 피어있다. 얼마쯤 올랐을까, 코끝에 훅 향내가 스쳤다. 산골이 고향인 나, 오랜만에 맡아보는 더덕 냄새가 그 어떤 향수보다 좋았다. 하양 보라 도라지꽃도 예뻤다.
 정상으로 향하는 길목은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온 등산객들로 붐볐다. 우리는 동심바위를 지나 금강구름다리를 지나 삼선구름다리를 건넜다. 구름다리를 건널 땐 어린아이처럼 발바닥이 간질거리고 오금이 저렸다. 야호! 드디어 대둔산 정상 마천대에 섰다. 사방 백리 안은 내 것인 양 마음 부자가 되었다. 무주 쪽, 전주 쪽, 논산 쪽, 금산 쪽을 둘러보며 한참을 머물다 하산 길에 들었다. 평평한 바위 위에 자리를 폈다. 도란도란, 소나무 그늘에서 준비해 간 도시락을 맛있게 먹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고들 한다. 과연 그럴까? 과정을 생략해 버리고, 뭉뚱그려 중간을 무시해 버리고 원하는 결과만 얻으면 되는 걸까? 우리가 결과만 중시하게 된 건, 산업화 시대의 성장제일주의 산물일 것이다. '빨리빨리'를 입에 달고 사는 국민성 때문일 것이다. 속도만 중시하고 결과만 추구하다 보면 많은 것을 잃게 된다. 오늘 녀석과 내가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에 올랐다면 어땠을까? 사람 구경 참 오랜만인 듯 두리번거리던 다람쥐며, 원추리 꽃이며 산도라지 꽃을 구경이나 할 수 있었을까? 내비게이션을 켜고 달려왔다면 길을 잘못 들어 황당하던 기분 짐작이나 할까? 힘들어하는 녀석의 등을 밀며, 발을 잘못 딛고 휘청거리는 나를 부축하며 그렇게 살과 살이 맞닿아 볼 수 있었을까?
 인생이라는 소풍 길, 목적지만 보고 내달릴 일 아니다. 등록금 걱정에 도무지 해결될 기미라곤 없는 취업난 앞에 한가하게 선문답하는 줄 모르겠다. 허나 현실이 아무리 급하고 암울하다 해도 과정을 생략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해발 878m 대둔산 마천대, 잘못 든 길을 되돌리고 미끄러지고 돌부리에 차이며 정상에 설 수 있었다. 산행 중에 만난 다람쥐며 꽃들이 우리를 정상으로 밀어 올렸다. 애써 준비하고 힘들게 걸어 오른만큼 정상에 선 느낌도 달랐다.

 흔히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한다. 마라톤은 출발선과 결승선만 있는 게 아니다. 출발선에서 곧장 결승선으로 건너뛴다면 당연히 완주로 인정받을 수 없다. 인생, 단거리 경주처럼 죽을 둥 살 둥 스퍼트할 일 아니다. 긴 여정, 어디쯤에서 들꽃 구경도 하고 또 몇 구비 돌아 불어난 개울도 건너고, 또 어느 모퉁이에서는 산새도 만나고 길동무와도 도란거릴 일이다. 돌아오는 길, 한 달에 한 번씩 둘만의 산행을 하자는 녀석의 제안에 나는 흔쾌히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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