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마음으로] 그 말을 꼭 그렇게 써야만 할까? - 원대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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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마음으로] 그 말을 꼭 그렇게 써야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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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11.17  05:4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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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더 나은 언어생활을 위한 우리말 강화』(최경봉 지음, 책과함께, 2019)의 내용 중 일부를 가져온 것입니다.  /편집자

 
 언어 규범은 왜 필요한 것일까? 무난한 답변은 '혼란 없는 언어생활을 하기 위해서'이다. 이때 '혼란 없는 언어생활'이 '원활한 의사소통'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언어 규범은 '의사소통이 무리 없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조정자 역할을 해야 한다. 언어 규범이 실생활에서의 언어 관습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건 이 때문이다. 우리는 규범을 근거로 언어 사용의 잘못을 지적하면서도, 그런 지적을 받으며 사용되던 말이 자리를 잡고 나면 그 말을 근거로 규범의 존재 이유를 물으면서 타협지점을 찾게 되는 것이다. 다음 세 가지 사례를 보면서 규범의 존재 의미를 생각해 보자. 
 
 첫째, '고급지다'와 '고급스럽다'
 
 "고급진 옷차림을 한 남자"나 "실내 장식이 세련되고 고급졌다."는 요즘 많이 쓰이는 표현이지만 규범에는 맞지 않는다. 규범대로라면 '고급지다'는 '고급스럽다'로 바꿔야 한다. 그런데 규범의 제약에도 '고급지다'는 더 널리 쓰이면서 도리어 규범을 바꿀 기세다.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고급지다'가 '고급스럽다'를 대체해도 자연스러울 만큼 접미사 '-지다'와 '-스럽다'의 의미가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접미사가 '그런 성질이 있음'이란 의미를 공유하더라도 그 쓰임이 항상 같은 건 아니다. 
 ○ 값지다   × 값스럽다
 ○ 멋지다   ○ 멋스럽다
 × 사랑지다  ○ 사랑스럽다
 ? 고급지다  ○ 고급스럽다
 그런데 문제는 위와 같은 쓰임을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는 규칙을 세울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고급지다'가 널리 쓰이게 되니 규칙의 호위를 받지 못하는 규범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결국 '고급지다'의 확장을 막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고급지다'가 확장되는 또 다른 이유는  '-지다'와 '-스럽다'의 쓰임에 '고급지다'를 유추할 수 있는 고리가 있기 때문이다. '멋지다'와 '멋스럽다'는 모두 가능한데, '멋스럽다'에서 '고급스럽다'를 연상하는 일이 잦아지면 어떻게 될까? 머릿속엔 "멋지다 : 멋스럽다 = X : 고급스럽다"의 틀이 생길 것이고, 시간이 흐르면 그 틀의 X가 '고급지다'로 채워질 것이다. 게다가 '고급지다'에서 '값지다'를 연상하는 건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이런 연결 고리에서 '고급지다'가 자리 잡게 되면 '값스럽다'가 쓰이는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둘째, '알은척'
 
 "텔레비전에 나오고 나서 (알은척/아는 척)하는 분들이 늘었어요."
 위의 문장에서 괄호 안에 들어갈 말은 뭘까? 답은 '알은척'이다. 사실 '알은척'은 문법 규칙에는 맞지 않는 말이다. '알(다) + 은 + 척'의 구성인 이 낱말이 문법 규칙대로 만들어졌다면, '알(다)'의 'ㄹ'이 탈락하여 '안척'이나 '아는척'이 되었을 것이다. '알다'는 '알고, 아니, 아는 ...'으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알은척'은 당당한 표준어다. '알은척'이 다음 뜻의 낱말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에 나오고 나서 알은척하는 분들이 늘었어요."에서 '알은척'의 뜻은 '다른 사람을 보고 인사를 하는 등의 안다는 표시를 냄'이다. "그가 그 일에 대해 알은척을 한다."에서 '알은척'의 뜻은 '어떤 일에 대해 관심을 가지며 안다는 태도를 나타냄'이다. '알은척'은 이 두 가지 뜻을 나타내기 위한 낱말이 된 것이다. 
 "알량한 지식으로 (알은척/아는 척)을 하는 것보다는 어리석게 구는 게 낫다."
 위의 문장에서 괄호 안에 들어갈 말은 뭘까? 문맥상 '알지 못하면서 아는 것처럼 그럴 듯하게 꾸밈'의 뜻이니 '알은척'은 아니다. 그런데 정답인 '아는 척'은 낱말이 아니다. 동사 '알다'가 의존명사 '척'을 꾸미는 구성의 일반 구이다. 낱말은 문법 규칙에 맞지 않는 형태로 만들어져 쓰일 수 있지만 이처럼 구로 쓰일 때는 문법 규칙에 따른다.
 국어사전에서의 구분은 이처럼 명확하지만, 현실에서는 '알은척'과 '아는 척'을 구분하기보다는 이를 '아는 척'으로 통합해 쓰는 경향이 있다. 차이가 크지 않다면 단순화하는 게 편리하기 때문이다. 관습을 지키는 게 불편해질 때 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셋째, '사겨보다'
 
 "외국어 잘하고 싶으면 외국인 친구를 (사귀어/사겨)보는 게 좋아요." 이 문장에서 괄호 안에 들어갈 말은? '사귀어'가 맞다. 줄여 쓰면 '사겨'도 맞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겨'로 줄어들 수 있는 말은 '사귀어'가 아니라 '사기어'다.
 그렇다면 '사귀어'를 어떻게 줄여 써야 할까? 아쉽지만 줄여 쓸 방법이 없다. '위+어'를 한 음절로 줄여 말할 때의 발음을 표기할 자모가 없기 때문이다. 한글맞춤법에서 허용하는 모음자 21개 중 줄어든 발음을 표기할 수 있는 문자는 'ㅑ, ㅕ, ㅛ, ㅠ, ㅒ, ㅖ, ㅘ, ㅙ, ㅝ, ㅞ, ㅢ'다. 이 중에 '사귀어'를 줄인 말을 표기할 문자는 없다. 줄여 쓸 문자가 없으니 줄여 말하는 걸 인정할 근거도 없다. 규범에 따른다면 '사귀어'나 '바뀌어' 등은 줄여 말하지도 줄여 쓰지도 말아야 한다. 이런 모순된 상황 속에서 '사겨'나 '바껴'처럼 일부 방언에서 쓰이는 말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결국 현실과 규범의 괴리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두 가지다. '위+어'의 발음 [wje]에 해당하는 모음자 'ㅜㅕ'를 새로 도입하든지, 일반화된 방언 발음 '사겨'를 인정하든지.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런 환경에서 관습화된 준말이 사전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선 '줴박다'나 '줴짜다'를 '쥐어박다'와 '쥐어짜다'의 준말로 설명했다. 표준 규범상으로는 '쥐+어'가 '줴'로 줄어들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처럼 '쥐어'를 '줴'로 줄이는 관습을 존중해 '줴박다'와 '줴짜다'를 국어사전에 올린다면, '사귀어보다'와 '사겨보다'를 함께 인정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최경봉 교수(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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