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도 바라나시

 힌두교 제일의 성지인 바라나시에서 체크인을 마쳤다. 더 이상 무거워질수도 없는 배낭을 객실에 던져놓고 카메라만 챙겨 게스트 하우스를 나섰다. 두사람이 나란히 걷는 다는게 불가능할 것 같은 비좁은 시장 골목에 소와 염소들이 앞서가며 도통 길을 비켜주지 않았다. 우물쭈물 하는 사이에 뒤쪽에서 장정 대여섯명이 나무 들것에 주황색 천으로 둘러싼 ‘무엇인가'를 들고 걸음을 재촉한다. ‘하필 이 좁은 골목을 저렇게 우르르 모여 다니는 이유는 뭔가' 라는 생각과 동시에 마침 문이 열리던 가게로 후다닥 뒷걸음질치고 말았다. 놀란 마음이 조금 진정되자 조금전의 그 행렬이 장례의식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좁은 골목을 빠져 나오자 마자 끝없이 펼쳐진 강이 한눈에 들어왔고 그 보다 먼저 후각을 자극시킨 것은 내 코에 맞지 않는 메케한 냄새였다. 굳이 냄새의 근원지를 찾지 않아도 그곳이 화장터였음을 알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 역한 냄새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남루한 차림의 인도인이었다. “자페니스? 꼬리아?" 나 역시 마찬가지지만 서툰 영어로 국적을 묻는다. ‘Korea' 라고만 짧게 대답했다. 그는 한국이란 나라에 꼭 가보고 싶다며 나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인도는 처음이냐고 물었다. ‘처음이다' 라고 대답한 순간 아차 싶었다. 많은 경험담 등을 통해 인도인들은 인도 방문이 처음인 관광객을 우습게 여겨 가이드를 자처해 지갑이 열릴 때까지 끈질기게 붙어 다닌다는 얘길 익히 접했기 때문이다. 그는 신이 났는지 “원래 이 곳은 가족 이외의 사람은 들어올 수 없는 곳이지만 너는 내 친구이니 얼마간의 돈을 내면 윗사람에게 부탁을 해 보겠다"고 했다. 내가 귀찮은 듯한 제스처를 취하자 상대방은 조금 주춤하더니 인도인 특유의 넉살을 부리며 갠지스강의 역사에 대해 알려주겠다고 한다. 절반은 힌두어 절반은 어설픈 영국 영어여서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나름대로 유익한 시간이었다. 그는 나에게 마지막으로 혹시 궁금한 것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대뜸 질문했다. “여기 있는 그 누구도 슬퍼보이지 않는다. 왜 우는 사람이 한명도 없는가?" 그는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슬플 일이 무엇이냐. 너는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성스러운 어머니의 강으로 돌아가 신을 마주할 수 있는데 무엇이 슬프단 말인가" 라고 자신있게 대답했다.

 뒷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허름한 옷차림에 신발도 신지 않아 걸인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이 사람의 입에서 그런 거창한 말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 전혀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또 “내가 너에게 친절한 가이드가 되었다고 생각하나? 그럼 어서 그만한 대가를 치러라" 겪어보지 않으면 결코 느낄 수 없다던 인도인만의 처세술에 어이가 없어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지갑을 열어 10루피(약300원)를 건넸다. 그는 돈을 받자마자 아무말 없이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도대체 삶과 죽음은 무엇인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도시 바라나시의 갠지스강은 나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궁색한 대답이 될지도 모르지만 누군가의 말처럼 삶과 죽음은 강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믿음 역시 그것을 믿는자에게는 항상 열려있는 문이지만 방관자에게는 열쇠조차 쥐어주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한참만에 혼자만의 대화에서 헤어나온 나와는 무심하게 아이들의 연은 강 건너 저무는 해를 여보란 듯 더 높이 더 멀리 바람을 타고 있었다.

 김 옥 남 (한국어문학부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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