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없는 대한민국을 상상해보는 것은 '우리에게 한글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는 첫 번째 과정이 될 것이다.  /편집자

 
  한글 없는 대한민국에 대한 상상
 한글이 없는 대한민국을 상상해본다면 우리의 머릿속엔 어떤 모습이 펼쳐질까? 상상하는 미래의 모습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상상의 공통분모에는 다음과 같은 걱정이 들어있을 것이다.
 "한글이 없다면 우리말도 존재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글이 없다면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없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한글이 없던 시절 우리 조상들은 우리말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었고, 우리가 고유문화라고 생각하는 문화적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러니 한글이 창제되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지금과 같은 우리말을 쓰고 있을 것이고, 문화적 관습도 지금의 것과 비슷할 가능성이 높다. 한글 없는 우리말 공동체는 지금과 다를 수는 있지만, 그 차이가 우리말 공동체의 본질을 바꿀 만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러한 단정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이 문제와 관련하여 볼 때 몽골어와 몽골문자의 상황은 무척 흥미롭다. 현재 몽골인들의 민족공동체는 몽골공화국과 중국에 있다. 몽골인들이 거주하는 국가는 이렇게 달라졌지만 이들은 동일한 민족어를 공유하고 있다. 몽골어는 몽골공화국뿐만 아니라 중국 내몽골자치구의 공용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들이 사용하는 문자가 다르다는 데 있다. 
 중국의 내몽골자치구에서 사용하는 문자는 몽골인들이 전통적으로 계승해 온 고유문자(몽골 비치그)이지만, 몽골공화국에서 사용하는 문자는 러시아어에 사용되는 키릴문자다. 소련(현재의 러시아)의 지원으로 몽골공화국이 성립되었다는 역사적 경험이 문자를 선택하는 데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몽골 비치그를 사용하는 내몽골의 몽골어가 중국어화되고 내몽골의 문화가 중국화되는 반면, 키릴문자를 사용하는 몽골공화국의 몽골어는 대체로 전통적인 몽골어를 유지한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내몽골자치구에서는 규범적인 몽골어의 모델을 몽골공화국의 몽골어에서 찾는다. 이곳의 몽골어가 내몽골어에 비해 순수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처럼 전통적인 문자 대신 외래 문자를 쓰는 몽골공화국에서 몽골어와 몽골문화가 여전히 향유된다면, 문자와 언어가 공동운명체라는 믿음을 한번쯤 의심해 봐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한글이 없다면 우리말도 존재하기 힘들 것이다' 또는 '한글이 없다면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없어질 것이다'라는 우려를 근간으로 해서 이루어진 우리의 국어 의식도 한번쯤 되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글 없는 대한민국을 상상해보는 것은 '우리에게 한글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는 첫 번째 과정이 될 것이다. 
 
  우리가 선택한 문자, 한글
 모어(母語)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말이다. 근대 언어학자들이 모어를 통해 그 민족의 본질적인 정신을 규명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은, 모어 문화가 공동체의 역사적 문화이자 생득적 문화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문자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었고, 그런 만큼 언어학적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문자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언제든 교체할 수 있다는 말이고, 언제든지 한글이 아닌 다른 문자를 쓸 수도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우리가 이 부분에서 분명히 해야 할 점은 문자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 선택은 언제나 역사적 선택이었다는 점이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하게 된 것은 세종 당시의 조선 사회에서 소리문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전부터 동아시아 여러 민족들이 고유의 소리문자를 창제한 데에서 또 창제한 뒤에 한자 발음 사전인 운서(韻書)를 편찬하고 유교와 불교 경전의 번역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데에서, 당시 새로운 문자에 대한 역사적 요구가 팽배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세종은 이러한 역사적 요구에 응하여 문자를 만들었고, 조선 사회는 그 문자를 받아들여 이를 활용하였다. 우리가 한글을 우리말을 표기하는 문자로 선택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에 따라 한글은 조선시대 내내 뜻글자인 한자를 보조하는 문자로, 한문을 배울 기회를 갖지 못한 백성들이 사용하는 문자로 자리를 잡아갔다.
 그런데 한글의 사용과 관련하여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은, 19세기 말 근대적 개혁이 시작되면서부터다. 근대적 개혁이라는 시대의 요구에 따라 한문이 퇴출되고, 한글이 공용 문자로서 그 위상을 확립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또한 민족의 자주성과 우수성을 강조해야 했던 당시 현실에서, 한글과 우리말은 민족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하나의 상징으로 그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이를 보면 한글 없는 우리말을 상상하기가 어려워진 것은 20세기 이후의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글의 위상을 높인 역사적 선택 이후 한글은 우리 삶의 중심으로 들어와 뿌리를 내렸다.
 
  한글의 존재 의미
 이러한 사실을 고려한다면, '한글이 없다면 우리말도 존재하기 어려울 것이다'라거나 '한글이 없다면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없어질 수도 있다'라는 우려만으로 한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역사적 선택의 의미를 호도할 위험이 있다. 더구나 이러한 논리는 '한글만 있다면 우리 민족 그리고 우리말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논리로 발전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우상이 된 한글이 또는 근사한 박물관 속에 전시된 한글이 민족의 정체성을 지킬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한글이 없다면 우리말도 존재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걱정이 의미 있는 걱정이 되려면, 먼저 이 걱정이 '한글만 있다면 우리 민족과 우리말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라는 논리로 확대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처럼 관념적이고 수세적인 논리는 일제강점기를 견딘 힘이기도 했지만, 이러한 논리를 21세기의 다원화 사회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이제는 한글문화가 쇠퇴하는 것에 대한 걱정도 적극적이고 현실적일 필요가 있다. '한글 문화가 풍부해진다면 우리말 문화도 더욱 풍성해진다', '지금 한글을 쓰지 못한다면 우리의 생활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등의 논리로 한글 없는 대한민국을 걱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한글을 우리 문자로 만든 역사적 선택과 그 선택을 수용하여 이룬 한글문화라는 관습과 전통의 중요성을 생각하는 태도이다.
 
최경봉 교수(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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