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란 리본이 차디 찬 바닷바람을 맞으며 세월호 실종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4월 16일이다. 여전히 그때에 머물러 있는 그날이다. 벽에 붙박혀 있는 노란 리본은 이제 네 개가 됐다. 새로이 4월 16일을 맞아 네 번째 노란 리본을 벽에 붙이는데, 어째 첫 번째 리본에 비해 색이 옅어보였다. 분명 얼마 전에 새로 구입한 것인데, 어째서?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SNS를 통해 세월호 뉴스를 접하다 보니, 이내 노란 리본의 색이 점차 옅어지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우리는 분명 2014년 4월 16일, 그날을 잊지 않고 있다. 적어도 기자가 아는 한에서는 그렇다. 당장 캠퍼스를 걸어 다녀보면 노란 리본을 매달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여전히 노란 리본의 기적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의견은 해를 거듭할수록 분분해지고 있다. 영원히 잊지 않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는가 하면, 세월호 말고도 안타까운 사고는 수도 없이 많은데 왜 세월호 참사만을 특별시하는가, 라는 목소리도 있다.
  어째서 하나의 안타까운 참상을 두고 사람들은 서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이 SNS에서 탁상공론을 벌일 동안, 아직 돌아오지 못한 5명은 여전히 어둡고 찬 바다 속에서 구원을 바라고 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이 모든 일이 세월호 참사를 깊이 알지 못하기에 벌어진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저 남들이 슬퍼하니까, 남들이 노란 리본을 다니까. 하지만 그렇게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가 왜 세월호 참사에 분노해야만 했으며, 슬퍼해야 했는지 통감할 필요가 있다.
  <원대신문>은, 지난 세월 속에 남겨진 세월호 참사의 발자취를 되짚어 보기로 했다.

20140416, 그날
  2014년 4월 16일, 전라남도 진도군 관매도 부근 해상(맹골수도)에서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총 476명이 탑승해 있던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한 것이다. 이는 전체 승객 476명 중 304명(64%)이 사망하거나 실종된 대형 사고로, 대한민국의 해난 사고들 중 두 번째로 많은 사상자를 낸 참사다. 심지어 피해자들 중 대부분이 학생이었다는 점이 국민들에게 더 큰 충격을 안겨줬다. 이들 중 5명(남현철·박영인 군, 양승진 교사, 권재근·권혁규 부자)은 아직 미수습자로 남아있는 상황이다.
  2014년 10월, 검찰은 세월호의 침몰 원인에 대해 "조타수의 조타 미숙으로 인한 대각도 변침으로 인해 배가 좌현으로 기울며 제대로 고박되지 않은 화물이 좌측으로 쏠려 복원성을 잃고 침몰하게 됐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3등 항해사 박한결 씨와 조타수 조준기 씨는 '조타미숙과 지휘감독 잘못' 등 업무상 과실에 의한 선박 매몰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유죄가 선고됐지만, 항소심 재판부인 광주고등법원과 대법원은 세월호의 최대 타각 35도로 설명할 수 없는 선회 반경 데이터가 있다는 점을 들어 최종적으로 무죄 선고를 내렸다. 이로써 세월호가 급변침을 하게 된 1차적 원인은 미궁 속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원인은 아직까지도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세간에서는 세월호 침몰 원인에 대해 선박 간 충돌설, 암초 충돌 및 좌초설, 충돌 직전 정전설, 조타기 고장설, 선체 이상설 등 수많은 의혹을 내놓았지만, 정부의 조사 결과 모두 사실이 아니라는 결과가 나왔다.
  이렇듯 나라를 뒤흔들 정도로 크나큰 대형 재난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사건 발생 일주일 후에야 첫 공식 성명을 내놓은 박근혜 정부에 대해서는 분노 섞인 비판의 목소리가 여전히 끊이질 않고 있다.
  사고 당일,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마지막 사고 관련 지시를 내린 오전 10시 20분부터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를 방문한 오후 5시 15분까지 행적이 묘연한 것으로 밝혀져 당시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이 일은 이후 '세월호 7시간'으로 불리게 됐고, 세월호 참사로부터 992일이 흐른 뒤에야 공식 답변을 내놓음으로써 이 공백의 7시간의 비밀이 낱낱이 밝혀졌다.
  전말은 이렇다. 사고 당시 대통령은 10시 넘어서까지 늦잠을 자느라 아무 것도 하지 않았고, 최순실이 청와대에 들어와서 보고를 받고 대통령에게 중대본에 갈 것을 권하자 그제야 머리 손질을 하고 5시가 넘어서 중대본으로 간 것이다. 즉, 대통령은 직무유기를 했고 비선 실세 최순실이 오래 전부터 국정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는 것이, 4년 가까이 밝혀지지 않았던 세월호 7시간의 비밀이다.
  이 외에도 일본에서는 운항이 금지된 노후선박인 세월호의 수입 운항, 사주인 유병언 일가의 부도덕한 경영, 선사인 청해진해운의 부실한 선박 관리와 안전 교육, 이준석 선장과 항해사의 판단 착오와 늑장 대응, '가만히 있으라'는 비상식적인 안내 방송, 정부와 관료의 대처 등 세월호 참사는 최악의 상황들이 얽히고설켜 터져버린 비극이다.
  세월호 참사는 그 자체만으로도 비극의 한 덩어리였지만, 이 사고가 도화선이 돼 대한민국 사회의 병든 일면들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전후의 상황을 살피지 않는 미진한 구조 작업을 무조건적으로 비난하거나, 음모론을 펼쳐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든가, SNS를 통해 생존자의 위치를 알리는 허위성 글들이 여기저기 판을 쳤고, 이로 인해 구조 골든타임이 모두 소모되는 일이 일어났다. 또한, 사고에 대한 온 국민의 관심을 이용해 개인적인 이득을 취하려 하는 사람까지 나타날 정도로, 세월호 참사는 병들다 못해 썩어 문드러진 대한민국 사회의 민낯을 들춰낸 계기가 됐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그날로부터 4년이 지났지만, 5명의 미수습자와 세월호의 명확한 침몰 원인 등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는 아직까지 많다. 이 문제점들을 밝혀내지 않는 한, 노란 리본의 색은 바랠지언정 결코 그 색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20140416, 우리는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법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을 꼽으라면, 열에 아홉은 노란 리본 캠페인을 말할 것이다.
  노란 리본은 미국에서 전쟁에 참여하는 남편을 둔 아내나 가족들이 나무에 노란 리본을 묶고 무사귀환을 바란 것에서 유래된 상징이다. 영국 시민전쟁 당시 청교도 군대가 노란 리본과 띠를 두르고 전쟁터에 나가기도 했으며, 1973년 토니 올랜드와 돈이 팝송 〈늙은 떡갈나무에 노란 리본을 달아주오〉를 발표한 이후 멀리 있는 사람을 그리워하고 기억하는 상징이 됐다.
  미국의 경우, 이 노란 리본의 상징을 빌어, 1979년 미국인 52명이 이란 주재 미국대사관에 인질로 억류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노란 리본 달기 운동을 펼친 바 있다. 국내의 경우에는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당시 실종자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뜻으로 노란 리본 캠페인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이는 4주기를 맞은 현재까지도 활발히 진행 중인 운동으로, 세월호 참사를 함께 슬퍼하고 잊지 않겠다는 마음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가장 단적인 예다.
  한편, 세월호 진상 규명 다큐멘터리 영화 〈그날, 바다〉가 지난 12일 개봉되기도 했다. 그날, 바다는 세월호 참사 당일 항로를 기록한 데이터를 4년간 치밀하게 조사해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실을 추적해 나가는 다큐멘터리다. 일반 상업영화와 달리 시민들의 십시일반 펀딩을 통해 제작비를 모아 만들어진 영화라는 것이 주목할 점이다. 이 외에도 세월호를 주제로 한 영화는 〈다이빙 벨〉, 〈편지〉 등이 있다.
  또한, 영화뿐만 아니라 세월호에 대한 소설 또한 우후죽순 출간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거짓말이다」, 「모서리의 탄생」, 「세월」 등이 있다. 어느 시대에서든 예민한 통각을 지닌 소설가의 시선으로 바라 본 세월호 참사는 우리를 깊은 상념에 잠기게 한다.
  이처럼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작년, 우리대학에서는 세월호 참사 3주기를 기리기 위해 '세월호 기억의 날 행사'를 진행한 바 있다. 이어 세월호 참사 사상자 중 우리대학 동문인 단원고 교사 고창석(체육교육과 93학번), 이해봉(국사교육과 01학번) 동문을 추모하고 기리기 위한 위령제가 열리기도 했다.
  우리가 이토록 세월호 참사를 상기하려는 이유는 비단 수많은 사망자를 낳았기 때문이라는 것 말고도, 국가가 국민들의 생명을 보장해주지 못한 우리 사회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말아야 할 비극이기 때문이다. 이에 우리는 제2의, 제3의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노란 리본을 가슴 깊숙이 붙박아야 할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20140416, 잊지 않겠습니다
  "공동체는 피해자를 기억하고, 재난과 그 해결의 전 과정을 기록해야 한다."
  지난해 12월, 4.16연대(4월 16일의 약속 국민연대)가 발표한 13개의 권리 항목 중 11번 항목인 '기억과 기록'에 담긴 글이다.
  어떤 일이든 잊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잊지 않겠다고 마음먹어도 그 기억은 흐르는 세월에 풍화돼 잊혀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위의 선언문대로, 우리는 우리 사회 내부에서 일어난 비참한 역사와 그 피해자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는 그들에게 있어 권리이자, 우리에게 있어 의무인 것이다. 이는 단지 세월호 참사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 관련 뉴스를 접하다 보면, 세월호 참사와 천안함 피격사건을 비교선상에 놓고 얘기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위와 같은 비교는 명백한 오류다. 죽음에 저울추를 달아서는 안 된다. 두 참사 중 어느 것이 더 안타까운 일인지, 슬퍼해야 하는 일인지 재는 일은 없어야 한다.
  우리는 연대해야 한다.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한 가족을 기다리며 사고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있는 세월호 사건의 유족,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잃은 아들을 여전히 기다리는 천안함 사건의 유족, 그리고 여전히 가족을 잃은 비통함에 가슴 아파하고 있을 다른 사고의 피해자들까지. 우리는 이들을 기억하고, 잊지 않아야 한다.

  우리에게 있어 사회란 무엇인가. 사회란 동일한 사람끼리 뭉쳐 형성된 거대한 집단이다. 만일 그 사회에 참사가 일어날 때면, 그 어떠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도 개입해서는 안 된다. 순수한 한 뜻으로 모여 참사를 똑바로 마주하고, 애도하고, 그 원인과 진상을 샅샅이 밝혀내 그런 일이 또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하는 것. 그것이 사회 구성원된 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우리는 상실과 애통, 그리고 들끓는 분노로 존엄과 안전에 대한 권리를 선언한다.
우리는 약속한다.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세우기 위한 실천을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또한 우리는 다짐한다.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각종 재난과 참사, 그리고 비참에 관심을 기울이고 연대할 것임을.
우리는 존엄과 안전을 해치는 구조와 권력에 맞서 가려진 것을 들춰내고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하지 않겠다.
  이 선언은 선언문으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우리가 다시 말하고 외치고 행동하는 과정 속에서 완성돼 갈 것이다.
함께 손을 잡자. 함께 행동하자."
-4.16인권선언 中-

  김정환 기자 woohyeon17@wk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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