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만고불변의 진리가 있다면 그것을 한 마디로 말씀하여 주십시오'라는 제자의 질문에 대하여 공자는 주저하지 않고 바로 그것은 '용서'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용서는 때와 장소를 막론하고 동서고금에 변함없는 진리라고 설파하셨다는 것이다. 용서는 남의 잘못을 포용하고 조건없이 인정하는 너그러운 자세이다. 내가 용서하였으니 너도 나의 잘못을 이해하라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관계의 연속 속에서 산다. 자연이나 환경, 식생활 등 자연적 관계를 제외한 사람과의 관계는 일생동안 자기의 성공과 실패까지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 관계에서 용서는 상대를 인정하고 포용하며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자세이다. 상대에 대한 태도는 무시나 무관심에서 미워하고 싫어하는 관계에서, 인정하고 포용하고 사랑하는 것까지 다양하나 가장 중요한 관계에 대한 자세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한다. 상대에게 불편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지극히 소극적이고 간단한 배려이다. 그러나 인간관계에서 배려는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


 나와 관계있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행복을 느끼게 하고 편안하게 하여 주는 것이 진정한 배려이다. 침이나 껌을 거리에 버려 누군가에게 불쾌감을 주고 그것을 제거해야 할 수고와 경비를 소모하게 하고 여럿이 쓰는 화장실을 더럽히고 공중장소의 물건을 낭비하여 사회적 비용을 증대시키는 행위는 '하지 않음'만으로도 지켜지는 소극적 배려를 무시한 것이다. 이름을 기억하여 주고 상대의 어려움을 같이 해결하려 동참하고 같이 슬퍼하고 기쁨에 같이 즐거워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한국 사람은 '배고픔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 민족'이라는 비아냥거림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 법의 잣대는 아주 소극적인 최소한의 배려만을 요구한다. 법은 위반에 해당하는 절도나 강도, 사기, 살인을 금하고 처벌할 뿐이다.


 그러나 그 정도의 소극적 형식으로는 이 사회가 건전할 수는 없다. 최소한 형식적 유지는 가능하겠지만 사랑과 평화가 깃든 화기애애한 사회는 기대하기 어렵다.


 중국인들은 '관시', 즉 우리말로는 '관계'라는 용어를 매우 중시한다고 한다. 우리는 관계를 '인연'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우리 학생들은 종종 자신에게는 왜 좋은 친구가 없는가 하고 한탄한다. 이것은 자기가 먼저 좋은 친구가 되었을 때 좋은 친구가 나타난다는 지극히 단순한 원리를 모르고서 하는 말이다.


 상대에 대한 배려는 남을 위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에게는 손해되는 행위라는 착각도 흔히 법하기 쉬운 오류다. 상대에 대한 배려는 모두 자기에게 되돌아오는 이익이다. 배려와 인정은 바로 상대가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게 하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모임에서 자기주장만 하고 남의 말은 잘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은 진정으로 관계에서 가장 실패한 자다. 귀가 둘인 이유는 남의 말을 잘 들으라는 것이라는데 하나인 입으로 쉬지 않고 떠들기만 하면 남의 입장, 지식의 습득, 상대의 인정이라는 지혜로운 계기를 다 잃는 것이다.


 인간관계의 통계를 보면 상대가 자기의 말을 긍정적으로 잘 경청했을 때 가장 호감 가는 사람으로 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마 가장 불편한 친구를 고르라면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누구나 지적할 것이다. 막상 자기는 남에게 항상 배려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망각하고 사는 것이 일반적 현실일 것이다.

 
 가장 훌륭한 리더는 구성원에게 자기일인 것처럼 배려하는 사람이 아닐까! 작은 것부터 살피고 감싸는 마음은 어디에서나 환영받고 사랑받는 대상이 될 것이다. 배려가 생활화 되면 가장 편하고 행복한 것이 바로 배려하는 생활이다. 작은 이익은 가까이 있고 큰 이익은 멀리 있다. 한 해를 보내면서 배려하지 못한 이웃이나 친구도 생각하여 보고 새해에는 항상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로 거듭 발전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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