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힘든 것은 며칠 푹 쉬면 괜찮지만 마음이 힘들 때는 며칠 푹 쉬어도 괜찮아진다는 정답마저 없다. 개인적으로 마음이 한창 힘들 때였다. 스물두 해를 지내오면서 아마 제일 힘들었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친구의 권유로 해병대캠프를 지원해 포항으로 향했다. 2004년 1월24일, 4박 5일의 캠프는 시작됐다.

 사단 앞을 지키고 있는 군인을 보는 순간 몸이 바짝 조여왔다. 집결지에 도착 했을 때 멋있는 군인들이 있었고, 생각과는 달리 많은 남자들이 있었다. “남자들은 어차피 군대를 갈테니, 여자들만 있을 것이다”고 생각했는데 중, 고등학교 및 축구부, 야구부 등에서 온 단체팀이 많았다. 혹시 멋있는 사람은 없나 잘 살펴봤지만 그런 기대는  접기로 했다.

 나는 해병대캠프 제64기 316번 교육생이 됐다. TV에서나 보던 내무실에 도착하니 정말 내가 군인이 된 것 같았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면서 왠지 모르게 으쓱해졌다. 허나 으쓱함도 잠시 군복을 갈아입은 후 바로 “각 소대들어” 라는 소리와 함께 전체 집합에 들어갔고, PT훈련을 받았다. PT만으로도 몸이 너무나 힘들었다. 평소에 운동을 안 한 탓인가.

 “축구 골대 돌아서 선착순 5명”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 다리가 안보일 정도로 뛰면서도 심장이 멎어버리는 것 같았다. “뒤로 취침, 앞으로 취침”을 할 때에는 군복에 흙이 묻지는 않을까 무서워 몸을 사렸고 오죽했으면 친구랑 돈 내고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도 했었다. 저녁 식사시간이 됐다. 말로만 들었던 ‘짬밥’을 드디어 내가 먹는 것이었다. 배식을 하는데 마치 10년만에 친구를 만난 듯 밥이 너무나 반가웠다. 군대에서는 수저와 젓가락을 사용하지 않고 포크수저로 식사를 한다. 처음엔 김치를 먹을 때가 조금 불편했지만 나중에는  요령이 생겨서 김치를 포크로 찍고 남은 부분을 입으로 찢어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센스까지 생겼다. 그곳에서 입을 잠옷도 여러 벌 챙겨갔건만 군복을 그대로 입고 자야만했고 모포 달랑 하나를 덥고 자야해서 잠결에도 “아 추워, 아∼추워죽겠네"를 외쳤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불침번도 서보았다. 완전무장을 하고 우리 내무실 사람들을 지킨다는 게 나름대로 뿌듯했다. 말로만 듣던 IBS 훈련은 정말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비까지 와서 ‘이러다 얼어죽는구나! 이러다 힘들어죽는구나!’싶었다. 해변가에서 훈련을 받으며 바다 속에서 뒤로 취침을 해야 할 때는 ‘이러다 죽으면 어쩌지 정말 죽지 않을까’하는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바닷가에서 선착순을 몇 번하고 모래바닥에서 박박기고 그러다 꾀병을 부려 환자를 자청해 의무실에 들어가서 쉬었다. 훈련이 끝나고 내무실 사람들은 IBS훈련이 가장 힘들어서 그런지 기억에 가장 많이 남는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참고 훈련을 받을 걸  하는 후회가 든다.

 고공낙하훈련을 할 때는 모형 비행탑에 올라가 몸의 안전장치 하나에 의존한채 맨땅에 뛰었다. 평소에 겁이 많은 나라 내가 뛸수 없을 줄 알았다. “하나 둘 셋. 낙하” “엄마~” 휙.
모든 훈련을 마친 후 눈물이 찔끔했다. 정말 오줌까지 질질 싸가면서 힘들게 받았던 훈련과, 함께 했던 내무실 사람들 그리고 그 힘든 훈련 속 에서도 강해지자는 나름대로의 개인적인 부담감.그런 것들이 머릿속을 교차했다.

 그 시기에 내게 큰 전환점이었던 해병대캠프는 눈 깜짝 할 새에 끝이 났고 캠프 수료증과 패용증, 그리고 강한 마음이 지금 내 안에 남아있다. 3일간의 훈련이었지만 그훈련들을 통해서 어느새 나는 강해져 있었다.

이 슬 기 (정치행정언론학부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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